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사냥꾼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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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었다. 단지...역시 내 청개구리 기질 때문에 읽을 마음이 별로 없었달까. <모방범>은 좀 흥미가 갔지만 도서관에 가보면 항상 3권 중 한 권이 사라져 있어서 다음을 기약하곤 했다. <쓸쓸한 사냥꾼>을 빌린 건, 실은 내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랄까. 요즘 텐션이 현저히 낮아져(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너무 감정적이 되었다는 거. 뭐 안 좋은 소식도 많았고.)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책을 구경하는 건 좋았지만 막상 책을 뽑아들고 집에 돌아오면 어쩐지 손이 가지 않아 반납할 때까지 멀뚱멀뚱 표지만 바라보는 일이 다반사다.

 

그리고, 그럴 때는 (개인적인 취향으로) 추리소설이 최고다-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미드를 고르는 기준의 첫번째도 수사물인지 아닌지,로 판단할 정도로 나는 수사물, 추리물이라면 사죽을 못 썼다. 딱히 추리에 소질이 있거나 눈치가 빨라 범인을 알아채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신경줄이 약해 스릴러도 잘 못보는 내게 수사물은 내가 체험할 수 있는 스릴의 최대치인 셈이다.

 

역시나 모방범 세트가 없길래 되는대로 책을 뽑아들고 대출해왔다. 그리고 또 방바닥에 팽개쳐두길 일주일. 주말에 뒹굴거리다 보니 손에 닿아 읽기 시작했는데, 어...이 책, 재밌다. 오오, 역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는 다르구나, 약간 반성섞인 감탄으로 일단 작가를 칭찬해본다.

 

책 표지는 펼쳐진 책 위에 피 묻은 흉기가 놓여있는, 어찌보면 자극적인 그림이지만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듯한 터치 때문인지 너무 수사물에 무뎌진 내 감각 때문인지 거부감은 들지 않는다. 그보다는 책 속에 그려진 서점이 책 속의 '다나베 서점'인지 궁금하다. (그림 속의 간판은 한자에 뭉개져 있어 잘 모르겠다)저런 책방이 동네에 있으면 좋을텐데.

 

실은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던 건, '다나베 서점'과 이와 할아버지가 우리 동네에 있었음 좋겠다-였다. 책을 좋아하지만 엉덩이가 무거워 요새는 서점에서 책을 사기 보다는 도서관에서 빌려본 좋은 책을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곤 하는 내게 헌책방이라는 건 어쩐지 아련하고 색다른,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다. 거기에 '이와 씨'처럼 현명한 할아버지가 주인이라면, 덧붙여 손자와의 만담도 볼 수 있다면 안 가는 게 손해가 되겠지. 어쩌면 이와 씨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으으.. 정말이라면 좋을텐데.

 

<쓸쓸한 사냥꾼>속 단편은 총 6편으로 이어진 듯 따로 전개되는 옴니버스 식이다. 주 무대는 '다나베 서점', 주인공은 현명하고 관찰력 좋은 이와 씨와 그런 이와 씨를 잘 따르는 손자, 미노루다. 서점이라는, 어찌보면 소음과도 거리가 멀 듯한 장소와 관련해 어쩜 그렇게 사건들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말하자면 서점이 아니라 '이와 씨'가 사건에 말려드는 거지만.

 

단편들이라 그런지 아니면 작가의 성향이 그런지 모든 단편들은 아주 무섭다거나 잔인하다기 보다는 평범한 일상을 그린 듯한 터치로 이어진다. 특히 할아버지와 손자, 라는 흔히 친하게 지내고 자주 다니기 힘든 조합이 작품들을 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서점에서의 일과, 손자와의 사이에 집중하다보니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도 가볍게 읽을 수 있을 법하다.

 

내가 가장 맘에 든 작품은 <말없이 죽다>다. 살인사건이 나오기는 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상을 소원했던 아들이 훔쳐본다, 라는 설정은 잔잔하면서도 흥미로웠다. 그 아버지가 귀여우시기도 했고. 가만보면, 미스테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힌 수백권의 책들처럼. 그리고 미야베 미유키는 그런 미스테리를 솜씨좋게 건져내 글을 엮어간다.

 

글쎄, 다른 책들은 아직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확실히 <쓸쓸한 사냥꾼>은 내 취향이었다. 내 청개구리 기질을 잠시 치워두고 다른 작품들도 찾아봐야겠다.

 

 

-남이 땀 흘려 창작한 것에는 다들 경의를 표해야 마땅한 것이며, 책도 그 가운데 하나로 여길 뿐이다. (13)

 

-그런 생각이 들자 몸이 떨렸다. 미치야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따분한 인생을 보낸 사람에게도 그런 패기가 있었다-. (95)

 

-태어나면서부터 패배자로, 언제나 관중석에서 구경이나 할 인간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믿을 수 있다. 그런 믿음이 생기면 나도 달릴 수 있다-. (96)

 

-기껏해야 한 편의 소설이다. 꾸며낸 이야기다. 그런데도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아가씨의 한마디가 유키코를 뒤흔들었다. 유키코가 갇혀 있던, 어떤 의미에서는 안이한 생각 속으로 번개처럼 헤집고 들어왔다. (209)

 

-우리는 모두 쓸쓸한 사냥꾼이다. 돌아갈 집도 없이, 거친 들판에 내던져진 외톨이다. 이따금 휘파람을 불어도 대답하는 것은 바람소리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사람의 따스한 온기를 그리워한다.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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