비가 왔다. 가느다란 비가 흩뿌려서 우산을 쓰기에도 그냥 맞기에도 개운치 않은 날이었다. 외출하기 싫었다. 하지만 집 어디에도 내가 있을 곳이 없었다. 장식이 복잡한 귀걸이를 하는 바람에 불편한 옷을 걸쳤고, 옷이 불편한 김에 신발도 거추장스러운걸 신었다. 영락없이 데이트 할 때 차림이었다. 꾸민 김에 차를 타고 갈까 하다 자전거를 끄집어냈다. 자전거는 자전거로 미어터지는 보관소에서 애처롭게 고개를 처박고 비를 다 맞고 있었다.

 도서관에 도착했다.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눈치를 주던 남자가 보인다. 그를 피해 자리를 잡았다. 내 앞자리에는 해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문제집과 독서대, 할리스 캔커피가 놓여있었다. 누굴까. 플라스틱 필통에 두서없이 꽂힌 연필들처럼 서로 잘 모르겠는 기분으로 궁금했다. 눈치 주는 사람은 아니었으면. 뭐하다 왔는지 내가 앉은지 한참 후에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꽃청년이었다. 
 
 남자는 슬리퍼를 신고, 츄리닝을 입고 어슬렁거리는 폼새가 영락없이 도서관 죽돌이였지만 잘생겼다. 게다가 그 모든 죽돌이용 아이템을 장착하고도 환하게 빛났다. 결국 옷과 액세서리는 누가 입고 어떤 순간에 보여주는지가 중요한 거였다. 늘씬한 체격에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얼굴. 자칫 맹숭한 인상을 지적이게 만드는 뿔테 안경. 날씬한 체격에 꾸민 듯 안 꾸민 듯(역시 이게 중요했다.) 걸쳐 입은 옷.

 이기호의 독고다이에 보면 도서관에는 부동산 중개법 문제집을 펴놓고 8대 일간지를 읽은 후, 나머지 시간에는 커피 자판기 앞에서 시국 토론을 벌이다 결국 몇 문제 못 풀고 퇴근을 하는 축들이 있다고 했다. 꽃청년도 문제집을 풀었다. 언제쯤 커피를 마시러가나 지켜보는데 이 청년은 문제집을 풀고, 또 풀고, 또 풀었다. 대단한 집념이었다. 그 사이 나는 신문을 읽고, 책들을 구경하고, 화집을 뒤적이고, 책을 읽고, 사설을 쓰고, (취미인!) 영어 공부를 했다. 그리고 그 많은 사이사이에서 들키지 않게 힐끔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누군가의 얼굴이 이다지도 많은 상념과 불안과 환희를 줄 수 있다니.

 꽃청년이 누군가와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웃는다. 잠시 동안 남자 주위가 반짝거렸다. 남자 머리 둘레에서 작은 불빛들이 점멸하고, 어디선가 은은한 향기가 나는 듯도 하였다. 김영하는 핸드폰이란 기계가 무표정한 사람들 얼굴에 생기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순간만큼 그의 말이 적절하게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다. 남자는 별다른 미동 없이 공부만 했다. 그의 옆모습과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가 안 풀리는 문제에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과 놀라고, 화를 내고, 억울한 표정을 짓고, 비웃고, 간청하는 표정을 보고 싶다. 헛기침이라고 해볼까, 아니면 아니면……. 그가 바로 코 앞에서 질펀해진 욕망으로 어쩔줄 몰라하는 '여자 사람'을 본다면 어떨까. 그럼 난 어떻게 하지? 이토록 잔인한 바람은 순식간에 생기고 말았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 나는 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누군가의 얼굴에 반한 적이 있었다. 남들은 대체 뼈만 앙상한 그 사람을 왜 좋아하냐고 했지만 난 그가 친구랑 잡담을 하면서 환하게 웃는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스탕달의 결정 작용은 순식간에 생겨났고, 난 의심 한 점 없이 그를 좋아했다. 쪽지를 써서 그에게 주고, 내가 그에게 홀딱 반했단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치기 어렸지만, 그땐 그런 것을 생각할 정도로 온전하지 못했다. 고백의 순간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그 날 술 먹은 나를 누군가 고이 집에 보내만 줬더라면 '우린 어쩌면 서로 맘이 있었을 거야'란 상상 정도로 맘을 접어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술은 달콤했고, 밤은 무척 따뜻했다. 고이 접혀져서 집에 들어가지 못한 나는 그 늦은 밤 술 냄새를 풍기며 도서관에 갔다. 그가 있었다. 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불러내 내가 오랫동안 당신을 좋아했노라고 말했다. 그는 예의 그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를 안 후 처음으로 그가 좀 바보 같단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쉽게 얻어지는 마음엔 어쩜 그리 잔인하던지. 그는 마치 내가 봉인을 풀어 자신을 도서관 밖으로 끌어주길 기다린 것처럼 너무 쉽게 달아올랐다. 서로의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건 원치 않았다. 무려 일주 일만에 우린 서로의 정체를 파악했고, 삼개월 동안 흐지부지한 상태를 지속하다 얼마 안 돼 헤어졌다.

