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이라면 유달리 사죽을 못쓰는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MBC 베스트 극장을 즐겨 봤었다. 단편이라는 장점 외에도 정해진 감독도 작가도, 배우도 없이 그때 그때마다 바뀌는 시스템이라는 점도 퍽 마음에 든다. 가끔은 깨는 시나리오에 확 깨는 감독과 홀딱 깨는 배우들인 골때리는 작품을 내놓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베스트 극장은 재미있다.

어제밤. 미용실을 나와서 늦은 저녁을 해먹자니 좀 어설퍼서 이마트에서 하이네켄 두병과 개당 500원씩 하는 생선초밥 10개를 사서 집으로 왔다. 샤워를 하고 초밥과 맥주를 먹으면서 TV채널을 돌렸더니 지난 금요일날 내가 못 본 베스트 극장을 하고 있었다. 제목은 매직 파워 알콜. 때마침 나도 도수는 약할지언정 나름 알콜음료를 섭취하고 있는 중인지라, 보다가 알딸딸 한 기분으로 잠들었음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보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퍼머약 냄새와 치약이 뭍은 초록색 가운. 어떤 생선이 올라가 있어도 맛이 동일한 참으로 신기한 초밥. 냉동실에 넣어서 시원한 하이네켄과 함께 매직 파워 알콜을 관람하는 기분은 꽤 괜찮았다.



매직 파워 알콜은 총 3개의 단편으로 이뤄져 있었다. 첫번째는 김민선 김동완 주연의 살다보니. 김민선은 새로 창간한 와인 잡지의 젊은 편집장인데 앞만 보고 죽어라 달린 타입의 여자이다. 창간호 행사에서 그녀는 술을 마시고 남자친구인 김동완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얘기해 준다. 어렸을때 자기의 동상걸린 언 발을 따뜻한 배로 녹여주시던 아버지.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을 해서 낳은 동생이 4살이건만 그녀는 아직까지 동생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귀가하던 그녀는 택시에서 내려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지만 끝내 말은 하지 못하고 그냥 끊는다. 그녀는 자신이 참 차갑다고 생각하고 바꾸려고 하지만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버려서 쉽지가 않다. 창간호 행사에서 사람들은 그녀 앞에서는 축하한다고 하지만 뒤 돌아서서는 콧대가 높다느니, 잡지가 잘 안팔리면 기가 팍 꺽일테니 두고보자느니 한다.

두번째는 려원과 강석우 주연의 '술자리'. 려원은 잡지사의 직원이다. 어느날 팀 회식을 하게 되고 그녀는 거기에서 부장인 강석우를 비롯해서 다른 남자 직원들이 노는 한심한 작태를 본다. 가게 된 술집은 유부남 부장의 애인 집이며 부장은 거기에서도 설교와 얼르기와 권위세우기의 짬뽕 쑈를 하고 남자직원들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폭탄주가 돌려지고 려원은 간염 주사를 맞아서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하지만. 부장은 '이래서 여자들은 안된다' 며 오히려 폭탄주를 한 잔 더 만들어서 두 잔을 마시게 한다. 부장은 려원에게 캐릭터를 가지라고 한다. 전에 있던 선배 수진 (김민선) 처럼 여우같거나 아니면 어른들 잘 모시고 싹싹하거나. 그는 려원의 머리를 툭툭 치면서 얘기를 한다. 더없이 불쾌한 술지리가 끝나고 부장은 택시를 타면서 그녀와 새로운 신입 남자 사원에게 차비를 하라며 10만원짜리 수표를 준다. 려원은 집으로 가는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를 사려다 편의점 직원과 실강이를 벌이게 되고. 10만원짜리 수표를 직원에게 던지며 나머지는 팁이라고 한다.

친구들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던 용이. 친구들이 옛 애인인 미영의 얘기를 하며 전화를 해 보라고 부추기고 급기야 친구들이 미영에게 전화를 하지만 받지 않는다. 용이는 화장실을 간다며 슬쩍 빠져나와서 그 길로 헤어진지 1년도 더 된 미영의 집 앞으로 간다. 하지만 나온 사람은 미영이 대신 동생이 나왔다. 동생은 술에 취해 미영을 찾아온 용이에게 '당신같은 사람 때문에 우리 언니가 약을 먹었다는게 한심하다' 고 말한다. 늘 자신의 뒤에서 희생적인 사랑만 한 미영은 끝내 나오지 않고. 용이는 창문을 향해 돌을 던진다. 미영은 잠시 후 창문을 열고 용이가 사준 곰인형을 던진다. 용이는 곰인형과 같이 새벽이 올때까지 그 집 앞에 앉아있다가 곰인형의 손을 잡고 한강둔치까지 달려간다.

각기 다른 얘기들이지만 술이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이 에피소드들은 전부 연결이 되어있다. 두번째 에피소드의 경우 려원이 일하는 직장은 과거 김민선이 일했던 곳이고 세번째 에피소드 포장마차는 두번째 에피소드 '술자리'에서 려원과 신입남자직원 그리고 부장이 빠진 나머지 사람들이 2차로 들어간 포장마차이다. 마지막에 용이는 한강대교에 곰인형을 놔두고 잘살라고 외치고 그 아래 둔치에서 려원은 혼자 맥주를 마시다가 말고 일어서서 다들 똑바로 살라며 외친다. 그리고 카메라는 다시 김민선의 방이 있는 2층 베란다로 옮겨가고 거기서 김민선은 창을 열고 새벽공기를 맡으며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있어줘서 고맙다고 독백을 한다.

무언가 아주 뚜렷한 주제가 있다던가 전달하려는 메세지가 분명한 단편들은 아니지만 세 단편들은 꽤나 재밌고 세련되었다. 술이라는 주제로 엮여있지만 각기 다른 사람들의 다른 술자리와 삶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한 공간에서 서로 스치듯 지나쳐간 우연을 공유한다.

간만에 재밌는 베스트 극장을 봐서 기분이 되게 좋았다. 겨우 하이네켄 두병으로 알딸딸한. 너무 오래 술을 안마셔서 한심해져버린 내 주량이 좀 우습긴 했지만 어제는 그럭저럭 괜찮은 야밤이었다. 참. 김동완과 려원은 각각 신화 샤크라 멤버였는데 연기를 그럭저럭 잘했다. 가수들이 모두 부업삼아 연기를 하는것에 그다지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은 욕을 얻어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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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5-02-06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게 봤더랬죠. 세 번째 이야기에서 항상 뒷모습만 봤다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플라시보 2005-02-0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 음... 사랑이 똑 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으면 좋겠지만 항상 시소처럼 균형이 잡히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더라구요. 그러면 나머지 한쪽은 그 뒷모습을 자주 보게 되죠. 딱 균형잡혀서 너도 50. 나도50. 합의 100. 이런 사랑은 없나봐요. 하긴..그렇게 딱 맞아 떨어지는 것도 좀 비인간적이다 그죠?^^

픽팍 2005-03-03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스트극장이 은근히 괜찮은 거 많이 하던걸요
저번에 '악연'이라고 고두심님이랑 김영옥님이 나오셨는데
고부간의갈등을 그린 전형적인 드라마 였는데 다들 연기를 죽여주게 하시더라구요;;
암튼 베스트 극장 옛날에 사라질 뻔하다가 피디들이 반발해서 계속
살아남게 되었다고 하더라구요;;mbc정말 좋아하려고 해도 좋아할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