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Iphone4를 받았다. 3년 6개월간 사용하던 골동품(?) 핸드폰에서 최신 폰으로 비약한 것이다. 이것저것 해보니 단순히 핸드폰이라고 하는 것은 Iphone4에게는 모욕인 것 같다. 전화도 되는 소형 컴퓨터가 더 적당한 것 같다.^^ 아무튼 '쓸만한 것'은 사실이다. 잘만 사용한다면 생활을 윤택해게 하는데 좀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하다. 예전에 윈도우 XP 쓰면서 이젠 컴퓨터가 '좀 쓸만하네' 했던 느낌을 가졌었는데 아이폰에도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된다. 

내 또래의 사람들은 <소년중앙>을 보면서 꿈을 키워왔는데, 이 잡지에서 벽걸이 TV,  화상통화 등등에 대한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부지불식간에 현실화되어 버렸다. 꿈이 현실화 되면 이건 꿈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이라는 걸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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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님의 "마르셀 그라네의 중국사유"

추석은 잘 보내셨는지요? 저는 왔다갔다 하다 보니 3일이 훌쩍 가버렸네요. 좀 늦었지만 새로운 책 출간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중국 사유>는 관심이 가는데, 아직도 알라딘에서는 뜨지 않네요. 동서문명의 융합에 의한 새로운 문명의 탄생이라는 거대한 난제가 인류에게 주어져 있는 셈인데, 그라네의 노력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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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철학자의 시대, 어떤 철학의 부활을 말하기에는 철학이라는 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것은 참으로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을 공부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격렬한 논쟁이 오가는 것 같기는 한데 이러한 논쟁의 중요성과 격렬함을 아는 '시민'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유명환 장관 딸의 특채나 MC몽의 병역 기피 신정환의 도박에 대해 오가는 대화의 보편성과 관심에 비하면 철학 논쟁에 대한 관심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미약한 것이다. 4억 명품녀에 대한 관심에도 비할 바 못된다는 말은 너무 비참해 지니 빼도록 하자.^^ 이러한 분위기에서 어떤 철학의 부활을 논한다는 것이 참 덧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무거운 철학만으로 살수 없듯이 가벼운 가쉽들에 의해서만 그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 생활에서 자각하기는 힘들지만 생활의 근저에 깔린 근본적인 생각들을 반성하는 철학은 그 관심의 강도에 관련없이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필수 요소 중의 하나인 것이다.

아무튼 사르트르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고 있음은 그 정도에 대한 물음을 도외시 한다면 사실인 것 같다. 가장 쉬운 증거로는 그의 책들이 새롭게 번역되고 있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완역되었고, <상상계>가 번역되 나왔으며 두툼한 <사르트르 평전>도 번역되 나왔다. 이는 물론 실존주의의 강한 비판자였던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의 쇠퇴와도 관련있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각광을 받고 있는 지젝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같다. 지젝은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에서 간과되어 왔던 주체의 문제를 라캉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다시 살려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로간에 강한 비판자였던 사르트르와 알튀세르에 대한 관심이 동시에 살아나고 있으니 역사는 참 아이러니칼 하다고 할만한 것 같다. 

최근 사르트르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프레시안에 연재되고 있는 [철학자의 서재]에 사르트르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 저자는 철학아카데미의 조광제 박사. 메를로 퐁티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분인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고 계신 듯 하다. 앞의 사소한 듯 보이는 도입부는 빼고 사르트르의 '실존'을 새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부터 옮겨 놓는다. 좀더 생각해 봐야 겠지만 내가 평소 실존에 대해 생각해 오던 바와 상당히 유사한 것 같다.

 조광제-'실존주의'에 대한 조반, 사르트르의 '현존주의':사르트르 <존재와 무>                 

... (전략)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인가?

