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강 밤배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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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허니문이었던걸로 기억된다. 친구의 어깨 너머로 훔쳐보던 책에 2년 후에나 흥미를 느껴 본격적으로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작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사실 그 전 까지는 일본 문학이라고 해봤자 일본적이지도 한국적이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무라카미 하루키밖에 몰랐으니 내가 일본문학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도 웃긴 일이겠지만, 내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읽고 느낀 건 우스으리만치 처연한 정적인 감동이었다. 허니문과 키친을 거쳐 하드보일드 하드 럭와 도마뱀를 지나 하얀 강 밤배. 다른 책들도 더 있지만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자주 꺼내드는 책은 하얀 강 밤배다.

민음사의 하얀 강 밤배는 차분한 분홍색의 바탕에 흰 제목이 깔끔한 책 표지를 가지고 있어 표지만 바라보고 있어도 진정이 되는 느낌이 든다. 내용은 더더욱 조용하다. 제목조차 하얀 강 밤배. 조용하고 아스라히 퍼지는 달빛, 반짝이는 강물과 새하얗고 작은 배가 떠오르는 제목이, 나는 마음에 꼭 들었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마음의 적어도 십분의 일은 책 자체의 제본에 있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다. 물론 내용도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지만.


하얀 강 밤배는 총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일상 속에서 미래를 잃어버려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잠이 든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묘사가 절묘해 아련하다. 첫번째 이야기는 조금 특이한 불륜을 하고 있는 젊은 여자의 늘어나는 수면시간을 통해 세상과 단절된 일상이 잃어버리고 있는 현실감을, 두번째 이야기는 에너지 넘치던 오빠가 죽어버린 뒤 남아있는 사람, 특히 그의 연인이었던 사촌언니의 휴식을 통해 죽어버린 사람 뒤로 남는 그림자의 영향력과 미래를, 세번째 이야기는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싸우다 헤어진 연적의 유령을 만나러간 술을 좋아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보다 강렬했던 순간의 감정의 아련함을 그리고 있다. 물론 이건 내 주관적인 해석이라 다른 사람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의 묘사가 훌륭해 공감하게 될거라는 점은 장담할 수 있다.


하얀 강 밤배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자 휴식상태, 혹은 가사상태에 빠져있다. 현실이 괴로워서 눈을 돌려 몸을 웅크리고 생각을 끊고 조금씩 힘을 비축해 나가듯이.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사실 오히려 조금 부럽기까지 하다. 본인에게는 견디기 힘들어 눈을 돌린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도망치는 순간 도태된다는 걸 알고 있고, 두려워 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언제 맘편히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나갈 수 있을까. 그러니까 하얀 강 밤배의 사람들은 운이 좋았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잃고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거겠지. 그들은 틀어박혀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출구는 어디일까, 라고 느릿느릿하더라도. 옆에서 내밀어주는 손을 의심쩍어하면서도 잡아 결국은 다시 세상에 돌아왔다. 반짝이는 빛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잡을 수 있는 희망이고 미래다.


일상을 조근조근 늘어놓는 묘사에 나도 모르게 나를 떠올리게 하는 문체. 나른하고 몽환적이면서도 평범한 이야기. 조용하고 수수하지만 잡을 수 있는 희망. 하얀 강 밤배, 그야말로 우울할 때의 치료제와도 같은 책 아닐까.

+우울해서 혼자 있고 싶을 때

+혹은 우울해서 누가 도와줬으면 좋겠을 때

+정적인 분위기의 책을 좋아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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