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난 할아버지가 없다. 두 분 모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 어렸을 적부터 궁금했던 질문은 길거리에서 할아버지와 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튀어나와 날 망연하게 만든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 나오는 박사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어딘가 어수룩하지만 인자하고 아이라면 깜박죽는, 내 상상 속의 할아버지 같았다. 칭찬을 퍼부어주고 반짝이는 눈으로 어린아이를 지켜보고 일일이 변화를 감지하는. 어디까지나 상냥하고 다정한.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어땠을까. 자신이 알고있는 모든 것을 차근차근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사소한 일에 실망하지도 않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 자기 자신의 가치에 무지한 상냥한 사람. 항상 남을 배려하는, 너무나 다정한 사람.

 

난 수학을 무척 싫어한다. 고등학교 때까지 성적은 좋았지만 성적과는 무관하게 수학이라면 머리가 아찔해졌다. 시험 기간만 아니면 수학책은 그저 책상 옆에 쌓아둔 교과서 중 하나일 뿐이었고. 그래서 책 속에 줄줄이 나오는 수학은 잠시나마 날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 분명 내 수학 성적은 좋았는데 몇 년 지났다고 이렇게 다 까먹다니. 하지만 이내 어지러이 나오는 수학에도 익숙해지고 수학을 더없이 소중한 듯이 대하는 한없이 진지한 박사의 태도에 '내'가 감화된 것처럼,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지겹다고 느꼈던 수들이 오밀조밀 생명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박사가 수학에 바쳐온 세월은 어느 누구보다 진지할 것이고 어느 무엇보다 농밀하겠지. 그 한결같음은 분야를 불구하고 아름답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서 사랑을 듬뿍 받는 어린아이만큼 강한 것도 없다. 루트처럼 평평한 머리통 덕에 루트라 불리는 '나'의 아들 역시 이상한 할아버지로부터 난데없이 애정을 담뿍 받으니 그 애정을 고스란히 돌려줄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가슴 깊숙이에서 솟아나오는 배려, 박사를 굳게 믿고 있는 순수한 마음. 루트는 박사를 믿지 않았던 엄마에게 화를 낼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애정에 기반한 믿음이랄까.

 

하지만 80분밖에 기억이 지속되지 않는 박사의 기억은 잔인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잔인한 것 뿐만 아니라 본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어느 날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양복에 바스락 거리는 메모가 잔뜩 달려있고, 그 속에서 자신의 병을 읽게 된다면. 몇번이고 좌절하고 몇 번이고 잊어버릴테지만. 그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 겪었을 그 순박한 할아버지가 가슴아파서.

 

애정은 보통 기억에서 나온다. 그 농축된 기간에서 흐르는 애정, 기억. 내가 기억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큼 잔인한 일도 없다. 억울하고, 까맣게 잊어버릴 걸 알고 있기에 더더욱. 박사에게 수학은 공기와 같다. 눈앞에 문제가 있으면 푸는 것이 당연하고, 골몰하는 것이 당연하고, 풀고나도 왜 그것이 칭찬받을 일인지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사물을 보는 감각이 바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사처럼 한평생 수를 존경하고 흠모해온 사람만이 할수 있는, 드문 일인 것이다. 굳건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누군가의 기억에 항상 올곧게 아름답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파출부와 주인(실주인은 아니지만)의 관계는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관계이기에 누구보다 무관심해질 수도 있는 관계지만 반대로 더더욱 농밀한 감정이 쌓일 수도 있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끝이 다가온다는 생각이 만드는 조그만 선물이라고 할까나.

 

 

누군가가 나에게 이 책을 추천을 주었을 때, 가슴이 따뜻해 지는 책이라고 했다. 아,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무 생각 없없지만, 정말이다. 비록 가슴이 꽉차올라 먹먹해지는 따뜻함일지라도 여운이 긴, 따뜻한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따뜻한 애정의 공기가 균일하게 퍼져있는 그런 따뜻한 책.

 

이미 많은 분들이 읽었고 뒤늦게 읽은 감이 있지만, 늦게나마 이런 책을 읽었다는 게 너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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