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내가 배우였다면. 그랬다면 나는 열흘이고 보름이고 노희경의 집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건 아니면 눈물콧물을 다 짜건간에 여하튼 나는 그녀의 드라마에 행인1이라도 반드시 출연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을 것이다. 적당한 트렌디 드라마를 찍고, CF로 왕창 돈을 버는 연예인이 아닌 배우가 되겠다고 다짐했다면. 나는 내 이름 석자를 걸고 장담컨데 꼭 그리 했을 것이다.   

거의 신으로 불리우는 한 방송 작가는. 자신이 쓰는 드라마 대본에 말투며 토시 하나까지 일일이 짚어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매번 대본 리딩때마다 참석해서 배우의 연기를 체크하고 지적한다고 한다. 그 드라마에 출연한 신인들은 놀랍게 연기력이 향상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것이 그 무서운 호랑이같은 대작가님 앞에서 지적받지 않으려면, 그리고 어지간한 드라마 3편 분량에 해당하는 수많은 대사를 외우다 보면 절로 연기력이 늘 것이다. 그러나 여기. 신인 배우들의 연기력을 향상시키는 또 한명의 작가가 있다. 하지만 전자와 전혀 다른 타입으로 그는 배우에게 자기가 알아서 연기를 하게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역할은 대본을 쓰는 딱 거기까지만으로 선을 긋고. 배우가 할 몫은 배우에게, 감독이 할 몫은 감독에게, 또 스탭몫은 그들에게 온전하게 돌려준다. 물론 그들이 도와달라고 말하면 흔쾌히 돕지만. 자기 쪽에서 '내 작품이니 절대 망칠 수 없어. 그게 누구라도' 하는 건 없다. 그러니까 노희경은 드라마라는 공동작업이. 정말 공동작업이 될 수 있게 하는 작가이다. 어지간히 파워를 가진 그녀가 이렇게 되기까지 참 마음을 많이 비웠겠구나 짐작이 간다. 당장 내가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라면. 나는 내 작품을 지킨다는 이유로 오만 간섭을 다해대서 사람들에게 진상으로 불리거나 화상으로 불리웠을께 분명하니까.

노희경의 드라마는 일명 마니아 드라마로 불리운다. 그 말은 소수의 열광하는 팬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인 동시에, 시청률에서는 좀 아쉬운. 그러니까 매우 대중적 코드를 갖고 있는 드라마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그래서 얼마나 더 반가운지 모른다. 물론 나는 마니아적 취향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내 여동생이 '너도 별 수 없구나' 라고 말할 정도로, 그야말로 개나소나 다 보되 내용 면에 있어서는 유치뽕짝이 하늘을 찌르는 드라마도 꽤 열심히 시청하니까. 그러나 아주 가끔은 닥본사 (닥치고 본방 사수라는 말이라는군) 를 못하면 잠이 안 올. 그런 드라마를 만나고 싶다. 그래서 노희경은 내게 있어 아주 소중한 드라마 작가이다. 만약 그녀의 드라마가 없었다면. 나는 그녀에 대한 연정으로 점철된 원고 하나를 못 썼을지도 모르며, 내 삶에 아주 큰 즐거움 하나를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노희경의 드라마란 드라마는 다 챙겨봤을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해 아주 작정하고 챙겨 본 것은 '그들이 사는 세상' 이 전부이다. 나머지 주옥같은 드라마들은 그러지 못했다. 1회부터 최종회까지 다 본 것은 그세사가 처음이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 작가를 사랑한다고 말 하면서도 어딘가 2%. 아니 한 20%쯤 모자라는 팬이다.  

예전에 드라마 작가, 혹은 시나리오 작가들이 낸 소설이나 산문집을 열심히 보던때가 있었다. 그들의 영화와 드라마가 내게 감동 혹은 재미를 주었기에. 나는 주저없이 그들이 종이위에 펼친 작품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너무 오만방자했다. 마치 내가 수천 수백만의 시청자들을 들었다놨다 하는 작가인데 이깐 소설책 하나 산문집 하나 어려울까. 하는게 느껴졌다. 그들은 한 장르에 있어서는 대가였을지 모르나 다른 장르에서는 초보라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까먹은듯 했다.   

그러나 노희경에게는 그런것이 보이지 않는다. 머릿말에 있기 마련인. 내가 비록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지만 책은 처음인지라 예쁘게 봐 주십사 하는 그 흔한 아부말도 없다. (근데 대부분 저렇게 적은 사람들은 본심과는 반대로 적었더군.) 그리고 책을 낼까 말까 망설였다는, 진짜 책을 통해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누가 될까봐 고민을 많이 했었다는 아무도 믿지 않을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냥 묵묵히 글을 써놨다. 자신의 드라마와는 좀 다른. 하지만 어딘가 배다른 형제 쯤으로 보이는 닮은 구석을 내보이면서.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가 무척 세련되고 감각적일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났다. 단 한번도 그녀의 드라마가 그런적도 없었는데. 어쩌면 나는 온에어를 너무 열심히 봤는지도. 아무튼 그녀의 글은 세련된 도회지의 냄새라기 보다는. 약간은 촌스러운 시골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버린 나는. 당연하지만 그런 냄새가 훨씬 더 그윽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드라마 화두가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어느 드라마나 인간을 다루지 않겠느냐만은. 그녀의 드라마에는 이건 드라마니까 하는 억지스런 갈등이 없다. 꽈배기 꼬이듯 온갖 역경과 시련을 겪는 주인공은 애초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그녀의 드라마에는 주인공이 따로 없다. 보다보면 다들 너무 사랑스러워서 주연이니 조연이니, 혹은 인기 배우니 신인이니 하고 나뉘어지지가 않는다. 모든 배우들에게 골고루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것. 그것 또한 노희경의 힘이자 그녀의 인간에 대한 철학인것 같다.  

이 책에서 단지 아쉬웠던 점이라면 그들이 사는 세상의 독백을 옮겨놓은 부분이다. 물론 그 드라마의 팬이었던 나는 그들의 주옥같은 독백을 글로 만나 반갑기는 했다. 하지만 이 얇은 책에서 이것마저 끼워넣어버리면 그녀의 글이 더 줄어들지 않느냐는 아쉬움이 더 컸다. 그리고 조금만 그녀가 더 친절하게 더 길게 얘기 해 주었으면 (글이 친절하지 않은건 아닌데 짧은게 나는 불만이었으므로) 싶었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고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나는 무죄 판결을 받아 낼 자신이 있다. 왜냐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다면, 그랬다면 이 지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추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 말마따나 지구의 온도를 낮추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들은 모두 유죄다. 얼른 그들이 사랑을 하여 무죄 판결을 받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