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날씨가 어찌나 청명한지 탄복을 했는데, 바람은 비 올 바람이라 선선하기 이를데 없었다. 날씨가 아까워 마당에 의자를 내놓고 <한 여인의 초상> 서문과 작품해설을 읽고 점심은 어제 5일장에서 산 한치로 물회를 해먹었다. 초반엔 미숫가루 타먹고 거의 수도자 생활을 했는데 결심은 온데간데 없고 점점 잘먹고 잘살고 있다.

오늘 밤부터 비예보가 있어 미리 저녁산책길에 분리수거를 하고
도서관에 들렀다. 하루 더 갖고 있고 싶었던 <한 여인의 초상>을 반납하고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를 빌려왔다.

<한 여인의 초상> 뉴욕판 서문을 다 옮겨적고 싶었지만
너무 길어 맛보기로 조금만 옮겼다.

나카무라 요시후미는 <여름은 오래 그 곳에 남아>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다.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를 시작으로 그의 책을 다 읽어 볼 계획이다.

구름이 짙다. 당장이라도 비가 올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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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의 초상>은 <로더릭 허드슨>과 마찬가지로 피렌쩨에서 쓰기 시작했다. 내가 그곳에서 석달을 보낸 1879년 봄의 일이었다. <로더릭 허드슨>과 <미국인>이 그러했듯이 이 소설은 <애틀랜틱 먼슬리>에 게재될 예정이었고, 1880년부터 연재가 시작됐다. 그러나 <맥밀런 매거진>에도 매달 실렸다는 점에서 두 전작과 달랐다. 영국과 미국의 문학적 교류의 양상이 달라지는 가운데 그때까지 유지되던 영미문학지의 동시 '연재'는 나의 경우 이 작품이 거의 마지막 사례에 속한다. <한 여인의 초상>은 긴 소설이고, 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듬해 베네찌아에 머문 몇주 동안 다시 집필에 박차를 가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리바델리스끼아보니 가에 소재한 싼자까리아 선착장으로 이어지는 거리 근처의 집 꼭대기층을 세내어 지냈다. 창밖으로 강변의 삶과 경이로운 석호가 펼쳐졌고 베네찌아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글의 진도를 나가기 위해 쓸데없이 조바심을 치다가 저 푸른 해협에 배가 솟아오르듯 어떤 적절한 아이디어와 더 나은 표현이, 차후 드러날 내주제의 예기치 않은 전환이, 화폭에 정확하게 붓을 댈 다음 순간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 뻔질나게 창가로 달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창밖 풍광에 안절부절 영감을 호소할 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응답이 돌아왔음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딸리아라는 나라에 널려 있는 고풍스럽고 역사적인 유적들은 그 자체를 소재로 삼지 않는 한 창작에 집중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안된다는 준엄한 경고 말이다. 서투른 표현을 떠올리기 위한 방편쯤으로 삼기에 그런 곳들은 그 자체의 삶으로, 의미로 너무도 충만해서 예술가가 제기하는 작은 물음을 큰 물음으로 바꿔놓는다. 그래서 얼마 후 나는 글이 안 풀릴 때마다 창밖 풍광을 내다보는 게 역전의 정예부대에게 거스름돈을 속인 행상인을 붙잡아달라고 부탁하는 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여인의 초상>을 다시 읽는 중에, 이 책의 어떤 페이지에서는 드넓은 연안의 넘실대는 물결들, 발코니가 있는 집들에 칠해진 색색가지의 커다란 점들, 파동 치듯 겹겹이 이어지는 작은 곱사등의 다리들, 다리 위로 점점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오르락내리락하는 행인들이 파도와 함께 눈앞에 다시 펼쳐지는 듯했다. 베네찌아 사람들의 발소리와 고함 소리가 -그곳 사람들은 입을 열었다 하면 강을 가로질러 부르듯 큰 소리로 말했다- 다시 창밖에서 들려오는 듯하면서, 감각적 즐거움과 정신적 혼란, 좌절을 동시에 느끼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렇게 전반적으로 상상력을 일깨우는 곳들이 어째서 바로 그 순간 상상력이 원하는 구체적인 무엇을 주지 않는 것일까?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서 거듭 이런 놀라움에 빠져들던 기억이 난다. 진상은 이렇지 싶다. 즉, 상상력이 이런 호소를 하게 되는 곳들은 너무 많은 것을, 그 상황에서 당장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선사한다고. 그래서 주변 풍경에 관한 한, 이런 곳들이 우리의 상상력이 다소간 광채를 더해줄 수 있는 수수하고 밋밋한 곳들보다 작업하기 오히려 덜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베네찌아 같은 장소는 우리의 자선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하자. 베네찌아는 빌어 쓰지 않는다. 다만 모든 걸 당당하게 베풀뿐이다. 우리는 그 덕을 엄청나게 보지만 그렇게 덕을 보기 위해서는 일을 아예 접든지 아니면 오직 베네찌아를 위해 일해야만 한다. 이 책에 관한 회상에는 이런 회한이 서려 있다. 비록 전체적으로는 그 때 집필한 책과 '문필활동'이 그로 인해 더 나아졌음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주의를 기울였으나 허사로 돌아간 일이 종종 기이하게도 풍성한 결과를 낳는다. 주의를 어떤 식으로 빼앗겼고 낭비했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고자세로 무례하게 사리를 치기도 하고, 은밀하고 교활하게 속이기도 하낟. 