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나가시는 아빠 옷춤을 잡으며 어디 가시냐고 물었다. 아재랑 근방에 있는 장에 가신단다. 왜 나는 빼놓냐니까 너는 너무 많이 먹고, 굼뜨고, 잔소리가 심하단 소리는 쏙 빼고 안 갈줄 알고 말 안 하셨단다. 나도 갈테니 데려가달라고 했다. 환갑 지난 노인과 이제 막 나이 좀 먹었네 싶은 딸년이 집을 나섰다.

 차 타고 가는 길에 꾸벅꾸벅 졸았다. 눈을 뜨니 장터여서 좀 더 자겠다고 했더니 노인은 그럼 그냥 자라고 했다. 그냥 잘 수야 없지. 눈이 왔는데도 사람들이 많다. 집 근처 시장보다 규모도 적고 사람들도 별로 없었지만 장이라니까 뭔가 달라보였다. 모퉁이만 돌면 왠지 각설이 타령이라도 하는 사람이 나타나 흥을 돋굴것만 같았다. 그러고보니 장사하시는 분들의 낯도 시장에서 보던 분들과는 많이 다르다. 농사꾼, 어부, 영락없는 장사꾼의 얼굴. 얼굴 곳곳에 드러나는 주름,들. 그분들 얼굴을 바라보니 다시금 얼굴에 살아온 이력을 드리우고 살 자신이 있는지 내게 묻게 되었다. 그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재랑 아주머니랑 노인과 노인의 딸년은 휘적휘적 장터를 돌아다녔다. 읍내에 마실 나오신 분들이 왁자지껄 한담을 나누고 장사하시는 분들은 늦은 점심을 후다닥 해치우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나서 둘러봤더니 분식집! 검은콩 도너츠가 맛있겠다며 딸년은 노인에게 다가가 천원만 주라고 했다. 노인은 딸년이 용돈은 못줄망정 돈을 갈취한다는 소리를 입밖으로 내뱉으려고 했다. 아재가 둘이 뭐하나 어깨너머로 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노인은 호기롭게 천원짜리 두장에 동전 한푼을 줬다. 딸년은 헤죽하게 웃으며 잰걸음으로 분식집으로 뛰어갔다. (점점 풍류, 우리 가락 분위기가 되고 있다.) 딸년은 오뎅국을 먹다 일행이 멀어지는걸 보고 오뎅을 입 속에 우겨넣으며 뛰었고 그 바람에 며칠 동안 입안이 헐어 고생했다.

 매생이와 굴, 달래를 샀고, 패션 피플의 핫 아이템인 목도리, 헤어밴드, 모자를 겸용할 수 있는 놀라운 천 쪼가리 하나를 챙겼다. 딸년은 그래도 뭐가 모자랐는지 대구탕을 먹고 싶다는 둥, 장에 와서 왜 먹을걸 더 안 사냐는 둥 뻐대기 시작했지만 노인은 으례 그렇듯 가볍게 무시했다. 노인과 아재의 맘 속엔 오직 궁극의 막걸리집만이 머릿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으니 딸년의 말이 들어올리 없었을지도.

 다 부서지게 생긴 가게였다. 문을 열자 훈김을 얼굴에 끼얹듯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테이블은 꽉 차 있었고, 아저씨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아주 아주 큰 소리고 털어놓고 있었다. 자리가 없어 돌아서 나갈줄 알았는데 노인과 아재는 술잔 놓을 자리만 있으면 어디서라도 드실 기세였다. 셋은 주인의 양해를 받아 음식 준비하는 테이블에 찬과 술을 놓고 급하게 들이켰다. 근방에 있는 대학교에서 만든 막걸리다. 시금털털하고, 시원하다. 해파리 초무침은 산뜻했고, 우거지 선지국은 무척 맛있었다. 작은 동그라미가 여러개 박혀 있는 노랑 연두색 막걸리 잔과 공평하게 채워지는 막걸리. 막걸리 한병을 따르면 세잔을 마실 수 있다. 두분이선 두병, 세명이니까 세병. 똑 떨어지는 계산이다.
 
