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조곡
온다 리쿠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온다 리쿠는 늘 이야기의 초입에 서서 독자가 준비할 겨를도 없이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어간다. 말하자면 천부적인 이야기꾼인 셈이다. 저 멀리, 깊숙한 곳에 이 세상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귓가에 속살거리는 듯한 문체다. 덕분에 나는 늘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속절없이 끌려들어가, 한 번 타면 내려올 수 없는 놀이기구를 탄 듯 정신없이 내달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이야기는 끝이 나있다. 단숨에 읽어내려 머리가 멍하고 이야기의 잔상이 눈 앞에 들러붙어 있는 몽롱한 느낌.

 

「목요조곡」도 그렇다. 책을 펼친 순간, 난 이미 그 집 앞에 서 있었고, 훅 하고 풍기는 잔잔하고 불온한 공기에 불안해할 새도 없이 주인공들을 따라 집 안에 들어가 주인공들을 관찰했다.

 

그건 그렇고, 온다 리쿠의 주인공 중에는 '여자'나 '여자아이'가 많다. 내가 온다 리쿠의 '모든' 작품을 읽어본 건 아니지만, 읽어본 책들을 주륵 열거해 보아도 대개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아무래도 작가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일까? '여자'가 가진 비밀스러움, 수다 속에 감춰진 의뭉스러움, 상냥하고 섬세한 손길 속의 무심함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여자들의 수다 속에서 미스터리가 새어나온다는 걸, 온다 리쿠는 절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 '타인의 가십'이라는 먹이만큼 여자의 본성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타인을 관찰하고 분석해서 요리하는 것이 특기인 여자들만 모여 있지 않은가! (52)

 

게다가 이번 주인공들은 모두 '글쟁이'에 가깝다. 가깝다는 건, 주인공들 중 정식 직업이 '작가'가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말일 뿐, 객관적으로는 모두 '글 쓰는'일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데다 분석하고 재조립하는 데 능한 여자들이다. 오싹하다. 이런 사람들에게 걸리면 뼛속까지 낱낱이 밝혀져 도마 위에 오를 것 같다 - 라고 해도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글 쓰는 직업과는 상관없이 그런 능력이 자체 내장되어 있겠지만.

 

-망상, 좋지! 우린 그것으로 벌어먹고 사니까. 누구나 자기의 망상 속에서 살고 있고, 우리는 어떻게 생판 모르는 남을 자기의 망상 속으로 끌어들일까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잖아. 자의식 과잉이네, 남의 흠을 들춰내는 나쁜 놈이네,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어. (120)

 

목요일을 좋아했던 한 여류 소설가의 죽음 이후, 그 장소에 있었던 다섯 사람은 매년 3일간은 고인을 기리며 고인의 집에 머문다. 천재라고 여겨졌던 여류 소설가는 죽은 후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유령이 되어 배회하는 듯 하다. 다섯 사람 모두 글쓰는 일에 관련이 있고, 그 중 셋은 친척인지라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져가고 이리저리 튀어나간다. 올해로 4년째 이어져온 이 '모임'에 불온한 공기가 감돌고 급기야는 감춰두었던 사실이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한다.

 

-천재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과혹한 존재야. 천재는 범인(凡人)을 몰아내버리지. 노력하는 사람을, 그런지도 모르고 짓밟아버리는 경향이 있어. (122)

 

