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
요시다 슈이치 지음, 오유리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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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워터. 파릇한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나가는 수영장, 어렸을 때 나도 수영선수를 해서일까. 그들만큼의 청춘이 시작될 나이보다 훨씬 어렸을 때여서 이토록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의 감정이 일지는 않지만 수영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앞서나가기 위해, 그리고 시리도록 차가운 물 속에 첨벙, 하고 들어갈 때의 환희가 더 와닿는다. 읽는 내내 청명함이 더욱 앞섰다. 

사실, 책의 두께를 보고는, 그저 가벼운 단편정도일꺼라 생각을 했다. 아니, 역자후기를 읽어보기 전에는 소설이 왜이렇게 짧나, 라는 생각을 하며 실망을 하고 읽기 시작했다는 게 더 맞을 듯 하다. 그치만 소설의 첫 장면부터 신선하게 만들어주는 느낌들, 간간히 독특한 색채로 그려져 있는 삽화들이 나를 뒤흔들었다. <워터보이즈>. 이 영화를 보고 싶어서 미루고 미뤘었는데, 이 책을 읽고나니 더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잠깐의 스틸에서 보았던 워터보이즈, 영화속의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지금 우리들은, 절경 속을 지나는 줄도 모르고 같이 걷는 동료들과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있는 여행자들로, 우리가 지금 얼마나 아름다운 경치 속에 둘러싸여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이란 건 그 목적지보다 함께 걷는 길동무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p.11

아련하게 드는 생각중에서, 길동무를 한 번 되돌아본다.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자는 누구이며 과거의 사람은 누굴까. 나에게도 목적지보다 더 중요한 길동무가 있는가, 있었던가. 라는 신선한 충격을 껴안으면서. 그들, 료운, 다쿠지, 게이치로, 다스케. 소설을 읽으면서도 주인공 이름은 눈여겨 보지 않는 나에게, 이들의 이름은 이토록 잘 기억이 난다. 그만큰, 책을 읽는 시간이 짧았음에도 강한 인상이 남아있다는 뜻이 아닐까.

배경은 수영장에서, 그리고 수영시합에서 더 좋은 성적을 내는, 우승을 하는 것에 두고 있지만 이건 성장소설이다. 비릿하게, 꺼림칙하게도 흘러갈 수 있지만, 되돌아 생각해보면 그만큼 소중한 것이 없었다는 걸 다시끔 느끼게 해주는. 반복해서 말해도 부담이 없는 청명함, 상쾌함이라는 느낌이 잔뜩 가미된 그러한 성장소설. 

운전석으로 되돌아온 아저씨가 시동을 걸면서, "이봐, 학생. 지금부터 10년 후에 자네가 돌아오고 싶어할 자리는 분명 이 버스 안일 거야. 잘 한번 둘러보고 외워두라고. 자넨 지금, 먼 훗날 자신이 돌아오고 싶어할 장소에 있는 거야."라고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p.88

뒤통수를 아주 세게 얻어 맞은 듯한 느낌은 이런 것일까. 나는 알 수 있었다.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곳이 바로 그 버스 안일거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내가 다시 되돌아가고 싶던 때는 내가 사는 바로 지금 이 곳, 그리고 지금 시간 10시 3분일것이다. 아이러니하고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이 말이 큰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본소설이나 영화를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간단한 문체, 소소한 장면 하나에서 오는 가슴의 뭉클거림이다. 그 느낌을 제대로 보여주는 소설, 워터. 긴 문장의 끝을 덮었을 때의 뿌듯함까지는 아니지만, 약간의 울렁거림을 동반한 설레임을 느끼게 해주는 요시다 슈이치의 문장들. 청명함의 끝에서 오는 그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한동안 이 느낌에 헤어나오지 못할 듯 하다. 가볍게 봤다가 제대로 당했다. 영화 <워터보이즈>를 보면 아무래도 그 아릿한 느낌이 더 지속될 듯 하다. 끊기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영화를 튼다. 조금 더, 조금 더 오래 이 느낌이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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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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黑笑(흑소). 영화에서는 많이 접해보았다.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를 꽤나 좋아하는 편이라서. 흑소소설, 제목부터 무언가 꺼림칙하게 만드는, 그리고 표지 등장인물의 입꼬리를 보고있노라면 나도 살짝 그 표정을 따라하게 되는 이 소설. 소설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흑소소설. 이야기의 내용을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이 글들이 소설이 아니라는 표현에서였을까. 약간은 비약적인 상상을 하면서 읽게 된 소설 아닌 소설, 흑소소설. 

