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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
수산나 타마로 지음, 이현경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영화 <고래와 창녀>가 생각이 난다. 고래 속에 파묻혀 있던 그녀.
아릿한 느낌이 엄습해온다. 언제나 침묵을 지키는 아버지. 그리고 내 편인줄로만 알았던 어머니의 배신. 발테르는 어머니도 함께 아버지를 욕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믿어왔던 것에 대한 배신. 발테르는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나는 배경음이었다고, 나는 저절로 열렸다가 닫히는 문이었고 삐걱이는 침대였고 갑작스러운 기침소리였고 재채기였다고, 자신은 그 모든 것이었다고. 후에 성인이 된 날 어머니가 선물해준 시계를 내려놓고 떠난다.
"난 이제 더 이상 당신들의 시간을 살고 싶지 않아요. 내 시간을 원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 갑갑했던 시간 속에서도 한줄기 싹트는 무언의 사랑이 있었다. 안드레아. 사랑보다 우정이 훨씬 더 심오하다는 것을 알게 된 둘은 서로를 생각한다, 기다리고 그리워한다. 사람은 만나면 헤어진다, 그러나 어쩌면 그러한 숙명의 결과라기 보다 서로를 감당하기에, 아니 서로를 생각하기에 지나친 사랑이 만들어 낸 결과일까. 둘은 헤어지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서로에 대한 생각의 합의점을 찾아 낼 운명에 다다르게 된다. 언제나 매순간 기억해내려 애써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 반대로 불현듯 스치듯이 기억이 나는 사람. 그러나 둘 중 누군가에게 연락을 할 것인지는 모르는 것이다. 발테르는 안드레아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용기가 나지 않았는가 보다. 안드레아에게서 한 줄기 빛인 편지가 오기까지 그는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을 보면.
"평범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두 가지 있지. 하나는 예술이고 하나는 행동이야.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행동에는 어떤 종류의 혼란도 내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술보다 위에 있지. 이런 사실을 이해한 예술가는 랭보 한 사람뿐이었어. 그는 처음에 시를 쓰다가 아프리카로 가서 무기를 팔았지."
갑갑했던, 지옥같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함께였던 삶을 뿌리치고 나아갔던 세계는 발테르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더니 끝내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그리고 자아를 찾지 못해 헤매이고 서성이는 그 즈음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땅 속에 그저 묻혀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고는 어떠한 동요도 일지 않는다. 아주 비릿한 성장통을 발테르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한 대가로 자신을 더 매몰차게 내던지는 것이었을지도. 그러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간 고향. 떨어질대로 떨어진 자신의 자존심과 성공에 대한 타락은 고향 가는 길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며 듣게 된 말, "미안하다, 미안해." 발테르는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그러니까 자기가 태어나고 아버지가 죽기까지의 그 모든 시간동안 아버지를 증오하기만 했다는 데에 대한 후회감이었을까. 아니, 후회는 아니었을것이다. 발테르만의 잘못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없었을 뿐.
집을 둘러보다가 안드레아의 편지를 발견해낸다. 여유롭지 못한 느낌의 난필의 편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는 오래된 친구, 어쩌면 한 평생을 통틀어 자신을 찾아줄 유일한 사람 안드레아를 만나러 갈 시간.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끝에 맞이하는 것은 친구의 무덤뿐이었다. 유품 중 발견한 노트에서 안드레아는 발테르에게 자신의 길고도 긴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리고 안드레아의 옆을 지키던 수녀와의 대화를 통해 발테르는 점점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가 된 마냥 자아를 찾아내려간다.
언젠가 읽었던 사르트르의 <구토>. 그의 쉼없는 호흡, 문체의 그 호흡을 느끼고 사르트르, 그가 생각하는 모든 느낌, 기대, 행동 하나하나까지 글로 옮겨 놓은 그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구토가 일었었다. 이 책, 사르트르의 호흡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발테르, 그가 생각하는 하나하나를 글로 옮겨 내려간 문체. 그러나 그 속에서는 구토가 일지 않는다. 한 번쯤 겪어 보았음 직한, 자아에 대한 멀고도 험난한 길 찾기를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보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글을 읽는 내내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하나하나 곱씹어 가며, 아니, 굳이 곱씹지 않아도 그저 읽어내려가는 동안 글 한 자, 한 자가 나의 머릿속에 박히기 시작한다.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기억되는 느낌. 성장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그 속에 담긴 이념이 꽤나 심오하다. 나는 발테르와 함께 호흡했고 일정 부분 이상 발테르의 머릿속을 함께 뛰어다니고 있었다. 발테르는 안드레아의 벗이었고, 나 또한 안드레아의 하나뿐인 친구였다. 침묵으로 한 온종일 일관했던 발테르의 아버지는 곧 나의 아버지 같았고, 생각속의 미칠듯한 동요 또한 내가 겪었던, 지금도 겪고 있는 어지러운 느낌과 같았다. 함께 호흡한다. 그리고, 나는 발테르의 삶을 살았다. 이제 남은 것은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 쉼없는 자아찾기, 나도 이제 시작이다.
"그제야 나는 아주 이상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삶이란 직선이 아니라 원이라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원할 때까지 움직일 수 있지만 그 후 정확하게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하나의 틈은 세상으로 우리를 내려 보내기 위해 열려 있었고 또 다른 틈은 우리를 높은 곳으로 빨아들이기 위해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