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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만나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병모 옮김 / 세시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지인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우리 둘 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겁나게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가 한국에서 유행처럼 번져버린 것에 대해 심히 유감을 표했고. 그래서 이제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것이 마치 유행이지난 루이비통 가방 (물론 외국에서는 명품에 제철이 지나고 말고가 없지만 우리나라에는 분명히 있다.) 을 메는 것 처럼 보인다는 것에 대해 분노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하루키에 대해 공통된 의견을 보인것은 하루키의 문체는 너무나 특이해서 그 누가 번역을 하더라도 하루키 책은 하루키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란 말을 했었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중 상당 부분은 김난주라는 번역가가 번역을 했다. 그리고 내가 읽은 하루키책의 대부분이 그 번역가가 번역을 한 책이었다. 원서를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 번역가가 하루키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냈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었었고. 위에서 말한것처럼 한편으로는 누가 번역해도 하루키는 역시 하루키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이 책 꿈에서 만나요는 대체 하루키 책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문체가 영 달라져 버렸다. 처음에는 뭐 이따위 번역가가 다있냐며 분기탱천 했었지만 생각해보니 하루키가 일본어로 쓴 책을 직접 읽어보지도 않은 주제에 번역이 이상하다고 하는건 말이 안되는 소리다. 어쩌면 김난주라는 번역가가 그동안 하루키의 책을 -자신의 문장력을 동원하여- 너무나 지나치게 잘 번역했던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그리고 원래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윤병모라는 사람이 옮긴 문체에 더 가깝고 말이다. 뭐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나는 이 책이 무척 하루키 스럽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다.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미지즘 소설이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담집도 아니고 단편집도 아니고 에세이집도 아니며 산문집도 아니다. 그의 말을 빌자면 이상한 형식으로 된 묘한 소설집이란다. 영어로 된 단어들을 죽 나열해놓고 거기에다 이야기나 에세이를 써 내려 갔다고 한다. 문장들은 대부분 난해해서 읽기가 좀 힘들었으며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글을 쓴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마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에서 괜찮은 부분만 짜집기해서 출판한 책 (제목은 까먹었다.) 이후로 가장 최악인 무라키미 하루키의 책이 아닌가 싶다. 우문인지 원래 번역을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괴상한 문장들도 참으로 많다. 나는 원래 학구파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원작의 느낌을 알려면 무조건 원서로! 라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갑자기 하루키의 진짜 문체와 글솜씨가 궁금해져 버렸다. 김난주씨가 쓴 하루키가 진짜인지 아니면 이 책의 번역자 윤병모씨가 옮긴 하루키가 진짜인지. 아니면 그도저도 아닌 제 3의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스타일이 존재하는 것인지 말이다.
하루키의 팬이 아니라면 이 책은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더 솔직히 말해도 된다면 하루키 팬들도 굳이 읽으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별 셋을 주는건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니까 할 수 없이 그렇게 주는거다. 거기다 무늬가 찍힌 종이하며(세상에 책을 찍는 종이에 글씨나 그림 이외에 무늬는 왜 넣는걸까? 다 읽고 나서 벽지로라도 쓰라는 건가?) 조잡한 그림하며... 특히 그림은 정말이지 할말이 많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삽화는 뭐니뭐니 해도 안자이 미즈마루씨의 그림이 제격인데 여기 실린 그림들은 콜라쥬도 아닌것이 대체 뭐가 뭔지를 모르겠다. 눈만 아플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그림을 왜 넣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래저래 마음에 안드는 책이다.
쓸데없는 소리를 좀 더 덧붙이자면 이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책장 정리를 했다. 원래는 구입 순서대로 아무렇게나 꽂아두는데 문득 하루키 만큼이라도 책장 한칸 정도는 전용 공간으로 내어줘도 괜찮은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리를 해 보니 하루키의 책은 딱 책장 한칸을 차지할 만큼이었다. 하루키가 낸 책이란 책은 다 읽었음에도 그것밖에 자릴 차지하지 못하나 싶어 곰곰히 생각해보니 과거에는 하루키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봤기 때문에 그런것 같다. 하나 이상한건 A to Z 라는 책을 분명히 사서 읽은것 같은데 서평도 쓰질 않았고 책꽂이에도 없다는 것이다. 평소 아무에게도 책을 빌려주지 않는데 그 책은 어디로 간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