어쩌면, 오쿠다 히데오의 <인더풀>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느낌상 <인더풀>은 희(喜)였다면, <흑소소설>은 노(怒)라고나 할까. 그러나 비슷하다고 말한 데에는 이 이유가 있겠다. 사회의 단면, 그리고 부조리를 꼬집어내는 이야기들. <인더풀>은 사회의 부조리를 웃음으로써 표현해내고, 이 소설은 그야말로 제대로 꼬집어낸다. 읽은 뒤 찝찝함을 그대로 안고가게끔. 그래서 블랙코미디라기보다는 씁쓸함이 더 잘 어울리겠다. 참 아이러니하다. 

첫 번째로 나온 "최종심사". 누구나 이런 생각들을 대부분 하고 있지 않을까. 최종심사장에서, 수상을 원하는 사무카와. 속으로는 자만심에 가득차, 내가 상을 받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만 겉으로는 쿨한척, 아니면 쑥스러운 척. 그리고 사무카와를 겉으로는 지지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이내 당연히 신인상을 못 받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편집장, 그리고 그 외 사람들. 내 멋대로 생각한 것을 그대로 입밖에 꺼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함께 사는 동물이 아니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가면을 쓴 채 살아간다. 굳이 그게 나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후회가 뒤따라오게 마련이니까. 첫 단편부터 제대로 씁쓸함을 보여준다. 단편이 끝날 때 즈음, 찝찝함에 몸서리처진다. 그리고 재빨리 다음 단편이 뒤따라온다, 좋지 않은 웃음이 가시기도 전에. 

단편들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스토커 입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나에게는 그렇다. 여자친구가 일방적으로 남자에게 통보를 한다. 헤어지자고. 그리고 남자는 생각한다. 왜 헤어지자고 했을까, 그리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 건 전화를 여자는 끊어버린다. 시간을 갖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남자는 일주일 동안 여자에게 전화도, 집에 찾아가지도 않는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난 뒤 여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사랑하는 거냐고 사랑하지 않는거냐고, 그리고 헤어지고 싶다는 거냐고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거냐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헤어지고 싶지 않은거라면, 스토킹을 하라고. 여기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사실, 그 전의 단편들은 그저 찝찝함을 안겨주는 데 반해서 이 단편에는 황당함이 묻어난다고 할까. 남자가 스토킹에 어설프자 여자는 남자에게 일일히 스토킹을 가르쳐주고 끝내는 쓰레기를 뒤지라고까지 한다. 그리고 쓰레기장에서 만나는 또 다른 스토커들. 생각만해도 아, 웃긴다. 

이 외에도 신데렐라, 웃지 않는 호텔 직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인상을 뽑기 위한 뒷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결같이 흑소를 날려주기에 적당하다. 지극히. 한번쯤 더 생각해봐야 할 사회의 이야기들을 이렇게 간단한 단편들로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이런 게 단편이 주는 매력이랄까. 장편의 구체적이고 세심한 이야기들을 단편적이고 간단한 메시지로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 꽤나 매력적인 글들임에 틀림이 없지만 유쾌하다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은 어중간함이 아쉽기도 하다. 당연히 웃을 수 없는 이야기뿐이지만 그 속에서 약간의 미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를 두어서였을까. 그렇게 생각해본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은 건, 그리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다. 내용에 기대기 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한다. 블랙 코미디, 라는 것은 그 뜻을 이해해야 훨씬 더 웃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이야기일 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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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들, 자살하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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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은 <처녀들의 자살소동>이라는 영화 때문에 알게 됐다. 꽤나 나의 스타일과 비슷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영화를 언제 보지 미루고 있던 차에 영화의 원작인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러나 어쩌면 이 책을 적어도 2년 전에만 읽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몰려오더라. 단지 그 때 읽었다면 고등학생 시절인 나와 그리고 내가 무한하게 가지고 있던 자아에 대한 성찰, 부모님과의 갈등 등에 더 현명하게 또는 오히려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의미에서이다. 

