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장을 보러 가서 하이네켄 잔을 준다는 말에 원래 병맥주 밖에는 잘 안마시지만 사은품에 혹해서 하이네켄 캔을 샀다. 아무래도 잔은 두 개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두 박스를 샀다. 그리고 이걸 언제 먹나 하다가 드디어 오늘.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한잔 걸쳐주셔야 할 것 같아서 하이네켄을 땄다. 한 박스 (6개들이)를 다 마시고 두 박스째를 뜯을 무렵 오른쪽 엄지 발가락이 살살 아픈 것이었다. 원래 나는 집에서 늘 슬리퍼를 신고 다니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발을 다칠 일이 없는데 이상하다 싶어 왼쪽 엄지발가락을 살펴봤다. 그랬더니 끝 부분에 뭔가 예리한것에 도려져 나갔는지 살이 덜렁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그냥 그 살을 그대로 덮고 대일밴드를 발라야 옳았겠지만 이미 얼큰해진 나는 '이거 뭐야?' 하면서 그 살을 북 하고 뜯어냈다. 그랬더니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이었다.
다급해진 나는 대충 식염수에 피를 씻어내고 소독을 한 다음 후시딘을 바르고 일본에서 사온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반창고를 붙였다. (진짜 절대 안떨어진다. 떼어낼때도 그만큼 고생이지만 안떨어지는 것 만큼은 동급 최강이다.) 그런데 술이 조금씩 깨고, 그들이 사는 세상이 조금씩 더 디테일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엄지 발가락은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엄지 발가락 같은건. 폭이 좁은 구두를 신지 않을때는 대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런 존재였다. 그냥 거기에 발가락이 있으니 있으려니 할 뿐이었지. 특별히 엄지 발가락을 주의해서 볼 일은 발톱을 깎을때 정도였다. 그런데 이게 아프기 시작하니 슬리퍼에 조금 닿아도 아프고 다른 슬리퍼를 신어도 아프고 양말을 신어도 아팠다. 비로소 나는 내게 엄지 발가락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 몸의 일부인데도, 다치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부위들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부위들이 다 그렇다. 아프거나 다치지 않을때는 그냥 내 몸을 형성하는 것의 일부분일 뿐. 그들이 소리를 내어 '나 여깄어요' 라고 말 하는 경우는 없다. 간혹 손가락을 베이거나 할때면 정말 그 손가락이 많은 일을 했구나, 샤워를 하거나 세수를 할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엄지 발가락은 욱신욱신 쑤신다. 병원에 가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동안 물에 닿지 않아야 할 정도의 주의는 기울여야 하는, 그리고 슬리퍼를 신을 때 마다, 신발을 신을 때 마다 자각을 할 정도로는 아프다. 한동안 앞코가 뾰족한 구두들은 안녕이다. 그저 어그 부츠나 신을 밖에..
사람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곁에 있을때는 그 존재의 의미랄지, 그 존재가 가지는 무게 같은것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익숙해져 있다가 떠나고 나면 비로소 그 존재를 느끼게 된다. 아, 나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였구나, 혹은 내가 그 존재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떠나고 나서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존재가 있다. 마치 손가락에 난 손 거스르미처럼 오히려 사라진게 후련하고 속 시원할때도 있다. 그렇다면 나라는 인간은 대체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다치고 나서야 그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는 엄지 발가락 같은 인간일까? 아니면 세수를 하거나 스킨 로션을 바를때 어쩔 수 없이 매일 보게 되는 얼굴 처럼 수시로 내 존재를 자각하게 되는 사람일까? 아니면 손 거스르미처럼 없어지면 깔끔하게 느껴지는 존재일까?
사람들은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친구들이 몇인지를 헤아려보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일단은 내 편이 되어 줄 사람. 막말로 내가 범법 행위를 저질러서 쫒기고 있다면 무조건 나를 숨겨주고 그 다음 일을 생각해보는 사람. 그런 친구들이 나는 몇명이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얼핏 몇 몇 얼굴이 떠오르긴 하지만 글쎄다. 그들에게 내가 손거스르미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내게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내고, 이메일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나란 존재가 필요한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그들의 인생에 있어, 혹은 일상에 있어 나는 얼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엄지 발가락 하나를 다치고 나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드는 밤이다. 일 할게 아니라면 이제 그만 책을 좀 읽다가 자야겠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정이현의 '너는 모른다' 읽으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나는 정말 정이현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것이다. 그간 그녀의 책들은 꽤나 가벼웠는데 이번 책은 그렇지 않다. 열심히 정독을 하며 읽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근사한 글을 쓸 수 있는 인간으로 변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또 하나 바래도 된다면 적어도 손거스르미처럼 사라지면 시원한 인간은 아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