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에다 밑줄을 긋는 사람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아주 어렸을때 오빠의 책을 훔쳐봤는데 그때마다 조금 어렵다거나 멋있는 구절이 나올때 마다 자로 반듯하게 줄을 그어놓은 것을 보면서 지적 허영이라고 느꼈으니까. 하지만 나 역시 밑줄 대신 다른 식으로 나의 지적 허영을 만족시키고 있는데 그건 책에다가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것이다. 대게는 책의 맨 앞장에다 산 날자와 함께 적는데 대학 다닐때는 치기로 책에다 첨부터 끝까지 나만의 주석을 달기도 했었으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말자. 카롤린 봉그랑이 그리는 책에다 밑줄 긋는 남자는 나와 오빠처럼 지적 허영에 의해 그러는것은 아니니까. 남자가 밑줄을 그어놓은 것은 모두 말을 대신하는 것이다. 주인공인 여자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없어서 그런 방법을 택한 것이다. 어쩌면 남자는 아무 생각없이 나름대로 감명을 받았거나 뭐 그러한 개인적인 이유로 줄을 그엇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책을 통해 자신에게 하고싶은 그러나 직접 할수는 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좋아하는 여자라면 한번 정도는 그런 상상을 해 보았을 것이다. 나처럼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며 그런 사람이라면 화장실에 낙서를 하는 대신 책에다가 줄을 긋거나 글귀를 써 놓을 것이라고... 헌 책방에서 책을 샀을때 괜찮은 글귀가 적혀 있으면 혼자 그 글자를 보면서 아주 섬세하게 생긴 남자가 적었을것이라는 상상을 나 혼자만 했을까?

이 책은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볍지도 않다. 내용은 한 여자가 책에 밑줄이 그어진 글귀가 자신이라고 느끼면서부터 그 글을 추적하는데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탐정처럼 추적하고 단서를 수집하는게 아니라 그냥 밑줄이 그어진 책들을 순서대로 찾아 읽는다. 남자는 밑줄 뿐 아니라 친절하게도 다음에 읽어야 할 책 제목까지 함께 적어놓으니까.) 남자가 밑줄을 그은 것들만 다 모아도 또 하나의 훌륭한 문장이 되며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책들은 실제로 있는 책이니 작가의 엄청난 독서량과 방대한 관심사를 엿볼 수 있다.

연예소설 중에서는 절대 느끼하지 않은 소설을 찾기가 몹시 힘이 드는데 이 책은 마치 기름기를 쪽 뺀 저지방 참치캔 같은 소설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여기서 줄을 긋는 남자가 등장하지 않고 끝까지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휴가때 읽을 그리 무겁지 않은 (내용뿐 아니라 실제 책도 가볍다.) 책을 찾고 있다면 적극 추천하고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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