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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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접한 한국 전래동화를 기억한다. 연년생이라 개구졌던 우리는 머리맡의 동화책이 없어도 잘 잤고, 두 손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고자 하셨던 할머니는 한국 전래동화보다는 일본 이야기와 동요가 편하셨던 모양이다. 처음으로 본 한국 전래동화는 놀러간 친구 집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반지르르 빛나던 그 표지와 토속적 향기가 물씬 나던 삽화가 정겨워 기어코 한 권을 빌려 품안에 꼭 안고 가던 그 하교길에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더랬다. 빳빳한 새 책의 책장을 즐거이 넘기며 한 권, 두 권, 놀자는 친구를 골나게 만들며 읽어내려가던 책들 중에 바리공주 이야기가 있었다.

7번째 공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버려졌는데도 친부모를 위해 저승까지 다녀온 바리공주. 삽화 속의 바리공주는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이 영롱히 빛났다. 붓으로 그린 듯한 선이 그려내는 바리공주가 너무 작아서, 그녀가 겪는 일들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어린 맘에 눈썹을 찌푸렸던 기억이 난다. 어째서 자신을 버린 부모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거야, 어린애다운 질문으로 나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그리곤 다음 권을 집어들었다.

 

그 때로부터 십년이 흘렀는데도 나는 아직도 어린애마냥 철부지인가보다. 바리데기, 라는 책 제목에 되새김질한 바리공주 이야기에 여전히 화가 난다. 왜 널 희생해, 나는 이렇게 어리다. 하지만 십년이란 세월은 내 생각보다 길어 어린아이다운 순진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린 시절의 내가 화냈던 이유가 바리공주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걱정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그저 기브 앤 테이크라는 잣대 아래 화를 내고 있을 뿐이다.

 

바리데기, 바리공주의 이야기에서 따온 이름 바리. 이름은 운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바리의 운명은 7번째 딸로 태어났을 때, 바리라는 이름을 받았을 때 정해진 걸까. 우매한 나는 영리한 바리가 자신의 이름 뜻을 알아차렸는데도 허부적 의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바리의 삶은 고달프다. 바리공주처럼 끊임없이 고난을 넘기고 저승과 이승의 경계에 서 있는 삶. 아슬아슬 줄타기를 타듯 흘러가는 삶을,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가족을 잃고, 그녀를 지탱해주던 할머니를 잃고, 동생과도 같은 개 칠성이를 잃었다. 바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고 얻는다. 남한의 사투리도 헷갈리는 내게 완전히 낯선 이북 사투리 속에 배어있는 할머니의 따스한 배려를 영영 이승에서 잃고 저승에서도 걱정하는 영원한 마음을 얻고. 주인을 지키려 우직한 죽음을 맞이한 칠성이를 이승에서 잃고 저승길의 동반자를 얻고. 그 끊임없는 고리 속에서도 바리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의연하다.

 

무속적인 내용이 많이 담긴, 어른을 위한 동화같은 느낌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건과 어울어져 그 시대의 처절함을 담담한 말투로 엮어내는 글이,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평범하지 않은 주인공이 어째서 이렇게 마음을 끄는가. 바리의 할머니에게서 나를 그렇게 귀애 하시던, 이제는 너무 커버린 내게 작아보이는 할머니가 떠오르기 때문인가. 주인을 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는 칠성이에게서 나만 바라보는 우리집 강아지의 동그란 눈망울이 떠오르기 때문인가. 누구보다도 넓은 시야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리 때문인가.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가엾다는 바리의 말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가엽다. 배곯아 죽은 사람도, 전쟁 때문에 죽은 사람도, 돈이 없어 타락한 사람도, 미움에 스스로를 망치고 있는 사람도. 하나같이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책을 읽으며 솟아오르는 감정은 연민.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스러움이었다. 미숙한 인간인 나는 여전히 누구를 미워하고 멀리하겠지만, 바리가 눈물 흘릴 때만큼은 모든 가여운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랬다.

바리의 삶이 행복하게 끝나기를. 온갖 고생과 설움을 겪더라도 늘 그랬듯 맑게 살기를. 고생을 모르고 지낸 철없는 동포의 마음으로 기원했다. 이 세상에 폭력은 끊이지 않고 파생되는 미움도 언제나 도사리고 있을테지만, 부디 태어나는 아이는 평온 속에서 자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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