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설공주 이야기 흑설공주
바바라 G. 워커 지음, 박혜란 옮김 / 뜨인돌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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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엄마와 신촌에 나갔다왔다. 가게에 나가시는 엄마의 점심 시간에 맞춰서 옷을 입고, 귀걸이를 갈아끼우고 수선을 부리다보니 벌써 11시 반.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아르바이트 아줌마와 교대하고 있는 엄마에게 척하니 팔짱을 껴보았다. 오랜만의 모녀 나들이에 기분이 들떠서 룰루랄라 버스 정거장으로 향하다 버스를 두 대나 놓쳤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추운게 대수랴 버스 놓친 게 대수랴. 추운 건 겨울이니 어쩔 수 없고 버스야 기다리면 되지. 추위로 상기된 발간 얼굴로 히히덕 나는 마냥 신이 났다.

실은 이번 토요일날 큰 이모 생신 선물을 사러 나가는 길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어쩐지 들뜨는 날이니까. 신촌에 내리니 역시나 사람들로 북적거려 파스타를 먹으러 가는 길도 어찌나 힘들던지. 겨우 2층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아 피자와 파스타를 주문하고 나서야 창 밖을 내다볼 여유가 생겼다. 이 집 맛있어, 엄마. 엄마는 뭔가 매운 거 먹고 싶은데. 진짜 맛있어. 맛없음 내가 낼게. 히히 웃으며 장담하는 날 보고 엄마가 용돈도 없다며 라고 웃었다.

엄마와 수다를 떨면 재미있다. 워낙에 뭔가를 숨기지 못하는 체질에다 엄마한테 모조리 말해버리는 내 습관 때문에 한 마디만 꺼내도 금방 아, 그거? 하고 맞장구를 쳐주니 이때다 싶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친구랑 있을 때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엄마와 나 사이에는 있다. 해물 스파게티를 돌돌 말며 이야기는 어린 시절 보았던 애니메이션으로 옮아갔다.

"엄마, 흙꼭두장군 기억해?"

얼마 전 어렵사리 인터넷에서 본 옛날의 애니메이션의 제목을 꺼냈다. 사실 엄마가 기억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그 어렸을 적 보여준 거 말이지?" 라고 대답했을 때에는 솔직히 놀랐다. 어렸던 나에게만 추억인 줄 알았더니 엄마에게도 그 제목이 추억의 한 조각이었던 모양이다. 신이 난 나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다시 봤는데, 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되게 오랜만에 봐서 재미있긴 했는데 옛날에 보던거랑 느낌이 다르더라구."

"원래 그런 법이야. 영화도 처녀 때 봤던 거 지금 보면 영 다르다니까."

"그치? 나 저번에 인어공주 빌려봤는데... 다시 보니까 애가 어찌나 아빠 말을 안 듣던지."

투덜대며 인어공주의 흉을 보는 날 엄마가 으하하 웃으며 바라보고는 너도 이제 늙은거야, 라고 말했다.

"어렸을 적에는 비평없이 보니까, 무작정 재미있다고 느끼는거지."

파스타를 감아 올리며 엄마 앞에서 입을 내밀고 있는 딸이 귀엽다는 듯 엄마가 말한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적에 비평이니 뭐니 할리가 있나. 그저 부드럽게 움직이는 화면에 눈을 빼앗겨 헤헤 거릴 뿐이지. 거기다 비평할 나이쯤 되면 동화는 손도 대지 않게 되니, 언제까지나 재미있었다고 기억하게 되는 거겠지.