책의 마지막을 읽어가며 든 생각은, 온다 리쿠는 어떤 생각으로 이 '작가'들을 써내려 갔을까- 하는 거였다. 소설가로서 다른 소설가, 그것도 각자 성격이 생판 다른 소설가를 그려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사실 그렇다. 글을 쓴다는 건 소설 속 에리코의 말처럼, 내 알몸을 생판 남에게 보여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라는 자아 없이는 나올 수 없으니까. 나는 늘 예술가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물론 내게 없는 재능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예술이라는 건 결국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의 연속이니까. 제 살을 깎아 보여주는 일같이 느껴졌다. 게다가 노력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천부적이고 절대적인 재능 앞에 가장 무력함을 느끼는 건 오히려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 아닌가.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를 봐도 명백하다. 결국 예술가들은 안쪽으로 자신을 깍아내려가면서 바깥쪽에서는 세상과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어마어마한 일이다. 이 다섯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술을 좋아하고 잘 떠들고 좌절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예술가적인 불씨가 가슴 속에서 타고 있어서 확고한 자의식으로 그걸 지키고 있는듯 했다. 글을 쓰고 싶다 - 나를 보여주고 싶다 - 는 열망이 평범함 속에 녹아들어 있는 사람들. 문득 이 여자들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소설이란 밀실에서의 개인 작업으로 태어나고, 완성품만이 사람들 눈앞에 드러나는 상품이다. 누구나 소설가의 내막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틀림없이 뒤에는 은밀한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하다고 독자는 믿고 있다. (263)

 

가장 무서운 것은, 결국 모든 걸 다 털어놓고 모든 진실, 하나의 확고한 진실이 밝혀졌다고 생각해 안심을 해도 결국 각자의 마음 속에는 감춰진 진실, 아무도 모를 진심이 숨어있다는 점이다. 내가 옛날부터 보아온 추리소설은, 마지막에는 모든 진실이 밝혀져 범인이 밝혀지고 동기가 샅샅이 파헤쳐 지는 것이었다. 덕분에 책을 덮으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모든 세계가 책장 속에서 종결되고, 나를 옭아매지 않는다-는 그런 종류의 상쾌함이었다. 단순하리만큼 명쾌하고 심지어는 호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하나의 사건이 '모두' 완벽하게 종결되는 건 있을 수 없다며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슬쩍 엿보이며 끝을 맺는다. 너무나도 '현실'다워서 까딱하면 우울해질 뻔 했다. 그렇다. 누군가가 죽어도 그 죽음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종결짓지는 않는 법이고, 책을 덮어도 이야기의 파편은 내 어딘가에 묻어 나오는 법이다.

 

-목요일이 좋아. 어른의 시간이 흐르고 있으니까. 정성 들여 만든 과자 향기가 나니까. 따뜻한 색상의 스톨을 두르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으면서 말없이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듯한 안도감이 느껴지니까. 목요일이 좋아. 주말에 대한 기대에 찬 예감을 마음 깊이 숨겨두고 있으니까. 그때까지 일어났던 일도, 앞으로 일어날 일도, 죄다 알고 있는 것만 같으니까 좋아....... (143)

`타인의 가십`이라는 먹이만큼 여자의 본성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타인을 관찰하고 분석해서 요리하는 것이 특기인 여자들만 모여 있지 않은가! (52)

망상, 좋지! 우린 그것으로 벌어먹고 사니까. 누구나 자기의 망상 속에서 살고 있고, 우리는 어떻게 생판 모르는 남을 자기의 망상 속으로 끌어들일까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잖아. 자의식 과잉이네, 남의 흠을 들춰내는 나쁜 놈이네,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어. (120)

천재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과혹한 존재야. 천재는 범인(凡人)을 몰아내버리지. 노력하는 사람을, 그런지도 모르고 짓밟아버리는 경향이 있어. (122)

소설이란 밀실에서의 개인 작업으로 태어나고, 완성품만이 사람들 눈앞에 드러나는 상품이다. 누구나 소설가의 내막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틀림없이 뒤에는 은밀한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하다고 독자는 믿고 있다. (263)

목요일이 좋아. 어른의 시간이 흐르고 있으니까. 정성 들여 만든 과자 향기가 나니까. 따뜻한 색상의 스톨을 두르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으면서 말없이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듯한 안도감이 느껴지니까. 목요일이 좋아. 주말에 대한 기대에 찬 예감을 마음 깊이 숨겨두고 있으니까. 그때까지 일어났던 일도, 앞으로 일어날 일도, 죄다 알고 있는 것만 같으니까 좋아.......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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