"슬픔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하지만 슬픔을 극복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지요." (p.123)

10대들이, 물론 나이가 더 들어서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감정. 슬픔. 그 슬펐던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던 감정은 어느새 메말라버렸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정도는. 왜 그 때는 이 땅 위에는 나 혼자인 것 같고, 그리고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닥치는 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되뇌이고 절망하고 또 절망했었다. 이 소설속의 딸들, 리즈번가의 다섯 딸들 또한 그랬을까. 꼭, 나와 같았을까. 지붕 위로 올라가 비행을 하듯 떨어져 쇠창살에 꽂혀버린 서실리아. 그리고 남겨진 네 딸들의 이야기. 그치만 '자살'이라는 어쩌면 끔찍하고 안타깝기 이를 데 없는 이 단어를 작가는 물 흐르듯이 부드럽고 유연하게 써내려갔다. 그저 이 책의 소재를 잊고 있는 것처럼. 아니 그저 평범한 십대들의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쓰듯이. 그래서일까. 소재는 한없이 무거운데 문장은 그저 흐르듯 읽혔다. 그래서 이 아이들의 슬픔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서실리아의 죽음 뒤에 일어날 일들이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전까지는. 

한 아이가 죽고, 그리고 남겨진 아이들. 슬픔을 극복하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었을까. 아니면 부모님과의 이해차이와 자신들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사회와 학교에 대한 불만이었을까. 아직 부모의 입장이 되보지 않은 나로서는 딸들에게 손을 드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부모들은 너무나도 유난스러웠다. 어쩌면 그 나이 때의 이러한 부모를 두었다면 극단적인 자살말고는 할 게 없었다는 트립의 말이 제대로 이해가는 부분이었다. 럭스의 초대(?)를 받아 학교에서 제일 인기가 많다는 트립은 리즈번가의 집에 가게 된다. 숨막힐듯한 분위기. 그리고 TV에서 나오는 내용에 대한 알람같이 타이밍이 딱딱 맞는 웃음 소리.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느낌까지 숨이 턱 막히는 듯 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단지 '자살'이라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지, 극적인 부분으로 나도 함께 달려가는 듯 한 리즈번가. 

그러나 지나고보면 그 때의 일은 그저 흘러가기 딱 좋은 유치한 스토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아무도 모른다. 지나가면 그 일들이 모두 종이의 재처럼 새카맣게 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야, 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그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아이러니. 그 누구도 이러한 시간들을 겪지 않은 이는 없으리라. 책을 덮은 후의 기분은 말 그대로 '먹먹함'이었다. 단지 침울하게, 무겁게만 쓰지 않은 작가의 문장력에 한없이 감사하면서. 문장마저 숨 막히게 써내려 갔다면 나도 그대로 책을 덮자마자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짚어 썼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계속해서 잠만 자기를 원했을지도. 단지, 이러한 감정을 잊을 때까지만 자고 다시 "일어나겠"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살아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주위에서 도와주는 애정어린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인생의 '벗'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나의 슬픔을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생각할 때, 나의 손을 이끌어줄 그 누군가가 필요할 때. 그 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고민이 너무 많은 소년 소녀들, 아니면 그런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부모님들이 읽어보면 좋지 않니한가. 하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속에서만이 아니라 겉으로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해도 속으로는 자신의 딸들의 죽음에 대해 무관심한 아버지는 없을 것이다. 그 안타까움의 위로 등이 필요하다. 아무리 살아있어도 정신적으로 딸들은 이미 죽었다. 아, 사랑은, 그리고 관심은 말로써 표현해도 전해지기 어려운데 그것을 마음속으로만 꽁꽁 싸매고 있는 것이 제일 안타까웠던 부분이 아닐까. 새삼 나의, 내 일에 눈을 돌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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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지앵 - 한 디자이너가 그린 파리지앵의 일상과 속살
이화열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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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 <비포 선 셋>에 나왔던 생미셸의 '셰익스피어 컴퍼니' 이곳은 헤밍웨이가 자주 이용했던 대여 책방이다.-

