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일 1 - 불멸의 사랑
앤드루 데이비드슨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표지만으로도 매혹적인 책 위의 띠지에 쓰여진 이 찬사에, 그리고 가고일이라는 제목에 그저 무심히 중세의 러브 스토리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가고일이라는 우리 나라에서는 생소한 단어에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어느 영화에서 본 음울한 하늘을 배경으로 한 돌석상뿐이었다. 이상하게도 떠오르는 이미지는 모두 다 어둡고 쓸쓸한 것들이라, 중세라는 가만 두어도 우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그런 이야기겠거니. 유난히 졸렵던 토요일 오후, 책 두권의 무게를 손으로 가늠하며 그저 표지에 시선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책을 받아든 그 날, 시험기간을 공부보다는 스트레스로 지쳐 돌파한 나는 책을 읽으려고 했다기 보다는 자기 전의 무료한 시간을 죽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졸음을 이겨내며 책을 읽기엔 내가 아직 진정한 독서가가 아닌가보다,  스스로를 비죽여 가며. 하지만 좋은 책은 사람을 독서가로 만드는 법이었다! 심봉사가 번쩍 눈 뜨는 것마냥 핏발 선 눈을 뜨고, 침대를 구르듯 내려와 책장을 넘겼다.

 

말도 안 돼. 데뷔작이라니. 정말이지 좌절했다. 뭐든지 많이 하면 늘게 되어 있다. 책을 한 권 두 권 읽다보면 취향에 상관없이 잘쓴 책이 존재한다는 걸 차츰 깨닫게 되고, 어느 책이 그런 책인가 알 수 있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글도 쓰면 쓸수록 느는 법이고. 그런데 이게 데뷔작이란다. 이 톡톡 튀는 언어들 때문에 눈을 뗄 수가 없는 작품이 무려 첫번째 작품이란다. 물론 이 작품을 쓰기 전에 수많은 습작이 있었겠지만 그저 놀랍고 감탄하고 (비교되는 나로 인해) 우울했다.

 

[가고일]은 내 예상을 시원하게 깨부수는 일부터 시작했다. 중세시대를 상상하고 있던 내게 난데없이 눈에 들어오는 마약에, 버번(술)에 차까지. 어? 하는 것도 잠깐 아직 이름도 모르는 주인공의 차가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다. 설마 죽지는 않겠지. 초장부터 마약이 등장하고 이어지는 화상 이야기에, 뒤따르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우울한 어린시절이 줄줄이 흘러나오는데도 독특한 표현력은 마약처럼 읽는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다사다난한 어린시절 덕분인지 천성이 그런 것인지, 주인공은 사람을 끄는 말솜씨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실제로 들으면 친구보다는 적을 더 많이 만들 말투지만 지면상에서는 블랙유머로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하긴, 화상을 입고 누워있는 사람이 사랑스럽게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겠지.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거대한 계획이 아이의 폐를 태워 없애는 거라는 사실을 일곱 살짜리 여자 애에게 말하는 건 몹쓸 생각이라고 믿는다." (52 page)

 

아, 나름 재치있다고 생각한 구절을 옮겨 써보았는데 이야기 밖의 구절은 책 안에서보다는 싱싱함을 잃는구나. 그 재치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라도 꼭 다른 분들께 권해 드려야겠는데?

 

이 작가의 역량이 어느 정도냐 묻는다면, 이 작품 곳곳에 단테의 신곡이 배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고등학교 때 포기하고 또 포기한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고 대답하겠다. 거기다 공감되는 구절은 어찌나 많은지. 일본에 있었던 사람인 만큼, 일본에 대해서도 해박해서 그 친숙함에 순간 놀라고 웃어버렸다. 외국에 갔다와본 나로서는 일본인도 아닌 서양인(캐나다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아시아인의 사정이 어찌나 웃기던지.

 

"서양 나라에서 살면서 겪는 가장 큰 문제는 일본 여자로서도 작은 편인 사유리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종종 아동복 가게에서 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137page)

 

 

사실 이 책은 1,2 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다 각 권의 두께 또한 척 보기에는 만만치 않다. 긴 이야기를 꺼리는 사람이라면 잠시 얼굴을 찌푸릴만도 하다. 하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한다면, 아무리 그런 사람들이라도 책의 두께와 이야기의 길이가 책을 읽는데 전혀 문제가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거라 믿는다. 정말이지 손을 뗄 수가 없으니까.

 

주인공은 인간적으로 결코 완벽해 보이지 않는다. 어렸을 적이야 주인공의 잘못이 아니라 해도 커서는 에로영화계에서 이름을 떨쳤고 술에 마약에 방탕함까지. 거기다 어찌나 말을 얄밉게 하는지. 마음 씀씀이가 나쁜 사람은 아닌데 처음 등장하는 주인공은 화상을 입은 몸뚱이 속에 한없이 가벼운 영혼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수백년간 기다리고 사랑해주고 기억해준 인연이 있다는 것 만으로 한없이 부러운 사람이기도 하다.

이야기 중간에 나오는 단편적인 사랑 이야기들 역시 잊을 수 없을만큼, 전체적인 이야기에 견줄만큼 사랑스럽다. 그렇다, 700년의 사랑이야기가 매혹적이고 흥미진진하다면 그 이야기들은 애틋한만큼 사랑스럽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바이킹 시귀르드르의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만이 짝사랑과 가장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름답다고 말해야 할까. 나는 이 이야기에서 감동을 느꼈다. 사랑스럽고 그만큼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름다웠는가? 사실 모르겠다. 바이킹 시귀르드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울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울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으니까 참아야만 했다. 날 울릴 뻔한 이야기가 포함된 이 스토리가 아름다웠는가?

나는 모른다. 모른다고 말하기는 정말이지 쑥스럽지만, 모르겠다. 나중에 사랑을 하면 알게 되려는가. 나는 그저 부러웠다. 700년을 우직하게 그야말로 심장을 내줄만큼 사랑한 누구가가 있는 마리안네가 부러웠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불운에도 기다려주는 이가 있어서, 자신이 가슴에 품고 살아갈 이가 생긴 주인공이 부러웠다. 내가 아직 진정한 사랑을 알기엔 어려서 이러는가.

이 가슴 저리도록 부러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분명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일터다.

 

그래, [가고일]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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