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에 읽을 거리로 두 권을 정하여 두었지만, 역사적인 을유년을 시작하고 나서 하는 일이라고는

지난 해 읽다가 쌓아 놓았던 책들을 꺼내어 읽지 못한 부분을 찾아내어 마저 읽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책 마지막 장에 一讀  年,月,日 숫자를 기입한다.

 

온라인에서 책을 구입하는 일이 있기 전에는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고 책 값을 계산할 적마다

책갈피를 몇 장 또는 몇 십장씩 책봉투에 쟁여 놓곤 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읽다 만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지 않으려고 표시해 두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책 속으로 사라진 책갈피가 족히 천 개는 될 듯 싶다.

내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을 무작위로 뽑아 보아도 어김없이 세월 지난 책갈피가 내게 얼굴을 내민다.

 

내 서재에 리뷰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해당이 된다.

나는 처음부터 내 독서행태를 주제 파악하여서  미리 그렇게 간판을 걸어 두었던 것이다.

책이 몇 권 없던 어린 시절에는 두 권을 동시에 읽거나, 수십권의 책을 이딴 식으로 읽는다는 작가의 말이

정신없이 사는 딴나라 사람으로 여겼는데 한 이십년 만에 내 자신이 그런 족속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쓰는 책이야기는 정확하게는 내가 만난 '책 인상기'란 말이 정확한 표현이다.

난독(亂讀)에 지독(遲讀)이 합쳐지고 여기에 책소유욕이 더해지니 내 서재는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내가 경험하여 곧이 곧대로 믿고 있는 일이지만,

사진속에서 책이 서가에 세워져 있지 않고 층층이 누워 있는 서가를 구경할 경우,

책의 무게로 보아 아주 오래 전에 들쳐 보았거나,

아니면 다시 깨어날 생각이 없는 죽음과 같은 동면 중이라 생각하게 된다.

 

각설하고,

그래도 끝에 一讀 표시를 하려고 다시 책을 붙잡는 것은 저자와 해피엔딩을 하려고 애쓴 흔적이고,

가지못한 책 속으로 난  길에 대한 그리움에 붙잡힌 까닭이다.

이것이 내가 새해 벽두에 책 설거지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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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1-05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결혼시키기 이후에 참 와닿는 말입니다. 책설거지.

오랜만에 들쳐본 책 속에 책갈피를 보면... 마음이 심란합니다. 게으름이 먼저 떠올라요. 니르바나님의 책갈피의 재발견, "읽다 만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지 않으려고 표시해 두기 위해서이다" 정말 그런 의미도 들어있으니 말이어요....^^

니르바나 2005-01-05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만큼 성실하면 참 좋겠습니다.

멋진 리뷰를 볼 적마다 가지게 되는 생각입니다.

제게도 그런 시절이 올런지 모르겠어요.

stella.K 2005-01-05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다만 책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그게 안돼더라구요. 요즘엔 난독이다 못해 지진아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빨리 읽지도 못하고, 많이 읽지도 못하고...뭐하느라 하루를 보내고, 세월을 보내는지...그래도 책 욕심은 버리질 못하고...ㅜ.ㅜ

아, 근데 니르바나님의 책설거지란 말 정말 친근감있어 좋아요. 님의, '...다시 책을 붙잡는 것은 저자와 해피엔딩을 하려고 애쓴 흔적이고, 가지못한 책 속으로 난 길에 대한 그리움에 붙잡힌 까닭이다.'란 말도 좋구요. 저도 추천할래요.^^




니르바나 2005-01-05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이쁘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우맘 2005-01-05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권을 동시에 읽거나, 수십권의 책을 이딴 식으로 읽는다는.....

아.....공감, 통감....

니르바나 2005-01-05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이 공감하셨다니 이 페이퍼는 성공작으로 여기겠습니다.

여수에서의 음주소식 잘 보았습니다.

제가 술을 못 마셔도 보는 것은 즐기거든요.

혜덕화 2005-01-06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설겆이가 아니라 책설겆이라. 재미있는 말이네요.

저는 읽다만 책을 꼭 처음부터 다시 읽는 습관이 있는데....

왜 내가 이 책을 읽다 말았을까, 그 이유를 찾으려고.

저도 지금 김형경의 성에와 선방 가는길, 힐링 소사이어티, 그리고 아이가 빌려온 삼국지 만화까지 여러권을 한꺼번에 읽고 있어요. 아무래도 이제 소설쪽으로는 영 흥미를 잃었는지 진도가 안나가네요. 김형경님의 소설 예전엔 참 좋아했는데.......


니르바나 2005-01-06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앞 부분에 책갈피에 끼워 있으면 대강은 다시 시작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중간쯤에 있으면 다른 책들의 아우성을 무시할 수 없어 앞 부분을 생략하고 펴듭니다 계속 읽다보면 옛생각이 나겠지 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