프랑스에서 유학중인 친구가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 1월에 돌아가겠다고 한다. 덜컥 나도 그 비행기에 몸을 던지겠다고 했다. 그렇게 1월 프랑스, 더불어 내가 가장 사랑해 마지 않는 영국 여행이 결정됐다. 약 2주간의 여행, 그 여행에 들떠있는 즈음 이 책이 나에게로 왔다. 책을 읽는 동안 여행에 대한 기대가 오버랩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즈음의 이 사진을 보는 순간, 그래, 내가 곧 갈 수 있겠구나, 기다려지는 여행이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다. 너무나도 와닿게 본 영화 <비포 선 라이즈>, 그리고 세느강이 배경이 된 <비포 선 셋>. 그리고 <비포 선 셋>의 첫 장면의 장소인 이 책방을 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축복이라 생각이 된다. 그런 감성에 젖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찬 기운이 팔에 어스르는 이 새벽, 책읽기를 끝마치기엔 가장 적당한 시간이 아닐까. 지나치게 분위기에 젖어 있는, 어쩌면 간절히 파리지앵(Parisiens)이 되고 싶은 내가 말하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파리지앵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치만 책을 펴기 전까지 나는 어떤 내용과 사진들을 기대했던 것일까. 당연히 프랑스 여행이라는 목적에 적합한 그러한 류의 정보들이 쏟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지만 당연히 그런 내용의 책이 아니다. 아니다, 라는 것이 다행이라는 대목이다. 언제나 꿈꾸어 온 나의 여행관이 있다. 멀리,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의 여행 중에서 내가 얻고 싶은 것, 보고 듣고 싶은 것은 유명한 관광지나 듬성듬성의 큰 그림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고. 나는 그저 그 낯선 곳에 자그마한 집을 하나 얻어서 그 사람들을, 그 나라를, 심지어는 그 집의 화분 하나의 이름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정말 느끼고 싶을 뿐이다. 아직 꿈꾸어 온 것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나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내용이라고 말하고 싶다. 29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내가 도달하려면 아직 7년의 시간이 남았지만), 그 때에 선택한 프랑스로의 행방. 그 속에서 얻은 파리지앵의 삶에 대한 관찰. 그 오랜동안 옆에서 지켜보며 느끼고 익숙한 것이라 느껴질 즈음의 작가의 일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파리지앵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지인들에 대한 찬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으로는, 왜 프랑스의 유명 관광지에 대해서, 음식의 정보라든지 그 유명한 와인에 대한 왜 그 자세한 정보따위를 실어놓지를 않은거야! 라고 따질 수도 있겠다. 책의 모든 페이지를 뒤져봐도 자세한 류의 정보 따위는 찾기가 쉽지 않다. 그치만 진작에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아서 일까. 배제하고 그것만을 본다면 100% 흡수되는 게 사람의 감성이다. 그 모든 자세한 것들을 제치고. 파리지앵의 삶만을 원했던 독자의 눈에는 그것들이 다 밉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파리지앵 중,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지독한 관찰의 결과를 그대로 써내려간 듯한 작가의 글 속에는 겉으로는 쉽게 보이지는 않지만, 속으로 음미하다보면 그 파리지앵의 일상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그대로가, 그 자체가 내가 원하는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속에서 이 책의 매력이 퍼지게 된다.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읽다보면 파리지앵의 삶 안에 내가 들어가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 