 

내가 동화책을 접한 건, 엄마가 머리맡에서 읽어줬기 때문도, 집안에 동화책이 가지런히 꽂혀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놀러간 친구 집 구석에 쳐박혀 있던 얇은 책들, 뭔가 하고 들여다 봤던 그 날이 내가 처음으로 동화책을 봤던 날이었다. 그리고 TV에서 해준 명작동화 애니메이션. 그래서 더 동화를 좋아하는지도 모르지만,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동화의 재조명이 이루어져서 기쁘다. 새롭게 번역되어 나온 동화도 재미있고, 그림 동화의 본모습이라며 나온 잔혹동화도 나름 재미있고, 각색된 동화 역시 재미있다. 그리고 이 [흑설공주 이야기]처럼 어느 누군가를 겨냥해 나온 동화 역시 재미있다. 어쩐지 읽고 있으면 디즈니사에서 나온 영화, "마법에 걸린 사랑"이 생각난다. 원작을 재치있게 각색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둘 다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간에 보고 있으면 어렸을 적 봤던 동화들처럼 그저 즐겁게 바라보고 있는 날 느낄 수 있다. 동화든 뭐든 이야기의 주된 임무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거, 라고 굳게 믿는 나에게 오랜만에 '동화'를 보면서도 비평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는 책이 있어 하루가 즐거웠다. 비록 읽고난 뒤에 다시 보면 또 다시 나이먹은 내가 튀어나오겠지만. 잠시나마 어린아이처럼 웃었다는 거 자체가 중요한 거 아니겠어.

책 중에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건 '릴리와 로즈'였다. 애초에 원작 동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니와 마지막에 공주와 릴리가 깔깔깔 웃는다는 대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당찬 여자아이들이 자기들만의 비밀이 즐거워 마주보며 크게 웃는 다는 이야기가 어찌나 훈훈하던지. 골치아픈 2세 이야기는 당당하게 해결하고 언제나 사이좋게 웃음지을 생각에 나 역시 흐뭇했다. 동화는 이런 거 아닐까. 어린아이들에게는 웃음을 주고, 어른들에게는 흐뭇함을 주는 거. 내 스스로를 어른으로 칭하기에는 아직 한참 어리고 미숙하지만, 그렇다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동화를 바라볼 수는 없는 나이니까. 확실히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기존의 동화와는 조금 다르다. 우선 세상의 모든 딸들을 위한 동화, 라는 부제가 무색치 않게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소녀들이었고, 여느 동화가 바라보지 않는, 동화의 나라에도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물론 동화답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허구의 이야기에 끊임없이 현실을 들이대는 건 재미없으니까.

 

책은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런 동화를 엄마에게서 듣고 싶었다. 어렸을 적에도 경험해 보지 못한, 머리맡에서 동화책 읽어주기, 같은 엄마의 사랑이 넘치는 이벤트가 문득 그리워졌다. 물론 구구단 테이프를 밤새 틀어주신 적은 있어도, 아플 때 밤 새 곁에 있어주시긴 했어도 낮에도 책은 읽어주시지 않았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그런 일은 없을 듯 하지만. 왜 흔히들 외국 가족 영화를 보면 귀여운 무늬의 침대에 누운 금발 머리 아가들 옆에 엄마나 아빠가 누워서 "옛날 옛적에..."라며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나. 졸음 가득한 어린 아이가 눈을 깜박이고 그러면 엄마 아빠는 아이의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해주고는 불을 끄고 문을 닫아주는, 그런 장면이 자꾸 눈에 밟히는 책이었다. 어른을 겨냥한 책이라 삽화가 많이 있는 편은 아니었는데 동심으로 돌아가 보는 김에 삽화도 좀 더 넣어 좋았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헤헤 웃으며 엄마와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시고 먹느라 풀러두었던 목도리를 둘렀다. 먼저 계산하러 나가는 엄마 뒤를 졸졸 따라 나가니 직원분이 우리 둘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왜요? 물으면 따님이 어머님을 정말 많이 닮아서요. 라고 다시 웃는다. 가파른 2층 계단을 내려오며 엄마도 나도 멋쩍게 웃었다. 둘 다 통통과니 닮았다는 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잠시 헷갈리다가도 뭐 어떠랴 싶어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었다. 오늘 밤은 엄마와 함께 책을 읽자. 나중에 오늘이 추억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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