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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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난히 고유명사에 약한 편이다. 사람 이름부터 시작해서 지명, 나라 이름 등등 그저 고유명사기만 하면 내 머리속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지 어느 순간 까맣게 잊혀지곤 한다. 익숙(해야)할 우리나라 지명도 그런데, 다른 나라 지명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펴들고 읽기 시작했을 때 후쿠오카, 사가, 세후리 등등 지명 이름이 나오자 순식간에 집중력이 떨어져 버렸다. 불행히도 지명에만 약한 게 아니리 지리에도 약한 나는 지명으로 점철된 설명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머리 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그 곳이 어떤 장소인지 파악하길 포기했다. 사실 장소가 아무렴 어떠냐,는 얄팍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만.

후아, 다 읽었더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속이 갑갑했다. 도대체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깜깜했다. 이게 동정인지 누군가를 향한 경멸인지. 그것도 아니면 동질감인지. 내가 어렸을 적의 악당은 별다른 이유없이 그냥 나쁜 놈이었다. 사람을 업신여기고 미워하고 죽이는 '순수'한 나쁜 놈. 그런 악당들을 미워하는 데에는 아무런 고민도 이견도 없었다. 하지만 뭐랄까, 악당들이 점차 '인간적'으로 변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애초에 난 내가 착하다고 생각할만큼 뻔뻔하지 않아서 어느 정도는 악당 쪽에 호감을 주고 있었는데 '악당'들이 이유와 생활을 갖기 시작하자 선과 악의 이분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렴풋이 이 세상에 사실은 선과 악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론으로 알기 시작했지만,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경험이 모자란 듯 싶다. 난 아직도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곤 하니까.

그런 면에서 나에게 이 소설은 도통 '구분'할 수 없는 책이다. 착한 사람인 듯 하면 아닌 것 같고, 나쁜 놈인가 하면 그저 어리석을 뿐이고. 난 딱히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걸 믿는 편은 아니지만, 사람은 알고보면 다 착한 면이 있는 건 확실하다. 다만 그게 겉으로 드러나 있는지, 아니면 다른 성격에 묻혀있는지가 다를 뿐. 이 책은 그걸 노골적으로 펼쳐보여준다.

난 사실 처음 책을 읽을 때 '요시노'라는 여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 퉁명스럽게 구는 거야 남말할 처지가 아니지만 친구들에게 부리는 허세나 만남 싸이트 같은 일들을 보면 아무래도 난 요시노를 좋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으면, 요시노가 좋아지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감정이 누그러지는 걸 느낀다. 그건 아무래도 내가 요시노에게서 발견한 작은 동질감 한 조각과,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에 공감했기 때문일 거다.

요시노의 허세는 자신의 말을 액면 그대로, 즉 순수하게 믿어주는 마코 앞에서 빛이 난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허세를 부리는 사리 앞에서의 요시노는 어딘가 초조해 보인다. 그건 아마도 사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순진한 마코 앞에서보다 더 확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지. 정도야 다르지만 좀 더 잘나보이고 싶어서 작은 허세를 부린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불쌍한 요시노. 요시노는 좀 더 나이가 들어 자신의 어린 날을 부끄러워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내가 요시노에게 이런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는 건, 요시노의 아버지, 요시오의 행동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 책의 인물 중에서 마스오가 제일 '악당'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가 저지른 '범죄'는 없지만 그는 여자를 한 밤의 산 중턱에 버리고 와도 죄책감을 갖지 않고 단지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기는 커녕 오히려 남들에게 우쭐해서 자랑하고 가볍게 떠벌리는 멍청이 이기도 하다. 그런 마스오의 앞에서 요시오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지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기껏해야 내가 느끼는 감정에서 퍼올린 단면이라 난 실제 그런 상황에서 겪을 가슴의 고통을 잘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런 어리석은 사람의 앞에서 충동적으로라도 아무 일을 저지르지 않은 요시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런 놈 때문에 아저씨 인생까지 망칠 것 없어요, 라는 심정이었달까.

이 책의 인물 중 철저히 '피해자'인 요시노의 부모들과 달리 유이치라는 존재는 독특하다. 그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물론 실제 삶 속에서 어느 누구 하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유이치는 다른 사람을 극단적으로 배려하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버림받았던 그에게 자신의 욕구는 극히 미미하며 한정된 분야에 국한되어 있다. 그런 그에게도 감정이 있었다. 타오르는 분노와 사랑이. 어찌보면 유이치는 늘 사랑을 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해. 처음부터 끝까지, 아직도 버림받았던 어린아이처럼 우물쭈물 누군가를 기다리는 유이치를 보며 동정심이 일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요시노는 어떡해. 이미 죽어버린 요시노와 자식을 먼저 보낸 요시오는 어떡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진실을 굴곡없이 알린다는 게 이렇게 힘들까. 사람을 100% 있는 그대로 대하면 진심이 전해질까. 자문해봐도 아니라는 답을 내놓는 내 자신이 슬프다.

끝내 유이치의 진심을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난 다른 무엇보다도 그게 서글프고 가여워서 끝내 마음이 무겁다.

-이제는 시간이 흘렀다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것은 배신한 쪽의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걸 미호는 새삼 깨달았다. (157)

-그러나 진실을 진실로 전달하는 게 이렇게도 힘든 일인지는 몰랐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거짓말을 지어내는 게 훨씬 편할 것 같다고 하야시는 생각했다. (165)

-세상에서 하는 말이 맞는 거죠? 그 사람은 악인이었던 거죠? 그런 악인을, 저 혼자 들떠서 좋아했던 것뿐이죠. 네? 그런 거죠? (475)

-그랬더니 그 사람,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지만 양쪽 다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니까"라고 하더라고요. (466)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비웃는 마스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스오의 이야기를 듣고 웃는 두 젊은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요시노를 비방 중상하는 편지를 보내는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요시노를 행실이 나쁜 여자로 치부해버리는 와이드쇼의 해설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450)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잃을게 없으면 갖고 싶은 것도 없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 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 되는데 말이야. (448)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의 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밑변의 돌 한 개가 없어지는 거로구나 하는. (439)

-그렇지만, 그래도 아버님이 어떻게든 마스오에게 항변해주길 바랐습니다. 침묵한 채 지지 않길 바랐습니다. (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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