한 사람마다의 테마를 가지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펼치고, 간간히 나오는 파리의 사진들은 내가 꿈꿔가는 그 도시, 골목 그대로의 모습이다. 같은 대상을 보아도 사진의 프레임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게 된다. 파리를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그녀의 마음이 이 사진에서까지 보이는 것인가. 그렇게 감정이 사진을 통해서 전달된다. 보헤미안 느낌이 물씬 풍기는 파리지앵들의 삶. 그저 맹목적으로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 삶의 자체가 되고 싶다. 그러나 되고 싶다는 것만으로 그 모든 게 익숙해지리라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매너있는 행동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 사람과 매너 그 자체가 베어있는 사람은 다르다. 서서히 나의 몸 속에, 정신 속에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여유로운 그 생각들이 베어들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까, 라는 고민을 시작하려 하지만 이내 그만둔다. 아까도 말했듯이 되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조금 더 여유롭게 기다려보자, 마음을 다잡아 본다. 

이 책의 부제를 감히 달아본다면 '소소한 파리지앵 일상으로의 초대' 정도가 되겠다. 그만큼 소소하고 감성적이다. 어두움이 내려앉고 찬기운이 스산하게 부는 새벽, 스탠드의 어두운 노란색 조명을 받으며 푹신한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워 이 책을 보자. 그게 내가 권하는 <파리지앵>을 읽고 느낄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아, 파리지앵. 감성에 충만한 이 글이 나의 느낌을 대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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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성당 1
일데폰소 팔꼬네스 지음, 정창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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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르나우의 복수는 끝난 것일까. 더는 남아있지 않을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바다의 성당, 1권을 읽고는 마저 2권을 읽겠다고 다짐한 것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서였고, 새벽부터 읽기를 시작한 2권은 새벽 5시가 되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졸음조차 오지 않았다. 왜, 아르나우의 인생이 너무나도 고달프지만 그 고통의 언저리에 도달하고 있는 승리를, 희망을 새벽과 함께 맛보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이 책에 빠져들었던 이유를. 고통과 인내, 그리고 꼭대기에서 맛보는 약간은 씁쓸한 희망을, 승리를 보기 위해서였다고.
 
처음부터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 사실 지금까지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에게 너무나도 재밌다, 는 이야기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어려운 책은 나름대로의 읽었다는 자부심으로 끝까지 고집스럽게 읽었고, 어쩌면 소박한 일본소설류의 책들은 그저 지나친 감성에 기대어 읽기 마련이어서 읽은 후에 괜찮다는 느낌은 당연히 뒤따라 오는 것이었다. 그치만 이 책. 처음의 선입견, 두껍다, 아, 어렵겠다. 이러한 생각이 매몰아칠 때 책을 폈다. 내 예상을 단번에 뒤엎는 대목이었다.
 
"에스따뇰, 난 영주로서, 영주의 권리로 네놈의 아내와 초야를 치르기로 결정했느니라."
 
아, 1300년대의 스페인의 역사적인 이야기를 가미한 것이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귀족이라는 신분의 영주가 소작농의 결혼식날에 찾아와서는 느닷없이 신부와 초야를 치르겠다니.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어찌보면 그 시대에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에스따뇰의 부인은 그 일로 하여금 베르나뜨(에스따뇰)와의 결혼생활을 충격의 후유증으로 일관하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르나우. 그러나 아이를 낳자마자 영주의 유모로서 성에 들어가게 된다. 아이도 함께. 베르나뜨는 졸지에 아내와 아이를 잃었으며 망연자실한 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 듣게 된 자신의 아이, 아르나우. 아르나우가 창고에 내버려진 채, 엄마인 프란세스까는 한동안 젖을 먹이러 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병사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아내 프란세스까. 그래서 베르나뜨는 결심한다. 바르셀로나로 떠나기로. 자기와 함께한 프란세스까를 증오하면서,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아르나우를 품에 안고.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베르나뜨, 아르나우를 자유인으로 만들겠다는 의지, 그 노력. 절망의 순간들.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누이의 집을 찾은 베르나뜨는 그 집에서 일하게 되고, 신임을 얻은 아르나우는 그 집의 자식들과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베르나뜨의 누이가 죽게 되고 그의 남편 그라우 뿌익이 남작과 결혼하게 되자 베르나뜨와 아르나우도 동행한다.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다. 도망친 자를 경멸하는 남작 부인, 그리고 가난함에 굶주리는 베르나뜨와 아르나우.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베르나뜨의 선동으로 시민 전체가 들썩이고 그리고 그 벌로 처형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난 조안이라는 아이. 아르나우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생각이 깊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기 시작한다. 조안은 사제가 되고 아르나우는 자신의 어머니로 여기는 산따 마리아 성당의 짐꾼이 되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성실한 청년으로 살아가게 되는 이들의 성장 이야기.
 
