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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때, 아니 한동안 외국문학에 빠져 있었다. 우리 나라 말로 쓰여진, 번역되지 않은 우리나라 말로 쓰여진 글들이 왠지 읽기가 꺼려지고, 외국문학만이 대단한 것이라고 느끼고 있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던 때였다. 솔직히 말해보자면 어렸을 때 읽었던 김진명 작가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유명하거나 잘 쓰여진 우리나라 소설은 접해본 적이 드물다. 그래서일까, <바람의 화원>.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터닝 포인트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전에 우리나라 문학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들은 기억이 난다. '노랑'이라는 단어에도 누르스름하다, 노랗다, 노르스름하다, 누렇다,, 등등의 여러 단어를 영어로, 그리고 외국의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없음이라는 그 이유. 화려하고 깊은 그 단어와 문장의 느낌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그 이유를 절감한다. 단어와 문장으로 이끌어지는 이정명의 문장들을 읽으며 탄식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음을. 감탄해 마지 않았음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야 할까. 그저 허구로 지어낸 인물이 아님에 그 실제에 대한 이야기와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여하튼 실재에 있어서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므로, 실재에 대한 것이 더 먼저여야 하겠다. 신윤복과 김홍도. 김홍도와 신윤복. 그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나의 뇌리에 떡 하니 박혀있는 화원. 책을 읽은 뒤로는 화가, 미술가 등의 단어보다는 화원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잘 어울릴 수 없다. 여하튼 책의 첫 장을 펼치기 전까지는 당연히 신윤복은 여자인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남자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당연히 여자로 생각하고 김홍도와의 관계에 대한 상상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남자라니. 이제껏 생각해왔던 나의 선입견을 제대로 뒤엎는 대목이다. 그 섬세한 필치와 화려한 색감들은 당연히 여자의 손으로 나오는 것이려니, 했다. 그렇게 배경에 대한 정리로 읽기 시작한 책의 내용은 신윤복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뒤엎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얼굴 그림이 되고, 그리운 산이 있으면 산 그림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문득 얼굴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그립고, 산 그림을 보면 그 산이 그리운 까닭입니다."
한문장, 한문장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김홍도가 신윤복에게 묻는다.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그 물음에 위와 같이 대답한 신윤복. 김홍도는 자신의 제자이기 이전에 그를 화원 대 화원으로서의 경쟁자로 여기게 된다. 슬하에 두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내치게 된 신윤복과의 이어지는 관계들. 후에 김홍도는 말하게 된다. 신윤복이 사실은 여자임을 알게 된 그 때. 신윤복이 언제 자신이 여자임을 알았냐고 묻는 대답에, 너를 본 처음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라고. 애절하고 애틋한 느낌의 둘 사이의 밀고 당김은 읽는 내내 아릿하기만 하였다.
3대째 화원 집안인 신한평의 아들로서 천재가 될 야심을 가지고 있는 신윤복. 사실은 그 이름, 신윤복일 수 없었지만. 그리고 그의 스승 김홍도. 일찍이 그 유별난,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아 신윤복을 감싸고 돌았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그 시대와는 맞지 않는 화풍을 그 누구도 알아주려 하지 않았다. 천하디 천한 춘화라고 비꼬는 양반들이 그득한 도화원에서 신윤복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천재는 천재를 알아 본다 하였을까. 바로 임금은 또 다른 천재였다. 임금의 어진을 그리게 되는 어진화사를 뽑는 자리에 나란히 김홍도와 신윤복이 선택되고 둘의 뛰어난 재능으로 어진을 완성하게 되지만 결과는 불보듯 뻔한 게 되어버렸다. 어진을 그리는 자리에서 임금은 부러 웃었으나 웃는 모습의 어진은 여태까지 있은 적이 없었고, 자세를 비스듬하게 한 것 등 어진을 깎아내리며 그 그림을 그린 자에게까지 그 비난이 쏟아지는 터에 신윤복은 도화서에서 내쳐지게 된다. 그러나, 주상의 아버지, 장헌세자. 어린 시절 뒤주속에 갇혀 죽어가던 그 장헌세자의 얼굴을 다시 그려달라는 주상의 은밀한 부탁. 임금이기는 하나 화원 하나 감싸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을 한탄하면서 신윤복에 대한 애정의 끈은 놓질 않는다. 이 때부터 이야기는 긴장감 있게 시작된다. 또, 치밀하게. 장헌세자의 얼굴은 그렸던 대화원인 강수항의 죽음, 그 죽음을 목격한 자들로부터 범인의 초상화를 그린 신윤복의 친아버지, 서징의 죽음. 주상이 명했다. 장헌세자의 어진을 다시 그려달라고, 아니, 다시 찾아달라고. 분명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이 책은 단지 어떤 사건의 추리, 그 속에서만의 재미가 있지 않다. 두 화원의 본질과 대화의 내용과 서로의 정에 있다. 그리고 그 둘이 실재했으며, 그리고 두 화원의 실재 그림을 소설 속에 녹여 낸 대단함에 있다. 아, 사건의 내용의 기막힘과 그 속에 따라 흐르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들. 그 위대했던 두 화원의 그림을 다시 되짚어보며, 다시 소설 속의 허구로 돌아간 그들의 이야기, 이야기 속의 묘한 분위기, 그리고 사건. 그 모든 것들을 한 데 모아진 이 책을 읽으며 상당히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왔다. 현실과 소설의 모호함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은 듯 했다. 그저, 어렴풋한 실재의 인물을 두고 쓴 내용이었다 해도 상당히 많은 것을 써내려가고 있을 텐데, 거기다가 두 인물이 화원이라니, 그들의 실재 그림이 허구 속에 들어가다니.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 감탄이라는 감정이 꽤 오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 침이다. 무언가 한가지 아쉬운 점이란 게 있을 법도 한데, 혹여 있었다 해도 그것들은 모두 다른 대단함에 의해서 꼬리를 감춘 듯 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화원에 대한 이야기, 그 속에서 피어난 이 모든 내용들을 다 허구라고 할 수는 없다. 종전에 읽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처럼. 모두다 허구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진실이 숨어있을 듯한 예감이랄까. 어느정도의 밑바탕을 가지고 읽어내려간 이 소설의 매력, 한 가지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서 더욱더 잔잔하게 휘몰아친다. 그리고 장헌세자의 어진을 둘러싼 범인을 찾아내는 이야기을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을 바탕으로, 그 둘의 뛰어난 그림실력을 바탕으로 전개해 나간 것도 대단하다. 입술이 침이 마르지 않도록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정도의 대단함은 괜히 과장된 것이 아니다. 글로써 표현하는 것을 안타깝게도 생각하는 바이다. 한동안 후유증이 몸서리 칠 것이 두렵기도 하나, 위대한 두 화원을 소설속에서 숨소리가 들릴만큼 가깝게 만났던 그 시간들을 참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책의 이야기 중 신윤복의 대사처럼, "존재하는 대상은 실상이지만, 우리가 눈으로 인식하는 대상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빛을 받은 물체가 종이 위에 그림자로 비치듯, 실체가 우리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투사되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들은 내가 책을 읽는 내내의 느낌과 비슷했다. 실재는 존재하고 그것을 그림으로서 실체를 담아낼 수는 없다. 그저 그림자일 뿐이니까. 그러나, 그 실체를 담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 대상의 혼을 단아냄으로써 가능하다는 신윤복의 말. 그렇다, 이 책은 혼을 글로써 담아냈다, 바람의 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