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모 ㅣ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로 시작하는 <모모>라는 노래가 있다. 내 나이 또래가 알기에는 철지난 노래지만, 난 어쩐지 책 <모모>를 볼 때마다 머리 한구석에서 이 노래가 울리곤 한다. 사실 노래 제목이 같을 뿐 <자기 앞의 생>이라는 다른 소설에 기반을 두고 있는 노래지만, 어렸을 적 내가 처음 책 <모모>를 읽었을 때 엄마가 불러주신 노래였기에 내게는 모모의 주제가와도 같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 댁의 책장은 보물 상자 같았다. 책을 좋아하셨던 엄마가 학창시절 용돈을 모아 사셨다던 누런 종이의 책들이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구석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숨을 들이쉬면 낡아가는 종이의 냄새가 피어올랐고 나는 무작정 책을 꺼내 읽고는 했다.
<모모>는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얇은 문고판 책 사이에서 유난히 두꺼운 책이 있어 뽑았던 책은 누군가가 정성스레 표지를 싸놓아서 제목을 알 수 없었지만 내용만큼은 따뜻하고 꿈을 꾸는 것 같이 재미있었다.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꼬마 친구 모모는 어느 날부터인가 다정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예전의 여유와 정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친구들을 일일이 방문한다. 이런 모모의 행동은 사람들 사이에 몰래 숨어들어 시간을 훔치고 있던 회색 신사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모모 때문에 사람들이 다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모를 처리하기로 하지만 이것을 미리 알아챈 시간 관리자, 호라 박사는 정확히 반시간 앞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거북이, 카시오페아를 보내 모모를 돕는다. 호라 박사의 도움과 모모의 용기로 결국 회색 신사들은 사라지고 모두에겐 훔친 시간이 돌아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나날을 맞는다.
<모모>는 재미있는 책이다. 내가 어린 아이였을 때에는 시간 꽃의 아름다움과 신비한 거북이 카시오페아가 너무 좋아서 몇 번을 다시 읽었고, 지금은 이미 회색 신사들에게 넘어가버린 듯 바쁜 하루 속에서 모모에게 위안을 받고 있다. 예쁜 꼬마, 모모. 표지 속의 모모는 그녀의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어 통통해 보이지만, 내 상상 속의 모모는 까만 동그란 눈이 반짝거리고 부스스한 검은 고수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작고 사랑스런 아이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작은 아이가 열심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선물을 받은 느낌이 들테니.
내가 모모를 동경해서 사랑했다면, 회색신사들은 미워서 가여운 존재였다. 남의 시간을 훔쳐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 인간들의 권태와 죽은 시간이 어우러진 그들은 마지막까지 어리석었다. 하지만 역시 <모모>에서 최고로 어리석은 존재는 회색신사들에게 넘어간 어른들이 아닐까. 깔끔한 계산에 넋이 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자신의 시간을 누군가에게 넘겨주는 그 모습은 안쓰럽기도 했고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불행히도 나 역시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 앞에 회색신사가 나타나 이것저것 시간에 대해 떠든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부터 시간낭비를 하지 않겠노라 맹세할지도 모른다. 바로 그게 늘 날 괴롭히던 고민이었으니까.
문득 놀다가도 내가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하고 한기가 들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 혼자 뒤쳐진 느낌이 들어서. 바로 이럴 때 모모가 나타나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니야, 네 시간을 꽃을 아름답게 지키고 있는 거지, 라고 말해준다면 나는 안도감에 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난 잘하고 있다고 믿으며 나 자신만의 하루를 만들어 가겠지. 현실세계에 모모가 실재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책만 펴면 모모를 만날 수 있으니까. 꼬마 모모를 만나 다시 한 번 마음에 여유를 찾는다면 바쁜 하루에 책 읽는 시간이 대수일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모모>를 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