그리고 아무리 용의주도한 예술가라 하더라도 이런 속임수에 어김없이 빠질 만큼의 어리석은 성심과 조바심치는 원망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이 지면을 통해 내 착상의 기원을 짚어내려고 애쓰다가, 그것이 결코 '플롯'-음험한 용어이다-의 기발한 착상, 섬광처럼 공상에 불을 붙이는 일련의 이야기, 혹은(이야기꾼의 관점에서 보면)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즉각적으로 기동하고 행진하고 돌진하고 잰걸음으로 달려가는 상황들에서 연원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착상의 기원은 전적으로 단 한명의 인물에 대한 느낌, 특별히 매력적인 한 젊은 여성의 성격과 면모였고, 배경을 포함해 '주제'에 보통 따라붙는 요소들을 이 인물에 덧붙일 필요가 있었다. 이 점은 여성이 가장 매력적인 상태에서 흥미롭듯이, 이 소설의 계기를 해명하는 과정이 내 상상력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 발전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는 일 또한 흥미롭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씨앗에 잠재한 성장의 힘, 싹트고 나와야 할 필연성, 마음에 품은 아이디어가 가능한 한 높이 자라 빛과 공기를 흠뻑 쐬면서 풍성하게 꽃피게 만드는 그런 탁월한 결정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노력이 결실을 맺고 난 후에 집필의 내밀한 과정, 그 과정의 단계를 차근차근 되짚어 재구성할 수 있는 멋진 미래의 가능성-이것이 이야기꾼의 기술이 갖는 매력이다. 나는 몇년 전 소설의 심상이 통상 무엇을 발단으로 하는지 이반 뚜르게네프 씨의 경험담을 들었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에게 소설의 발단은 거의 언제나 눈앞에 어른거리는 어떤 인물, 또는 상인데, 이들은 능동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그의 고나심을 요구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각자가 됨됨이에 따라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런 식으로 그들을 임의적인 인물로, 우연과 복잡다단한 삶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바라보면 그 모습이 선명해지고 나면 그들의 성격을 가장 잘 끌어낼 수 있는 적절한 인간관계를 찾아내야 한다. 등장인물들을 이해하는 데 가장 유용하고 알맞은 상황들을, 그들 자신이 야기하고 반응할 법한 복잡한 상황을 상상해 만들어내고 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가는 데 성공하면 내 '이야기'를 갖게 됩니다."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내가 이야기를 찾아내는 방식입니다. 그 결과 '스토리'가 별로 없다는 비난을 받곤 하지요. 나 자신은 내게 필요한 만큼,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를 보여줄 수 있을 만큼의 스토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내 유일한 기준이거든요. 인물들은 충분히 오래 지켜보고 있으면 그들이 모여서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이릉ㄹ 하고 이런저런 어려움에 처하는 걸 보게 됩니다. 내가 마련해놓은 배경에서 그들이 어떻게 보이고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는가가 내가 풀어내는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유감스럽게도 아마도 소설의 구성이 성글겠지요. 하지만 소설의 구성이 복잡해져서 내가 진실을 드러내는 데 방해받을 위험이 있다면 성긴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인들은 물론 내가 제시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구성을 좋아하는데, 그건 그 나라 사람들이 워낙 그 방면으로 재주를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노력해야지요. 선생께서 물었듯이, 바람에 날리는 씨앗들이 원래 어디서 오는지 누가 알겠어요? 그런 물음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멀리, 너무 멀리되돌아가야 하거든요. 하늘의 모든 방향에서 날아온다고, 길모퉁이를 도는 거의 매 순간마다 거기에 있다는 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요? 씨앗들은 쌓이고 우리는 언제나 그중에서 고르고 선택합니다. 씨앗들은 삶의 숨결이지요. 삶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씨앗들을 날려 보내준다는 의미에서 말이지요. 이미 규정되고 부가되는 방식으로 씨앗들은 삶의 흐름을 타고 우리 마음속으로 흘러들어노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젠체하는 비평가가 작품의 주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건 바보짓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그 소설의 주제가 다른 무엇이 됐어야 맞다고 지적해야지요. 비평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지적하는 일이니까요. 그렇게 하라면 어쩔 줄 몰라하겠지요. 아, 내가 작품으로 해낸 것과 해내지 못한 것을 비평가가 지적한다면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그가 잘하는 게 그거니까요. 난 '소설의 구성'은 비평가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고 다 넘겨주는 편입니다." 나의 고명한 친구가 말을 맺었다.