아르나우는 어느새 마리아, 라는 아내를 얻게 되지만 어렸을 때 같이 살던 알레디스, 라는 추억의 여자와 다시 만나게 되면서 불륜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도시 전체의 시민군을 얻는 "비아 포라"라는 외침을 듣게 되자 전쟁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마리아의 순종적인 태도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아르나우는 전쟁 후에 돌아와서는 자신의 사랑임을 느끼게 되지만 도시 전체에 퍼진 콜레라는 그의 마리아를 저 세상으로 데려가게 된다. 그치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유태인에 대한 증오로 가득찬 사람들을 배척하며, 라켈과 주세프, 그리고 그들의 이웃인 유태인 아이들을 도와준 대가로 엄청난 귀인, 하스다이라는 유태인 사업가를 알게 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사핫, 개종한 이름으로는 기옘이라는 노예와 같은 자유인을 얻게 된다. 그리고 복수는 시작된다.
 
순탄치 않았던 성장과정, 그러나 그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아르나우의 섬세하고 총명한 성실함이 그를 행운으로 가져다 준걸까. 아니면 성모 마리아가 그를 빛으로 이끌었을까. 한시도 눈을 떼게 할 수 없는 이야기의 흐름상 다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마리아가 죽을 때면 나도 함께 눈물을 흘렸고, 아르나우가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 내가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책을 읽으며 감동을 받는다는 느낌이 이런거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해 준 바다의 성당.
 
다만 못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르나우의 죄로 인해서 감옥에 갇혔을 때, 어머니인 프란세스까와의 만남을 이루지 못한 것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물론, 어머니로서 자식을 만날 자격이 없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이다. 어쩌면 어머니인 프란세스까로 인해, 아니 비약하자면 그 시대의 상황으로 인해 일이 불행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지만, 어머니라는 존재를 만나지 못하고 느낌만으로 소통했던 그 장면이 끝내 아쉽고 절절했다. 프란세스까와 아르나우. 어머니인 것을 모르며 만났던 그 장면은 아르나우에게는 지나간, 아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뿌린만큼 거둔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듯한, 불행은 또다른 불행을 낳지 않는다, 적어도 아르나우에게는. 그는 누가 보아도 성실한 사람이었고, 총애를 얻지만 불행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불행마저도 희망으로 바꿀 줄 아는 그의 심성이 나를 울린다. 그리고 길게만 이어질 것 같던 이야기도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가는 도중,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면서도 무언가 아르나우에게는 특별한 이야기가 더 생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 아르나우의 나이는 예순세살. 그 나이를 곱씹으면서, 나는 아르나우가 태어나서부터 예순세살이 될 때까지를 같이 호흡했구나, 라는 느낌에 감정이 벅찼고, 책을 덮었다. 복수를 하는 통쾌한 과정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아르나우라는 사람과 한 시대를 같이 여행하는 느낌이 들게 하는 이 책, 많은 것을 얻고 느끼는 바이다.
 
 
p.292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성당이 유일하다는 거야. 유일하다는 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단순히 하나뿐이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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