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홍신 엘리트 북스 64
에밀 졸라 지음 / 홍신문화사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책읽기는 내 오랜 취미다.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스스로 만족할 만큼은 읽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읽어온 책들 중에서 '인생을 바꾼 책'을 꼽는 일은, 아마 내게는 무리인 듯 싶다. 분명 내 삶은 내가 읽은 것들에서도 영향을 받았을테지만 인생이 바뀌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책은 아직 없는 듯 하다. 하지만, '인생을 바꾼 책'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 순간적으로 떠오른 책이 있었다. 에밀졸라의 <나나>.

내가 <나나>를 읽은 건, 아직 내가 어렸던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해 졸업 전에 학교 도서관은 정복하자, 는 순진한 야망을 가지고 부지런히 책을 빌려다 읽었던 그 시절, <나나>라는 제목은 보자마자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직 난 어렸던 소녀였고 책을 고르거나 분류하는 기준이라고는 홈즈와 뤼팽이 나오던 추리소설과 그 외의 것이 다였다. 분명 명작 코너에 있으니 읽어도 괜찮은 책일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학교 도서관이었으니 모든 책이 재미있고 즐거우며 아름다울 거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게 꽤나 순진한 생각이며, <나나>는 어찌되었든 명작이라는 걸 알지만, 그 때는 그 <나나>가 읽고 싶어 마냥 들떴다. 어쩐지 이국적인 이름, 보송보송한 병아리가 생각나는 이름, <나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나나>를 그 어렸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다시 펼친 적이 없다. 더이상 <나나>라는 제목에 가슴이 설레지도 않거니와, 어린시절의 감상을 다시 되살리고픈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뜻밖이었다. 십여년을 잊고 살았던 책이 문득 생각났다는 게.

나나의 줄거리는, 간단히 말하자면 물욕이란 얼마나 허망한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짚어보면, 나나는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외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여인이다. 세상의 도덕적 잣대는 스스로의 아름다움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팜므파탈. 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녀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쓸슬히 세상을 뜬다. 이렇게 줄이고 보니 그저 그런 소설같지만, 아마 지금, 이렇게 다 커서도 <나나>를 읽으면 여전히 혼란스러울 것 같다.

책을 대출해 집에 돌아와 펼쳐들었다. 그리고 난 끝내 그 책을 놓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책장을 넘겼다. 내가 자야할 시간은 이미 넘은 시각이었다. 내가 누워있던 침대에서 고개를 들면 흰 나무문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는 동생이 잠에 빠져 뒤척이고 있었다. 문 너머의 안방에서 엄마가 TV를 보시는지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가가 시큰하고 숨이 막혔지만 내가 과연 울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숨을 토해내며 눈물이 흘렀다. 평소에 우는 걸 굉장히 싫어하던 나였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르니까. 굳이 말하자면 내가 느낀 것은 답답함이었다. 아름다운 나나. 사랑스러운 나나. 파멸의 나나. 그리고 결국 죽어버린 나나. 내가 나나에게 동정심을 느꼈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명치가 콱 막히는 감정이 그저 동정심이었을까. 물론 어린 나이에 나나의 '비도덕적'인 일상은 충격적이었다.

아마 <나나>는 내가 최초로 접한 순수문학이 아니었을가 싶다. 그 전 내 취향은 추리소설이었으니까. 잘못을 한 사람이 결국에는 벌을 받는, 정직한 이야기.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랑스러운 동화들까지. 그런 내가 <나나>를 읽은 건 어린 아이가 순식간에 어른이 되어버린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나나>는 날 밤새 잠도 못자며 생각하게 한 최초의 책이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나는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성격이었던 것 같다. 동그란 눈을 굴리며 어른들을 올려다보는 영약하지만 천진한 어린아이랄까. 나나에게 '도덕'은 의미가 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중요할 뿐. 모든 걸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에 다른 이들도 나나에겐 중요치 않다. 이기적이고 잔인한 어린아이. 그리고 그런 나나에게 남자들은 끝없이 매료된다. 사랑이란 이름아래 나나를 부르짖지만 과연 그게 사랑일까. 결국 그 사람들도 가지고 싶은 걸 위해서 모든 걸 던지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달착지근한 말과 사랑스런 외모 속에 숨어있는 어린아이들. 내가 이 책의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느꼈다면, 그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욕심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 이렇게 <나나>를 떠올려 보아도, 다시 읽어볼 마음은 들지 않는다. 아마 나는, 내 어린 시절과 같이 <나나>를, 그 겁없는 아이들을 추억으로만 남겨두고픈 모양이다. 어쩌면 그 편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고 조금 커버린 내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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