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의 비밀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백설자 옮김 / 현암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펄펄 살아있는 인형들이야." 18p

사실 읽은 지 꽤 되는 책이라 메모와 내 기억력만 가지고 리뷰를 쓰려니 굉장히 두렵다. 가뜩이나 온갖 비밀스런 의미들이 넘쳐나는 이 책이 올바르게 소개되지 않을까봐.

소피의 세계에서 나를 반쯤 기절시켰던(중학생? 고등학생? 아무튼 그 시절의 나에겐 너무나도 졸려운 책이었다) 요슈타인 가아더가 쓴 이 책은, 소피의 세계를 읽기 전부터 날 매료시켰던 책들 중 하나였다. 불행히도 내 안타까운 기억력 덕에 한동안 제목도 작가도 모른 채 끙끙 앓았지만, 책을 찾을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그 때에도 책의 내용들은 내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아빠와 함께 아테네, 혹은 그리스 어딘가에 있을 엄마를 찾아 떠나는 소년, 한스 토마스가 여행을 하며 겪은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독특한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서인지 나름 침착하고 생각이 많은 한스 토마스를 찬찬히 따라간다. 책에서 한스 토마스의 아빠는 종종 "한스 토마스야,"라고 풀네임을 불르는데 어쩐지 그 느낌이 좋아서 입에 착 달라붙는 것 같다. 실제로 우리 아빠가 내 이름을 성까지 붙여 부르면 좀 무섭겠지만...(뭔가 찔리고 있음)

소피의 세계, 마법의 도서관에서도 날 미소짓게 했던 요슈타인 가아더 작품의 세심함은 여전하다. "카드의 비밀" 제목 답게 책에서는 카드가 실컷 나온다. 특히 조커가 제일 중요한 카드로 비춰지는데, 처음에는 머리가 좀 아프지만 읽다보면 조커에 어쩐지 정이 가는게 또 묘하다.

이 책의 소제목은 글귀가 아니라 각 카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에이스, 다이아몬드 2 등등... 그 순서 또한 나름 의미가 있으니 책을 읽으며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엄마를 찾으러 아빠와 둘이 떠나는 여행이라 책의 반이상은 아빠와 한스 토마스의 대화나 마찬가지다. 한스 토마스 생각에 의하면 국가에서 연구비를 받아도 될만큼 철학자같은 아버지와, 여행 중 겪는 신비한 일을 통해 점점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한스 토마스의 대화는 이게 과연 정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인가 싶을 정도로 철학적이다. 읽으며 잠깐, 이래서 엄마가 떠난 건가, 하고 실없는 생각도 해봤다.

한스 토마스의 아빠는, 소위 사생아라고 하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다. 적군과 사랑에 빠진 할머니는 그 군인이 떠난 후에 한스 토마스의 아빠를 낳아 길렀다. 아빠에게는 카드의 조커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데 한스 토마스는 이런 과거 덕에 아빠는 스스로를 '조커'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를 찾기 위해 집을 나간 엄마를, 되찾아 오기 위해 아버지와 길을 떠나는 한스 토마스는 주유소에서 만난 난쟁이가 준 돋보기로, 어느 한적한 산골마을의 빵집 할아버지가 빵에 넣어 건네준 꼬마책을 읽으며 점점 이상한 일을 겪는다. 책속의 책, 액자식 구성으로 펼쳐진 꼬마책은, 동화스럽다못해 환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바다를 표류하던 남자가 내리게 된 섬에서 그는 '카드'들을 만나게 된다.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를 해대는 카드들의 틈바구니 속에 홀로 살아가던 한 할아버지와 만나게된 그는 그 할아버지가 실은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카드'들이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자신의 상상력이 낳은 산물이라는 것을 털어놓는다. 상상물의 산물인 카드들은 그 사실을 아는 것을 무의식중에 거부하고 있었지만, 오직 조커만이 그것을 눈치채고 카드들에게 폭로할 마음을 먹는다. 카드들의 축제에서 각자 준비한 글귀로 이야기를 만드는 '의식'에서 모든 진실이 꿰맞치고, 카드들은 자신들이 피조물이라는 걸 알고 동요한다. 그 와중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는 조커와 함께 섬을 급히 빠져나왔다. 꼬마책을 읽고 있던 한스 토마스는 꼬마책의 내용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과 맞물리는 '실제'이야기라는 걸 알고 꼬마책을 넘겨줬던 할아버지가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테네에서 엄마와 만난 아빠와 한스 토마스는 사이좋게 가족으로 돌아와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역시나 요약에는 자신이 없는 나; 무슨 이야기인지 영 모를 정도로 써놓았지만, 실제로 읽으면 그 구성이 치밀하고 흥미진진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난 무엇보다 작가의 상상력에 새삼 감탄했다. 꼬마책에 나오는 카드 달력은 정말로 기발했다! 정신없이 읽던 내게는 좀 복잡해 세세한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너무 기발해서 나도 한 번 써먹어 봐야겠다, 싶을 정도였다. 거기다 꼬마책과 한스 토마스의 세계를 능숙하게 넘나들며 여러 가지 힌트들을 뿌려놓아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에서 조커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슨 저주라도 받은 것 처럼;; 한스 토마스의 집안은 대대로 '조커'였다. 어느 곳 한 곳에 가족과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야만 했던, 그리고 버려져야만, 아니 남겨져야만 했던. 따지고 보면 어느 누구 하나 잘못한 게 없는데도. 조커는 어디까지나 자유롭다. 카드에는 4가지 소속이 있지만 조커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덕분에 자유를 얻었지만 소속감이 없다. 조커가 자유를 느끼기 위해선 고독이 필요한 것이다. 한스 토마스는 집안의 가장 어린 조커였지만, 모든 조커의 대를 마무리 지었다. 직접 엄마를 찾으러 나가 되찾아왔고, 아빠마저 믿지 않았던 꼬마책을 온전히 믿음으로써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아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조커가 있을 것이다. 자유와 고독, 양면의 동전같은 존재가.

+철학적인 분위기를 좋아하시는 분
+소피의 세계를 재미있게 읽으신 분
+요슈타인 가아더가 좋으신 분
+세상을 독특하게 바라보고 싶으신 분

http://niarain.tistory.com2009-05-28T15:20:24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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