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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김종배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요즘에 상식이 되어버린 얘기지만, 기사는 절대 공정하지 않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사를 쓰겠다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는 역사가의 입장과도 비슷하다. 역사가는 수많은 사료 가운데 선택을 하지 않으면 역사를 서술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사도 받아쓰기가 아닌 한, 기자와 언론사의 입장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전히 기사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언론사와 기자의 이름을 달고 있는 건, 마치 날것 그대로의 진실인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과거와 달리 인터넷이 발달하고 외신을 접하기 쉬워진 환경 덕에 막강한 힘을 가진 언론사를 견제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과다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분류하기에 어렵기에, 선별된 뉴스만을 보게 된다. 오늘날은 그런 역할을 포털이 대신하고 있다. 실상 나조차 신문사에 직접 들어가기보다, 포털의 뉴스들을 훑는다. 그 편이 내 시간을 절약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러 신문사의 뉴스를 섭렵할 만한 여유는 없다. 그러나 이제 하나의 매체만을 읽기에는, 정보를 바라보는 내 관점이 탐욕스러워졌다. 그렇기에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되어, 늘 기사에 목마르다.
오랫동안 미디어에 종사해온 저자는 기자들과 독자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그는 보수/진보라 분리되는 언론사를 막론하고, 잘못된 기사를 쓰는 관행을 비판한다. 또한 독자들 역시 합리적인 의심을 하여 기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우리나라가 문맹률은 최저 수준이지만, 고학력자들의 ‘문서 해독 능력’은 매우 낮았다고 한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거나 토론을 하는 습관을 어디에서나 배우지 못하는 환경이, 문서 해독 능력을 낮게 만들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언론에 보도된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 뉴스란 우리에게 사교적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주된 소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스의 내용 자체를 사실로 생각하고, 행간의 의미를 추론하는 일은 대개 생략된다. 특히 사생활에 대한 뉴스는 그런 식으로 확대재생산된다. 이미 뉴스가 퍼진 후에,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뉴스는 저자의 말대로, ‘잘못 먹으면 가시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생선’인 셈이다. 저자는 뉴스를 비판적으로 곱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뉴스가 정치적, 상업적으로 노골화되어가는 지금은 더욱 그런 시선이 필요하다. 부분적 진실과 거짓을 담은 뉴스가 온전한 진실로 호도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저자는 뉴스의 허점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입장의 허점’을 간파하는 능력이다. 즉 자기객관화 능력인 셈이다. 자신의 입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편협한 입장에서 뉴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이성적으로 곱씹고, 논리적으로 따지는 작업은 뉴스를 읽는 과정에서만 행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곧추세우는 과정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담금질을 거쳐야만 비로소 나의 신념이라는 게 정립된다.(15)
저자는 글을 매개로 자신이 세상사에 대해 그릇된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려고 조언한다. 자신이 쓰는 글뿐만 아니라 기사나 책을 읽는 것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능동적 읽기가 중요한 건, 고도의 사고과정이기 때문이 아닌가. ‘글은 자신의 오류를 들춰내는 거울이요, 자기 입장의 엄밀성을 재는 잣대다’(16)라는 문장도 마음에 와닿는다.
저자는 뉴스는 ‘취사선택된, 구성된, 해석된 현실세계’라 못박는다. 주관적 판단을 하는 것이 어떻게 언론이냐고 따질 필요는 없다. 감시와 비판을 하기 위해서라면, 관점을 통해 구체화된 문제의식을 갖춰야 한다. 관점이 없는, 혹은 관점이 편협한 언론이 문제인 것이다. 그 관점에 동의하느냐는 독자의 선택이지, 기사의 옳고 그름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밝혀야 할 것은, 부적절한 취사 선택과 해석이다. 2008년 4월 2일 중앙일보가 만우절에 내보낸 장난 기사를 그대로 싣는 해프닝을 보면 알 수 있다. 받아쓰기 기사의 예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언론은 수사기관이 아니므로 증거 제시에 한계가 있다. 그런데 합리적 의심을 과하게 했을 경우,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경향신문은 2009년 12월 14일에 효성 그룹이 무기명채권 100억을 조성했다고, ‘불법 비자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비자금은 대개 회사 자금을 빼돌리는 것인데, 비실명 채권이 회사 계좌에 입금된 정황을 과도하게 의심한 것이다. 경향신문은 이를 정정보도했다.