 꽃청년을 본 다음날 나는 A를 데리고 다시 도서관에 갔다. 꽃 청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벌써 퇴근한 것 같다며 A를 달래고 나오려다 그가 문제집 옆에 두었던 책의 제목이 생각났다. 도서 검색대로 가서 책을 찾아보았다. 나는 책장에 기대어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실화 소설, '나는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는 나를 죽였다'였다. A가 나를 불렀고, 나는 책을 뒤집어 책꽂이에 꽂아 놓은 다음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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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0-03-11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패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건 아니지만 그런 장소의 꽃들은 그저 그 장소의 꽃으로 남겨두는게 좋은 거 같아요. 그래서 전 중도 대출 꽃돌이를 건드리지 않는 거에요.ㅋㅋㅋㅋ

Arch 2010-03-12 10:47   좋아요 0 | URL
꽃은 꺾는 법이 아니죠. 꽃돌이들은 도서관마다 한명씩 있나봐요^^

poptrash 2010-03-12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저도 오늘 도서관에 갔어요. 생전 처음 가보는 모 구립 도서관.
한적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왠걸, 무슨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깜짝 놀랐어요.
원랜 죽치고 앉아서 이것도 저것도 해야지 했는데 후다닥 책만 빌려서 나왔다는.. T.T

Arch 2010-03-12 10:48   좋아요 0 | URL
어제, 제랄님 서재에서 poptrash님의 서재를 가봤는데. 반갑습니다.
도서관 자리 경쟁이 치열해요. 다들 뭔가 굉장한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아요.

무스탕 2010-03-12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핀 꽃이라니 어딘지 멋있어 보이네요.
장미과 보다는 백합과가 어울릴듯 싶어요.
괜히 발 뻗으면서 툭 차보고 싶은 그런 맘이 드네요 ^^

Arch 2010-03-12 17:30   좋아요 0 | URL
꽃은 꽃이로되 향기가 없는 꽃이랄까. ^^
발 뻗다 툭 차면 거기서 이야기가 시작될까요? 히~

다락방 2010-03-1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poptrash님 글 참 잘쓰셔요. 리뷰에 반해버렸답니다.

어제 Arch님의 소식을 들었어요. '나를 찾는 여행'을 하고 계시다는 소식이었는데 말이죠, 저는 그걸 '나래이터모델'로 듣지 않았겠습니까? Arch가 나래이터 모델? 세상의 모든 직업을 다 해보려는걸까? 저는 다시 물었어요. "나래이터 모델을 한다구요, Arch가?" ㅎㅎ

저 책 검색하러 또 가야겠네요. 나는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는 나를 죽였다.

다락방 2010-03-12 11:42   좋아요 0 | URL
저 책 검색 안되는데요, Arch 님? 작가 이름은 뭐에요?


Arch 2010-03-12 17:33   좋아요 0 | URL
아, 어제 누굴 만났는지 짐작이 가는군요! 대단한 주당들 같으니.
저는 키가 미달이라 (얼굴은 되는데, 얼굴 큰거 빼곤 되는데 ㅋㅋ) 나레이터 모델은 못해요. 게다가 비염에 배까지 나왔으니.
그 여행 이름은 스스로 좀 민망하라고 지어봤어요.

원래 제목은 '내가 키운 남자, 내가 죽인 남자 (실화 소설)'예요. 물론 전 안 읽어봤구요. 검색은 되는데 별로 내키지 않아요.

비로그인 2010-03-13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캔커피와 도서관. 어떤 소설속 한 장면이 생각나네요 ^^ 그 장면은 아주 짧게 끝나지만, 그 잠깐 멈춤의 시간은 제 마음속에 오래 남더라고요.

Arch 2010-03-15 22:54   좋아요 0 | URL
왠지 한국 소설 같아요. 별거 아니지만 사서가 돌아다니면서 음료수는 도서관에 갖고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했어요. 꽃청년은 발그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