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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성당 1
일데폰소 팔꼬네스 지음, 정창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아르나우의 복수는 끝난 것일까. 더는 남아있지 않을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바다의 성당, 1권을 읽고는 마저 2권을 읽겠다고 다짐한 것은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서였고, 새벽부터 읽기를 시작한 2권은 새벽 5시가 되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졸음조차 오지 않았다. 왜, 아르나우의 인생이 너무나도 고달프지만 그 고통의 언저리에 도달하고 있는 승리를, 희망을 새벽과 함께 맛보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이 책에 빠져들었던 이유를. 고통과 인내, 그리고 꼭대기에서 맛보는 약간은 씁쓸한 희망을, 승리를 보기 위해서였다고.
처음부터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 사실 지금까지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에게 너무나도 재밌다, 는 이야기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어려운 책은 나름대로의 읽었다는 자부심으로 끝까지 고집스럽게 읽었고, 어쩌면 소박한 일본소설류의 책들은 그저 지나친 감성에 기대어 읽기 마련이어서 읽은 후에 괜찮다는 느낌은 당연히 뒤따라 오는 것이었다. 그치만 이 책. 처음의 선입견, 두껍다, 아, 어렵겠다. 이러한 생각이 매몰아칠 때 책을 폈다. 내 예상을 단번에 뒤엎는 대목이었다.
"에스따뇰, 난 영주로서, 영주의 권리로 네놈의 아내와 초야를 치르기로 결정했느니라."
아, 1300년대의 스페인의 역사적인 이야기를 가미한 것이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귀족이라는 신분의 영주가 소작농의 결혼식날에 찾아와서는 느닷없이 신부와 초야를 치르겠다니.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어찌보면 그 시대에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에스따뇰의 부인은 그 일로 하여금 베르나뜨(에스따뇰)와의 결혼생활을 충격의 후유증으로 일관하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르나우. 그러나 아이를 낳자마자 영주의 유모로서 성에 들어가게 된다. 아이도 함께. 베르나뜨는 졸지에 아내와 아이를 잃었으며 망연자실한 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 듣게 된 자신의 아이, 아르나우. 아르나우가 창고에 내버려진 채, 엄마인 프란세스까는 한동안 젖을 먹이러 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병사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아내 프란세스까. 그래서 베르나뜨는 결심한다. 바르셀로나로 떠나기로. 자기와 함께한 프란세스까를 증오하면서,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아르나우를 품에 안고.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베르나뜨, 아르나우를 자유인으로 만들겠다는 의지, 그 노력. 절망의 순간들.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누이의 집을 찾은 베르나뜨는 그 집에서 일하게 되고, 신임을 얻은 아르나우는 그 집의 자식들과 함께 살게 된다. 그러나 베르나뜨의 누이가 죽게 되고 그의 남편 그라우 뿌익이 남작과 결혼하게 되자 베르나뜨와 아르나우도 동행한다. 불행은 거기서 시작된다. 도망친 자를 경멸하는 남작 부인, 그리고 가난함에 굶주리는 베르나뜨와 아르나우.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베르나뜨의 선동으로 시민 전체가 들썩이고 그리고 그 벌로 처형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난 조안이라는 아이. 아르나우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생각이 깊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기 시작한다. 조안은 사제가 되고 아르나우는 자신의 어머니로 여기는 산따 마리아 성당의 짐꾼이 되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성실한 청년으로 살아가게 되는 이들의 성장 이야기.
아르나우는 어느새 마리아, 라는 아내를 얻게 되지만 어렸을 때 같이 살던 알레디스, 라는 추억의 여자와 다시 만나게 되면서 불륜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도시 전체의 시민군을 얻는 "비아 포라"라는 외침을 듣게 되자 전쟁에 나가기로 결심한다. 마리아의 순종적인 태도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아르나우는 전쟁 후에 돌아와서는 자신의 사랑임을 느끼게 되지만 도시 전체에 퍼진 콜레라는 그의 마리아를 저 세상으로 데려가게 된다. 그치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유태인에 대한 증오로 가득찬 사람들을 배척하며, 라켈과 주세프, 그리고 그들의 이웃인 유태인 아이들을 도와준 대가로 엄청난 귀인, 하스다이라는 유태인 사업가를 알게 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사핫, 개종한 이름으로는 기옘이라는 노예와 같은 자유인을 얻게 된다. 그리고 복수는 시작된다.
순탄치 않았던 성장과정, 그러나 그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아르나우의 섬세하고 총명한 성실함이 그를 행운으로 가져다 준걸까. 아니면 성모 마리아가 그를 빛으로 이끌었을까. 한시도 눈을 떼게 할 수 없는 이야기의 흐름상 다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마리아가 죽을 때면 나도 함께 눈물을 흘렸고, 아르나우가 총애를 받기 시작하면 내가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책을 읽으며 감동을 받는다는 느낌이 이런거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해 준 바다의 성당.
다만 못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르나우의 죄로 인해서 감옥에 갇혔을 때, 어머니인 프란세스까와의 만남을 이루지 못한 것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물론, 어머니로서 자식을 만날 자격이 없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어머니이다. 어쩌면 어머니인 프란세스까로 인해, 아니 비약하자면 그 시대의 상황으로 인해 일이 불행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지만, 어머니라는 존재를 만나지 못하고 느낌만으로 소통했던 그 장면이 끝내 아쉽고 절절했다. 프란세스까와 아르나우. 어머니인 것을 모르며 만났던 그 장면은 아르나우에게는 지나간, 아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뿌린만큼 거둔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듯한, 불행은 또다른 불행을 낳지 않는다, 적어도 아르나우에게는. 그는 누가 보아도 성실한 사람이었고, 총애를 얻지만 불행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불행마저도 희망으로 바꿀 줄 아는 그의 심성이 나를 울린다. 그리고 길게만 이어질 것 같던 이야기도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가는 도중,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면서도 무언가 아르나우에게는 특별한 이야기가 더 생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 아르나우의 나이는 예순세살. 그 나이를 곱씹으면서, 나는 아르나우가 태어나서부터 예순세살이 될 때까지를 같이 호흡했구나, 라는 느낌에 감정이 벅찼고, 책을 덮었다. 복수를 하는 통쾌한 과정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아르나우라는 사람과 한 시대를 같이 여행하는 느낌이 들게 하는 이 책, 많은 것을 얻고 느끼는 바이다.
p.292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성당이 유일하다는 거야. 유일하다는 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단순히 하나뿐이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