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거미 클럽 동서 미스터리 북스 92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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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책을 집어들면 제일 먼저 머리글을 읽고 다음으로는 후기를 읽는다. 상상력 넘치는 소설도 좋지만 그 작가나 작품을 번역한 역자의 머리글이나 후기는 더더욱 재밌다. 굳이 따지자면 메인 요리 전의 에피타이저 같은 느낌이랄까. 과연 어떤 소설일지 기대하고 작가와 역자의 글을 읽어내려가는 그 두근거림이란!

 

소설 속에 숨어있는 작가가 전면으로 드러나는 글이기 때문에 작가의 재기넘치는 면을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어 더더욱 좋다. 그런 의미에서 이 <흑거미 클럽>은 정말이지 서비스가 풍성한 책이다!

 

자칭 '허물없는' 아이작 아시모프는 친절하게도 독자들의 예상질문을 뽑아 길고 재미난 머리글을 써주었으며 심지어는 단편마다 꼬리글을 달아 단편의 헛헛함을 아낌없이 채워주었다. (내가 단편을 '헛헛'하게 여긴다는 것은 아니다. 난 단편도 무척 좋아하지만 너무 빨리 끝나는 게 가끔은 아쉽다.)

이 허물없는 아이작 아시모프씨는 SF계의 거물이닌가? 하며 의심스럽게 집어든 책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아무리 내가 복잡하게 여기는 SF라도 볼 수 밖에 없겠다. SF계와 추리계를 넘나드는 작가라니 너무 천재적인 거 아닐까. 재능이 부럽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재능도 재능이지만 관심사가 정말이지 광범위하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이지 잘 떠드는 회원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지식들을 살펴보다가. 옛말에 한 우물만 파라고 했는데 아이작 아시모프를 보니 또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현대는 역시 정보화 사회구나, 하고 쓸데없는 감탄사를 내뱉어 보았다. 나로서는 따라가기도 벅찰 정도지만 아이작 아시모프는 분명 자신이 좋아서 하고 있겠지 싶어서 또 한 번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졌다.

 

어김없이 학교생활에 쫓기다보니 저절로 추리소설(그것도 자극적인 제목)에 손이가게 된다. 도서관에서 책장들 사이를 걸어가다 군데군데 숨어있는 추리소설을 한아름 집어들어 뒤뚱뒤뚱 대출대로 걸어가는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웃기지만 책가방이 묵직할 수록 (아직 읽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마음이 행복해진다.

 

<흑거미 클럽>은 사실대로 말하자면, 일종의 '골드 디거(돈을 노리고 남자에게 접근하는 여자)' 살인사건 같은건가~ 하며 집어들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작가에 잠깐 살펴보니 여자라곤 전혀 나오지 않는(!) 독특한 추리소설이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화요일 클럽의 살인>같이 매달 (대부분) 같은 멤버가 모여 사건을 실어나르고 어느 한 사람이 그 사건을 명쾌하게 풀어나간다-는게 표면적인 구성이지만, 이 <흑거미 클럽>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꼬리말 뿐만이 아니라)

 

<화요일 클럽의 살인>에서는 미스 마플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내 관심사는 온통 미스 마플에게 쏠려 있었다. 하지만 이 <흑거미 클럽>은 회원 모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 하나 정이 안 가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의 묘미는 사실 헨리(그 모든 사건을 명쾌하게 풀어나가는 급사)가 사건을 해결하기 전 회원들 사이에 오가는 온갖 추리와 설명, 주장들이다. 온갖 전문직업군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라 그런지 셰익스피어에 성경에 수학,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등 다양한 주제와 더 다양한 해석이 책 속을 날아다닌다.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추리에 할애되는 시간보다 회원들의 추리(라고 주장하는 전문지식들)에 할애되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다. 그래서 이 책은 각각 관점이나 지식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를 언뜻 비춰주는 작품이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난 어쩐지 헨리에게 정이 안 간다. 도대체 왜 일까-하고 혼자 고민해 봐도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그냥 '너무나도 정직한' 헨리가 무의식중에 꺼림칙한 것 같다. 하늘에 맹세할 필요도 없이 난 항상 정직하지만은 않은 사람이라서. 항상 정직하고 저렇게 척척 추리를 해내다니 잘난척쟁이 홈즈보다 더 완벽주의다. 요새는 인간적인 캐릭터가 각광받는 시대라고! 하고 소리쳐주고 싶지만 후기를 읽어보니 아이작 아시모프씨는 (당연히) 헨리를 엄청 좋아하는 듯 하다... 할 수 없이 회원들에게 못다한 내 정을 쏟을 수 밖에...

 

나 역시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안락의자 탐정(한 군데에서 사건을 듣고 해결하는 탐정)파이기 때문에 이런 류의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라 이 너무 똑똑하고 사이좋은 회원들이 다시 모여 손님을 초대하고 (정직한)헨리의 시중을 받고 음식을 먹으며 고급 지식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모르실 겁니다. 여러분은 문외한이시니까요. 여러분이 아시는 거라곤 소설에서 읽은 것뿐일 겁니다. 그러므로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연달아 생각을 해내어 어떤 사건이든지 반드시 척척 풀어낸다고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는 이래봬도 탐정 축에 끼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지막으로 남겨진 오직 하나의 방법이란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37)

 

-샌드 씨는 거짓말이란 자기방어 본능이나 또는 사회적 관습에 사로잡힌 결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방어 본능이나 사회적 관습을 모두 덮어놓고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말이 나쁘다고 한다면, 우리 대신 진짜에게 거짓말을 시켜야 하니까요. (86)

 

-누구에게나 극적인 것이 진실이기를 바랄 때가 있으니까. 모두들 별에게 소원을 빌고 싶어하지.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니고 싶어하며 여자로부터 덮어놓고 환영받고 싶어하네...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척해도 마음 속 어딘가에는 그런 것을 믿으려는 부분이 있다네.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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