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서 써먹기 좋은 대사 메뉴얼
한동원 지음 / 북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예전에 MBC에 출발 비디오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곧 출시될 신작 비디오들을 미리 훑어줌으로써 비디오 대여 활성화에 앞장서는, 그러나 겉으로는 영화정보 제공의 탈을 쓰고 있는 그렇고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프로그램을 일주일 내내 눈빠지게 기다렸었다. 이유는 딱 하나. 그 안에 있는 [결정적 장면]이라는 코너를 보기 (혹은 듣기) 위해서였다. 결정적 장면은 각종 영화에서 결정적인 장면들을 뽑아다가 소개를 하는 코너였는데,누가 생각해도 저 영화의 결정적 장면은 저거 다 싶은 부분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좀 엉뚱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결정적 장면이라고 우기곤 했었다. 그러나 그냥 엉뚱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우겼다면 하나도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 코너가 그토록이나 웃겼던 이유는 웃기는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오히려 상당히 FM적인 보이스를 가지고 있는 성우 이철용씨가 택도 없이 오바스러우면서도 진지한 해설을 덧붙인 덕분이었다. 만약 결정적 장면에서 이철용씨가 아닌 목소리 자체에 코믹한 요소가 있는 성우가 했더라면 그만큼 인기를 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진지하게 웃겨버리는것. 그게 그 코너의 핵심이었다.

이 책은 그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결정적 장면 코너의 대본을 썼던 한동원씨가 쓴 책이다. 결정적 장면을 워낙에 재밌게 봐서인지 내 경우에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목소리로 책이 읽혀지는게 아니라 성우 이철용의 목소리로 책이 읽혀져서 더더욱 웃겼다. 사실 책 제목이 어디가서 써먹기 좋은 대사 메뉴얼 이지만 실제로 써 먹기 위한 대사 메뉴얼은 아니다. 결정적 장면이 진짜로 결정적 장면으로 이루어진 코너가 아니었듯이 말이다. 물론 어디가서 써 먹어도 괜찮을 만한 것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알다시피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를 실제로 한다고 생각해보라. (ex : 이 안에 너 있다, 애기야 가자 등등) 잠시만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나는 말 주변이 없는데 이 책을 통해 말 주변을 한번 길러볼까?' 하는 사람들에게 권할 책은 아니다. 그냥 순전히 재미로 읽을만한 책이다. 이미 결정적 장면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동원은 상당히 재미있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다. 물론 그의 글이 다소 길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단점이야 말로 한동원을 더욱 더 빛나게 하는 요소이다. 가끔가다 할말이 너무도 많은 나머지 길고 장황하게 글을 쓰는 인간들을 보는데 그때마다 내가 발견한 건 두 가지의 오류들이었다. 첫째, 말이 너무 길어져서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 까먹은 경우. 이 경우는 실컷 길게 말을 하긴 했는데 하다가 보니 자기도 무슨 말을 했는지 까먹어서 처음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말을 하게 된다. 둘째는 처음 자기의 주장을 뒤에 가서 자기가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도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처음 펼쳤던 주장 이후로 너무나 말을 많이 하다가 보니 자기가 주장한바를 까먹고, 심지어 까먹는것도 모자라서 지 주장을 지가 뒤 엎는 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읽어보니 한동원은 위 두가지 오류를 범할만큼 충분히 긴 문장을 쓰긴 했지만 내가 살펴본 한에서는 저 오류를 범한적이 없었다. 즉 수다스럽지만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또 어떤 결론을 내고 싶은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해보면 알겠지만 이거 생각보다 어렵다.)

한동원의 글이 재밌는 것은 재치가 있다거나 코믹한 단어를 써서가 아니다. 그것은 장황함과 오바스러움에서 오는 재미이다. 장황과 오바를 빼면 남는게 없을 정도로 책의 8할은 그 두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재밌지만 어느정도 읽다가 보면 조금 식상하는 면도 있다. 썼던 표현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그놈이 그놈인 문구들도 자주 눈에 띈다. 허나 그런점들만 감안한다면 이 책은 확실하게 재미있다. 단 이 책을 읽고 정말로 말빨이 늘기를 기대한다거나 여기에 적힌 결정적 영화 대사들을 어디가서 써먹으려고 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 책은 마치 어학교재처럼 좋은예와 나쁜 예. 거기다 응용법까지 적어 놓았지만 그것도 이 책이 가진 재미인 오바의 일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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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4 2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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