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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인 마플이 죽었다
수잔 캔들 지음, 이문희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추리 소설 작가 중 누구를 제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다들 어떻게 대답할까? 책 읽는 범위가 의외로 좁아 다른 사람이 어떤 작가를 좋아하고 어떤 책을 읽는지는 오랫동안 내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내가 읽는 책의 카테고리나 작가가 상당히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는 걸 자각한 후 슬슬 다른 사람의 독서습관이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궁금해진 건 '좋아하는 추리 소설 작가'. 리뷰를 쓴 책만 봐도 극명히 드러나는 내 독서 취향은 추리 소설이 50% 소설이 30%, 동화와 만화책이 각각 10% 가량일거다. (물론 만화책을 소설보다 실컷 읽고 있지만 시리즈물을 하나로 쳤을 때) 그만큼 추리 소설을 읽는 비중이 큰데도 내 '독서 역사 : 추리 소설 편'은 그저 코난 도일 - 모리스 르블랑 - 애거서 크리스티 로 나뉠 뿐이다. 중간중간 다른 작가들의 추리 소설을 읽지만 작가 이름으로 찾아가며 읽은 작가는 저 세 작가 뿐이니까.
어릴 적 엄마가 제일 처음으로 사준 전집이 홈즈 / 뤼팽 전집 이었던 관계로 내가 제일 처음으로 접한 추리 소설은 당연히 홈즈와 뤼팽 시리즈였다. 전집은 어쩐지 1권부터 읽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차근차근 읽었던 기억이 선명한 그 전집은 시리즈의 앞 부분은 뤼팽이고 뒷 부분은 홈즈였다. 뤼팽의 괴도지만 은근한 남자다움과 인간다움에 감정이 끌렸다면 홈즈의 날카로운 추리와 완벽함은 슬슬 발달하려는 내 이성의 롤모델이었다. (하지만 결국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초등학교까지만 해도 홈즈와 뤼팽에 홀딱 반해 있었던 내 추리 소설 정신계에 큰 변화가 왔다. 중학생이 되고나서 견문(?) 넓히고자 홈즈와 뤼팽의 뒤를 이을 추리 소설 시리즈를 찾다보니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애거서 크리스티'를 추천해 주었다. 그 당시엔 (지금은 검정 책등으로 나오고 있는) 해문 출판사의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이 문고판처럼 작(지만 가볍지는 않)게 나와 있었는데 총 80권이나 되는 길고 긴 전집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내 책 수집의 시작이었던 것도 같다. 한 푼, 두 푼 모아서 산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은 확실히 그 노력의 보상이 되었다.
신선한 발상과 트릭, 거기에 뤼팽의 인간미 넘치는 매력이 빛나는 뤼팽 시리즈, 정교한 트릭과 홈즈의 신들린 추리력, 왓슨의 어딘가 어리숙하지만 따뜻한 성품이 매력적인 홈즈 시리즈와 달리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는 주인공이 여러 명(미스 마플, 에르큘 포와르, 부부탐정 등)인데다 어딘가 로맨스 소설적인 분위기의 설명, 다양한 배경 등등 견문 넓히기에는 최적의 추리 소설이었다.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분명 남들은 전혀 관심없을 내 추리 소설 변동기를 써내려가는 이유는 사실 별거 없다. <그리고 제인 마플이 죽었다>에서 애거서 크리스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녀의 드라마틱한 소설 같이 드라마틱한 삶의 부분을 안고 살았다. (혹시 궁금하신 분들은 위해 http://ko.wikipedia.org/wiki/%EC%95%A0%EA%B1%B0%EC%84%9C_%ED%81%AC%EB%A6%AC%EC%8A%A4%ED%8B%B0)알만한 분들은 다 아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종 사건'은 아직도 '진실'이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라고 해도 총 80권의 책들을 읽어내려가기 바빴던 나는 정작 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생애나 실종사건, 기억상실증에는 그리 큰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 <그리고 제인 마플이 죽었다>는 소설이라는 허구 속에서 남을 이해한다는 '간접 경험'이 잘 살아있다. '작가'로서만 생각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인간'으로서의 감정, 상황, 결단을 다시 한 번 (그것이 반드시 진실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살펴보는 계기가 됐달까.
쎄쎄는 크리스티타운이라는 테마도시의 이벤트를 총괄하는 업무를 맡은 아마추어 추리소설 작가다. 사랑하는 애인과는 결혼을 결정해야 하고 출판하고자 한 크리스티 자서전은 편집자의 은근한 협박에 유보되고 있지만 크리스티타운의 첫 개장날 개최될 추리 연극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쎄쎄에게 난데없이 '미스 마플'역의 배우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최후의 수단으로 스스로 '미스 마플' 역에 도전하는 쎄쎄. 그걸로 그 날의 모든 불행한 사건이 끝날 줄 알았는데...
일단, 스토리를 얘기하기 전에 주인공 이름이 '쎄쎄'라 처음 이름이 나왔을 때 나는 외국에서 이탈리아 인사 '챠오'를 쓰듯 중국어로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는 줄 알았다. 역시나 이름치에 빛나는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제인 마플이 죽었다>는 추리소설로도 애정소설로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불행히도 아마추어 추리소설 작가 쎄쎄는 회색 뇌세포의 에르큘 포와르만큼 사건을 원활하게 풀어나가진 못하지만 그의 회색 뇌세포를 커버할 수 있는 주변 인물(특히 내가 좋아하는 도트 부인)와의 관계를 재치있고 스릴있게 그려나가 결국엔 올바른 '진실'조각을 찾아낸다. 거기다 현재 애인과의 애정 전선, 어쩔수 없이 마주한 전 남편과 그의 약혼녀 사이의 감정 소모, 알던 사람이 죽었다는 상실감이 뒤섞여 매우 독특하고 복잡한 상황을 만든다.
그래도 이 책의 가장 근본적인 '맛'은 수잔 캔들이 사실에 입각해 재구성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종사건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감정과 쎄쎄의 내적상황이 교묘하게 어우러져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이 이야기는 쎄쎄가 증거가 아니라 사람의, 자신의, 애거서 크리스티의 감정을 이해하면서 풀리기 시작한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일보다 더 큰 축복이 되는 다른 일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쓰고, 믿은 그 말. 사랑 덕분에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는 기쁘다.
추리소설에 애정소설은 언제나 최고의 궁합인 듯 하다. 사랑과 돈은 추리소설 최고의 동기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리고 제인 마플이 죽었다>는 재미있고 읽기 쉬운, 추리소설이었다. 이런 책이라면 추리소설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분들도 읽기 쉬울 것 같으니 오랜만에 동생에게 추리소설을 권해봐야겠다.
-책을 덮었다. 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원한 건 현실에서의 도피였지 현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다시 책을 폈다. 범인이 누군지 알아야 했다. (98)
-사람들이란 언제나 우리를 시험하려 든다. 과연 우리를 어디까지 몰아갈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한다. (135)
-난 '나의 가장 행복한 주말'이란 코너의 중독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큰 이유는 사람의 행복한 주말이 천편일률적으로 모두 똑같다는 게 신기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174)
-범죄는 무섭도록 계시적이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행위는 정신을 고스란히 노출시킨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어 그 사람이 숨을 쉬게 하는 것이 무엇이며 또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오직 그만의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일은 정말이지 매력적이다. (260)
-해가 지도록 그곳에 앉아 생각했다.
내가 기억하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
내가 잊어버리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난 스스로 기억상실증에 빠진 거였구나.
애거서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290)
-한 사람을 사랑하고 한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일보다 더 큰 축복이 되는 다른 일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