 

이렇게 이 멋진 천재가 말한바, 불쑥 찾아오는 형상, 매인 데 없는 인물, 가변적인 상에 내재한 암시의 강렬함에 관한 언급을 나는 훈훈한 감사의 마음으로 기억한다. 그의 진술은 내가 그때 실현하지 못한 상상력의 바로 그 축복받은 습관, 즉, 상상의 산물이든 실제로 만났든, 한쌍의, 또는 일군의 인물에게 기본적인 특성과 권위를 부여하는 기술에 더 큰 확신을 주었다. 나 자신은 작품의 배경보다 인물을 너무나 앞세워 우선적으로 의식하고 관심을 갖는 터라 대체로 대체로 말 앞에 마차를 놓는 경향이 있다. 이야기를 먼저 구상한 다음 그 속의 인물을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를 내가 부러워했을지는 모르지만 흉내 낼 능력은 없었다. 나로 말하자면, 이야기라는 특정한 입장에 처한 인물들의 성격과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상황에는 별 관심이 없다.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작가들 가운데는 이런 지지대 없이 사건을 전개하는 서술 방식을 구사한 사례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묘기를 무턱대고 부릴 필요는 없다고 귀띔해준 존경스런 그 러시아 작가의 증언이 그때 내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발언만큼 실제로 전방위적인 여운을 남기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그가 해준 다른 말들도, 고백컨대,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의 말을 듣고 난 다음, 객관적 가치라는 골치 아프고 왜곡되고 헛갈리는 문제, 심지어 비쳥적 평가와 소설의 '주제'라는 문제까지도 필요에 따라 명료하게 읽어낼 수 있게 됐다.  (뉴욕판 서문 서두 부분)

 

1장

일정한 조건만 충족된다면, 살면서 호후의 티타임으로 알려진 의식에 바치는 것보다 더 유쾌하게 시간을 보낼 때도 별로 없다. 차를 마시든 마시지 않든- 물론 차를 절대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티타임 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그런 상황이 있다. 이 소박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내 머리에 떠오른 상황은 이 무해한 소일거리의 멋진 배경이 됐다. 빛나는 여름 오후의 정점이라고 묘사해야 할 시점에 작은 성찬의 집기들이 영국의 전원 고택 잔디밭에 차려져 있었다. 오후가 이울어가도 아직 한 자락이 남아 있었고, 그렇게 남은 오후에는 정말 순수하고 희귀한 문가가 있었다. 어스름이 제대로 깔리려면 아직 몇시간 남았지만, 홍수 같은 여름 햇빛은 물러가기 시작했고, 공기는 부드러웠으며, 융단 같은 잔디밭에 그림자가 길게 깔렸다. 하지만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면서 풍경에 앞으로 올 여유로움이 나타났다. 그 순간 그 광경에서 즐거움을 맛본다면 아마도 이것 때문이리라. 5시에서 8시 사이가 어떨 땐 하나의 작은 영원을 이루는데, 이 경우 그 시간은 영원한 즐거움일 수밖에 없다. 티타임에 참석한 이들은 이런 즐거움을 조용하게 누렸다. 그들의 성별은 내가 언급한 의식의 신봉자들을 줄곧 배출해온 것으로 알려진 쪽이 아니었다. 완벽한 잔디밭에 직선과 각을 이룬 그림자가 드리웠다. 차를 차려놓은 낮은 다탁 옆 키버들 의자에 깊이 파묻혀 앉아 있는 노인과 그 앞에서 이따금 대화를 나누며 어슬렁거리는 두 젊은 남자의 그림자였다.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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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은 모옴의 걸작으로 평가받지는 않습니다. 통속소설로 분류되지만 그 기준을 상당히 높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물 중심으로 서술되고 키티와 남편 월터 및 키티와 정부 찰리와의 관계를 다룹니다. 이들이 놓인 시대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소설에 요구되는 당대 사회상의 총체적인 묘사 및 재현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않을 때 보통 통속적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제한성을 수용하면 그 범위 안에서 굉장히 단단하게 쓰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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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릭랜드는 현실적입니다. 마흔이 되었고 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삶과 예술을 둘 다 잡을 수 없다면 선택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니체의 개념에 따르면 노예의 삶이죠. 원하지 않지만 의무로 사는 겁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낙타의 삶입니다. 스트릭랜드가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하며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최소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는 의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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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크레마의 하이라이트(밑줄긋기)는 북플로 공유가 안된다
2.알라딘 ebook앱의 하이라이트는 북플공유가 되지만
400자이상은 안된다
3.원래의 한 페이지의 하이라이트를 변경하면
책한권 전체의 하이라이트가 취소된다.
4.한 페이퍼에 여러개의 밑줄긋기를 한 번에 올릴 수없다(또는 방법을 모른다)
5.체험판만 읽었는데 다 읽은 기분이 든다.
(실제 다 읽은건가? 체험판은 왜 체험판이지?
-찾아보니 30프로 정도의 분량을 체험할 수 있는 게 체험판이다)
6. ebook은 극도의 게으름을 조장한다.
(반듯이 누워 손가락만 까딱,하는 독서. 한 번 뒤척이지도 않는다)

-오늘 알게 된 것.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산계급에만 있다."라고 그가 전에 일기장에 썼던, 신비롭게 진실하면서 명백하게 부조리한 구절이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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