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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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설레던 금요일이었다. 비록 어제까지 따땃하던 날씨가 다시 추워지고 있다고 해도, 한 시간이나 일찍 끝난 수업덕에 집에 일찍 내려갈 수 있다는 건 모든 안 좋은 일을 상회해버릴 정도의 일이었으니까. 룰루랄라 말 그래로 발걸음도 가볍게 짐을 챙겨들고 버스 정거장까지 한걸음에 달려가 집까지 가는 시외버스를 타며 일찍 가게 됐으니 도서관에라도 들려 책이나 빌릴까, 하고 한가로운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기분 좋았던 날이었더랬다.

오랜만의 집 냄새에 냉기도 아랑곳않고 헤집고 돌아다니기를 서너시간. 빈둥거리기에도 질려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무렵에야 집어든 책은 백가흠의 <조대리의 트렁크>. 어떤 이야기일까 두근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아...가슴이 턱하니 막힌다. 내 즐거운 금요일 저녁은 어디로 갔나.

내가 병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한사코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데. 내가 그 재밌다는 사랑과 전쟁을 안 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데.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되도록이면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봐야 했던거지? 아아- 얼굴을 있는 힘껏 찡그려 가면서도 끝내 책을 놓지 못하고 읽어버렸다. 호러영화를 무서워 하면서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일까. 다 읽고 나니 처음엔 그저 재미있게만 보였던 표지마저 철의 표면에 녹이 든 것같은 초록색이었고 군데 군데 줄지어 보이는 붉은 얼룩은 전에 없이 우울해 보였다. 이래서 인생, 관점이 중요하다고 한거구나,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멍하니 표지만 내려다 보았다.

 

단편도 좋아하고, 블랙 유머도 좋아하는데 어쩜 이렇게 날 괴롭힐 수가 있는지. 끔찍한 우울증에 시달린다면 모를까 거울을 들여다보며 종일 자기의 나쁜 점만 곰곰히 뜯어보고 싶어하는 사람을 없을 거다. 자신에 대해서 장점을 더 아는 게 당연 즐거울테고.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꼭 내가 그 끔찍한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느껴진다. 안 좋은 면만 계속 바라보고 있는 그런 우울증.

신문이나 뉴스를 들여다 보아도 이렇게까지 사람을 음침하게 만들 수 없다. 신문과 뉴스는 - 몇몇 감정적인 인터넷 뉴스는 제외하고 - 어디까지나 사실을 전달해야 하니 가벼운, 사회적으로 훈련된 양심이 작게 울렁이긴 해도 다시 내 일에 몰두할 수 있다. 감정이입하기엔 신문의 기사란은 너무 작으니까. 이 책은 그런 나쁜 뉴스를 신문에서, 뉴스에서 끌어내려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간다. 너무 씁쓸해서 가급적이면 알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너무 적나라 하게 펼쳐 보이기에 내 자기중심적인 뇌세포마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으니, 그게 작가의 의도었다면 이 책은 훌륭히 본연의 목적을 완수한 셈이다. 지나치게 훌륭히.

 

따뜻한 날씨가 고마웠다. 전철역도 있고 지하도도 있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노인의 집은 여전히 많았다. (127)

세상 사는 일엔 좋고 나쁜 굴곡이 있다는데 이 글 속의 주인공은 나쁜 일의 언덕을 힘겹게 넘어 휴- 하고 나도 변한 것이 없다. 세상은 여전히 그들에게 차갑고 매정한 곳이다. 그럼에도 주인공들은 씁쓸함과 부조리함과  자조감, 그 속에서도 휴, 하고 어딘가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보인다. 험하게 굴려진 순박한 사람들이 눈을 깜박거린다. 돈이 있어도 악에 받힌 사람들의 눈은 번들거리고. 묵직하고 어느 한구석 시원한 기색이 없는 엔딩에도 그래도 잘됐다, 어쨌든 끝났다, 라며 스스로 얘기하는 내가 있었다.

 

생생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고 아, 어차피 이건 다른 세계 이야기야, 하고 스스로에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명색이 애완견이라는 개와 생존을 놓고 싸워야 한 어린 아이의 이야기를, 장애인이 된 후로 성인용 인형에 집착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사랑의 방식이 폭력이라 믿는 편집증 환자에게 묶여버린 두 여자의 이야기를 읽고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냐 말이다. 사회라고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모인 학교가 전부인 미숙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끝없이 우울해 하며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것 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도, 어떻게 고쳐야 할지도 전혀 모르는 백치와도 같은 상태에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 모든 부조리를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 작고 무능력하지만 이제 두번 다시는 외면할 수 없을 거라는 날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사실뿐이었다.

 

아, 어떻게 그냥 외면하고 살아가면 안 되는 거였나? 내 금요일 저녁은 정말 멋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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