한겨레 신문도 학파라치에 대한 기사에서 오보를 냈다. 2010년 1월 25일 ‘학파라치 시행 뒤 개인과외 급증’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우선 학원 폐업 건수를 제시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학파라치가 개인과외라는 풍선효과를 야기했다고 볼 수 있는가? 더구나 학파라치 제도 자체가 학원과 개인 교습 모두를 포함하는 만큼, 이 기사의 신뢰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당자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기사도 있었다. 2008년 7월 28일 한국경제신문이 콜트악기라는 기타 제조업체의 억울한 사연을 전했다. 노조의 방해공작으로 회사가 문을 닫았으며, 지부를 옮긴다는 얘기였다. 법원에서 부당 해고를 인정해 전원 복직시키도록 명령했는데, 인과관계가 맞지 않은 얘기였다. 이는 노조의 입장만을 듣고 기사를 쓴 또다른 형태의 받아쓰기였다. 다른 요인들로 인해 회사를 해외로 옮기면서, 이미 직장을 잃은 해고자들에게 이기주의 집단이라는 오명까지 안겨준 셈이다.
조선일보는 화물연대파업 시위단이 휘둘렀던 죽봉에 날카로운 죽창이 3% 섞인 것을 ‘계획적인 시위’라고 매도했다. 경찰의 일방적 발표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기에 ‘받아쓰기’한 셈이다. 그러나 받아쓰기나 일반화는 보수 언론만의 관행이 아니다. 경향 신문은 학교운영위 중에 정치인이 1044명이나 되어 영향력을 미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실제 이 수치는 전체의 0.8%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경향 신문사는 자사의 오보를 스스로 잡아내는 옴부즈맨 칼럼을 운영하고 있다. 정정 기사조차 거의 내지 않는 언론사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생각하면, 훨씬 신뢰가 간다고 볼 수 있다.
언론사의 힘은 프레임을 만드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름’을 붙이는 것이 파급력을 갖는다. 혹은 이슈를 만들어 역학관계를 바꾸는 역할까지 할 수 있다. 2005년 831 부동산 대책을 언론사들이 ‘세금폭탄’이라는 표현으로 형상화했을 때, 대중의 시선은 따가워졌다. 중앙일보 역시 2011년 7월 12일에 영국이 체벌을 금지하는 ‘노 터치’ 정책을 폐기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영국에서 말하는 ‘적절한 수준의 물리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학생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물리력을 행사하는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마치 회초리 등의 체벌도 가능한 것처럼 호도한 것이다. ‘체벌 허용’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교묘한 기사를 통해 체벌 금지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조선일보가 이슈를 만들어내는 방식도 유사하다. 촛불집회 참석자들에 대한 재판에 개입한 신영철 대법원 사건은 법질서를 훼손하는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이를 보수와 진보(우리법위원회) 간의 대결으로 프레임을 짜자, 보수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보수 세력이 신영철 대법관에게 힙을 실어주자, 결국 대법원공직자윤리위원회가 주의를 내리고 대법원장이 유감을 표명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된 것이다. 사건의 역학구도를 바꿀 정도의 파급력을 언론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이슈가 형성되는 요인을 저자는 ‘사건의 성격, 당사자들의 역학 관계, 국민 여론’으로 보고 있다. 사건이 국민의 삶에 맞닿아 있고(유명환 장관 딸 특채 사건), 국민이 관심이 집중될 때(김종익 씨 민간인 사찰) 이슈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 삶과 동떨어진 뉴스일수록 화제가 되기 어렵다. 같은 비리 사건도 기업 간에 일어나는 일은 큰 화제가 되지 않으며,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현장에서 불법 사찰을 하던 기무사 요원에 대해서는 대중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기무사 요원이 사찰한 것이 정치인이었고, 파업 현장은 국민들과는 ‘먼’ 장소이기 때문이다.
책의 3장은 실질적인 실전 기사 쓰기에 관한 것이어서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좀 더 많은 신문 기사가 예로 나왔으면 훨씬 좋았으리란 아쉬움이 남는다. 기사를 무턱대고 믿는 습관은, 편한 관성 때문인지 모른다. 사람의 말을 일일이 의심하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가. 그러나 기사 역시 오류와 거짓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