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치다. 

어느 정도로 길치냐면. 레스토랑에서 화장실을 갔다가 나오면 남자 화장실로 들어거나 

주방으로 가거나, 혹 길을 찾아 나왔다 하더라도 내가 앉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태 여행이라고는 깃발 아래 모여서 인솔자가 이끄는대로 다니는 여행만 했었다. 

비싸도 그게 마음 편했고, 재미 없어도 적어도 국제 미아 될 염려는 하지 않아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 막내와 함께 자유여행을 가기로 했다. 

막내는 워낙 일본을 많이 다녀서 훤하게 꿰뚫고 있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다니는 것.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뭘 보고, 뭘 찍고 오고가 아닌 

그냥 좀 돌아다니기로 했다. 

마치 홍대 앞을 쏘다니듯, 가로수길을 쏘다니듯. 

우리의 금지 품목은 책과 MP3다. 

좀 의외라고 생각되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와 정신을 

온전히 여행지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공기를 마시고, 그 풍경을 보고, 그 소리들을 듣는데 백프로 쓰기로.. 

 

샘소나이트에서 나에게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코랄 핑크 캐리어를 샀다. 

혼자 여행을 간 적이 없으니 늘 내 캐리어는 이민가방 수준이었다. 

이제 저 캐리어가 생겼으니 

나는 어쩌면 용기를 내어 

이 땅이 아닌 다른 어떤곳에 혼자 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한비야도 길치라잖는가. (한비야도 두손 두발 다 들 길치가 나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곳이 아닌 다른 어떤 곳.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는 곳. 

다른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자유여행을 다닐 것이니까 말이다.  

 

책으로, 일로 더 바빠지기 전에 

해치우기로 했다. 

한번쯤은 아웃풋이 아닌 인풋도 해줘야 하기에 

가서 뭘 채워올지는 모르겠다만 

설마 허한 마음으로 돌아오진 않겠지. 

유일하게 쇼핑을 포기한 여행이다. 

왜냐. 갑작스럽게 결정이 나서 경비가 빠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여행에서 쇼핑만 열나게 하고 나니 

새로생긴 백화점 투어를 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주 필요한 몇 가지만 살 것이다. 

두 사람의 선물. 그리고 나를 위한 선물 하나   

그리고 그걸 사느라 돌아다니는 시간을 세이브해서 

다른걸 해야지. 길에 멍하게 앉아 있어도 이 곳 아닌 다른 어딘가에 앉아있다면 새롭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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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5 04: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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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5 04: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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