 노인과 아재는 아무리 집에서 막걸리 사다가 더 좋은 안주로 먹어도 이 맛이 안 난다는 얘기를 한다. 딸년은 불콰한 얼굴로 그 말이 정말 맞다며 고개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격하게 동의했다. 동네 모임이라도 하는지 한 다리 건너 서로를 아는 아저씨들 틈에서 맛있는 냄새를 맡은 딸년. 그녀는 냉큼 이거 혹시 오뎅 속에 김말이가 들어있는거냐고 물었다. 아저씨가 그렇다고 하자, 그녀는 다시 쪼르르 노인에게 다가가 천원만 달라고 했다. 노인은 딸년에게 전 재산이라며 천원을 건넨다. 천원만, 백원만, 졸라대며 그 돈 받아 홀랑 야무진 불량식품 사먹었던 어렸을 때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시금털털 막걸리 탓이다.

 나무 젓가락에 길다란 오뎅을 꽂아서 돌아와 다시 막걸리를 먹고, 옛날 막걸리 맛은 어땠는지, 여기 우거지국엔 뭘 넣어서 이렇게 기똥차게 맛있는지, 아니 아니, 이렇게 푸짐하고 맛나게 먹었는데 술가격은 왜 이렇게 싼지 등등에 대해 말했다. 노인이 갈길을 재촉했지만 딸년은 아직 사지 못한게 있다. 노인이 방심한 틈을 타서 딸년은 학원 간 조카들까지 들먹이며 옛날 과자의 맛과 푸짐함에 대해 떠들었고, 노인은 담배 살 돈까지 가져가냐며 타박하면서 딸년에게 다시 몇천원을 줬다.

 세상의 온갖 과자와 온갖 카피 과자가 판을 치는 옛날 과자집. 주인 아저씨는 딸년이 뭘 집을 때마다 맛을 안다는 둥, 제대로 본다는 둥 흰소리를 했지만 어떤게 더 맛있을지 점치느라 그녀는 그의 말의 반은 귓등으로 흘렸다. 과자점엔 바삭한 강정에 쵸코를 입힌 과자, 보들거리는 약과, 딱딱하지만 고소한 고구마 과자, 설탕 시럽을 입힌 식빵 과자, 쫀드기, 와플, 강정, 고추장 맛 과자, 라면 맛, 딱딱하고, 바삭하고 식감을 자극하는 맛들이 펼쳐져 있었다. 정신없이 고르다보니 킬로로 몇백원 하던게 3000원이 넘어섰다. 딸년은 과자를 가까스로 오천원에 맞추고, 아직 고르지 못한 과자와 맛보지 못한 과자를 애석하게 바라봤다. 아저씨는 흔쾌히 몇번이고 덤을 줬고, 딸년 입은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딸은 말했다.

 '아빠, 아저씨가 나 예쁘다고 자꾸 덤을 주잖아. 민망해서 혼났다니까.'
' 훔쳐온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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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1-08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내 생애 최고의 '아치 페이퍼'로 임명합니다.

Arch 2010-01-08 12:39   좋아요 0 | URL
상장 주는거야? 아, 오랫동안 만진 보람이 있군요! 뽀님 와락~

다락방 2010-01-08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이쁘기도 하지!!

활자유랑자 2010-01-08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최고세요

무스탕 2010-01-08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군요.

뷰리풀말미잘 2010-01-08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가 독하게 마음먹고 페이퍼를 쓰나봐요.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Arch 2010-01-08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다 뽀님 때문입니다. 추천도 댓글도 다 감사해요.

미잘만 하려고!

순오기 2010-01-10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다 큰 딸년이 천원만 천원만 하면서 담배 살 돈까지 앗아 갔으면 열배로 갚으면 되겠군요.
사랑스런 아치님, 어쩌면 아버지도 그런 딸년이 밉지 않아 담배값까지 털어 주셨겠죠.^^
아, 추억이 스멀거리지만 기꺼이 주머니 돈을 갈취당해 줄 아버지가 내게는 안 계신 걸... ㅠㅜ

Arch 2010-01-10 22:09   좋아요 0 | URL
열배, 까짓 문제없습니다. ^^
아빠랑은 다툴 때가 더 많아요. 가끔 둘 다 술이 취해야 서로에게 너그러워지죠.
어떨땐 같이 살아서 좋은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