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더 이상은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고.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의 탈을 쓰고 있는 자 답게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관계에 있어 상처를 두려워한다면 영원히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한다고,
그리고 상처를 받을 각오를 해야만 관계의 진정성에 다가갈 수 있다고.
그러나 나는 돌아서 생각했다.
과연 나도 저럴 수 있을까?
상처받지 않기 위해 피한 관계는 없었으며, 상처를 받기 전에 차라리 주는 쪽을 택했던 적은
없었는지를.
오히려 나는 내게 상담을 해 온 이 보다
더 강렬하게 상처받지 않을 것은 원했던것 같다.
누군가를 향해 너무 집중해서 사랑하지 않은 이유는
언젠가 그 마음이 가서 닿지 못하고 되돌아오게 될
거절에 대한 상처, 그리고 내 마음을 몰라준다는 것에 대한 아픔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건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마음을 다해 마음을 주는 사랑 같은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그건 그만큼의 상처도 함께 받아야하는 일이며
어차피 관계에 있어 상처가 없는 낙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는 끊임없이 상처를 낳는다.
그리고 그 상처는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를 뒤흔들게 된다.
때로는 사랑에, 부모에, 친구에..
웃긴건 우리가 반드시 상처를 받는자의 입장에만 서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건 모르건 우리 자신도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준다.
그리고 그것은 알량한 사과의 말 정도로는 상대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설사 진심을 다해 미안하다고 말을 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이미 상대가 상처를 받아버렸고
나의 사과나 미안함은 차후에 바르는 후시딘이나 마데카솔 정도의 역할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글을 쓰면서 인간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글이나 영화 음악 예술 등등은 관계를 위한 소통을 이야기하는 것이자
관계로 인한 공감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 세상에 진정한 소통과 진정한 공감이 있을 수 있을까?
그걸 인간에게 바란다는 것은 어쩌면 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나는 모든 관계에대한 소통과 공감에 대해
아직도 너무 모르는게 많고 할 이야기들이 많으며 배워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배움에 있어 상처는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것이라 각오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내가 받을수도 있으며 타인이 받을수도 있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 같은건 하고싶지 않지만
가끔은 의도하지 않게, 그리고 뜻하지 않게 그렇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믿는다.
나는 관계에 있어 상처 보다는 소통과 공감의 힘이 더 크고
우리 모두 그것을 원하고 있다고 말이다.
비록 다다를 수 없는 판도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꿈을 꾸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인간을 위해 매트릭스라는 가상 세계가 필요했던 것 처럼
우리에게는 그 꿈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완전한 소통과 완전한 공감.
비록 세상에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고 꿈꾸는 것 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