...(전략)    

  

 사르트르는 이른바 '실존주의'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글을 통해 독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르트르의 철학 내지는 존재론에 대해서만큼은 '실존주의' 혹은 '실존 철학' 따위에 들어 있는 '실존'(實存)이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실존'이라고 번역되는 원어는 'existence'다. 이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통해 제시한 'Existenz'에 대한 번역어인 양 여겨지기 쉽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하이데거의 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흔히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말하는 'existence'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Existenz'와는 크게 다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Existenz'는 '실존'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실존'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대략의 의미는 '자기 존재를 자신 외의 그 어떤 존재자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제 스스로 결단하여 만들어 감으로써, 스스로에게 고유한 양식 속에서 확보한 자유로운 진정한 나 자신'이라는 것인데, 하이데거의 'Existenz'야말로 바로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의 죽음

한때 "실존 철학은 극복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1970년대 들어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를 위한 노력들이 새로운 사회주의적인 체제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과 맞물려 돌아갈 때, 실존 철학 내지 실존주의는 자신의 세계에 자폐되어 있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한 형태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존주의'라는 말에는 이중적으로 갈래지는 함의가 들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박정희의 독재에 의거한 전일적이고 획일적인 전체주의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개인의 결단과 그에 따른 자유의 획득이라고 하는 비타협적인 저항성을 담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박정희의 전체주의의 정치경제학적인 바탕은 자본주의이고 자본주의는 철저히 개인주의에 입각한 것인데 철저히 개인성에 입각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를 암암리에 방기 내지는 심지어 옹호한다고 하는 순응적인 타협성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실존'이라는 말은 자폐적인 소영웅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거의 결론이 나버렸다. 1987년 이후 일정하게 법적·형식적 차원의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실존 철학 내지 실존주의는 어느새 그야말로 자폐성을 면하지 못하는 것으로 '용도 폐기'된 식물 상태가 되고 만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를 더욱 부추긴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슬그머니 들어와 1990년대 들어 크게 힘을 발휘하게 된 포스트모더니즘과 이를 뒷받침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득세였다. 대체로 일군의 프랑스 철학자들로 구성된 포스트구조주의는 그 바탕에 구조주의를 깔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구조주의는 1950년대 들어 왕성해지는데, 그 출발점은 사르트르의 이른바 '실존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과도하게 개인적 주체에 중심을 두고서 일체의 의미들을 주체 중심으로 재구성해 나가는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체 대신에 구조를 내세워 구조 내에서 주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주체가 전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핵심 주장이었다.

이런 구조주의적인 생각이 '철퇴'를 맞은 것이 바로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급격한 시점을 넘어가고 있을 즈음인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른바 '5월 사태'이다. 이때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마오쩌둥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인민의 대대적인 욕망을 보았고, 그 욕망의 주체를 기반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구조주의가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환한 것이다.

다시 되돌아가 말하자면,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한 구조주의적인 독법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뭉뚱그려 말하면, 그래서 틀렸다. 예컨대 사르트르 철학적 인간학에서 기반을 이루는 것은 자유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는 구속이나 예속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사르트르는 "상황 속에서만 자유가 있을 뿐이고, 자유에 의해서만 상황이 있을 뿐이다"(원서 534쪽)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자유를 중지할 자유가 없다"(원서 484쪽)라고 말한다.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이상 이미 늘 근원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고, 이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주체는 이미 늘 자유로운 주체이지,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야 하는 그런 주체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자유로운 주체는 욕망의 근원적인 분출 지점일 뿐이다.

사르트르의 현존주의, 그 건재함

사르트르에서 자유는 인간의 'existence'가 성립하는 이른바 대자(對自, pour-soi)의 근본적인 존재론적인 성격이다. 대자라는 것도 인간인 이상 대자가 아닐 수 없는 그런 의미에서의 대자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독자들을 괴롭히기로 감히 마음을 먹는다. 용서해 주시길!

사르트르는 인간 존재가 성립하는 데에는 그 바탕에 시간문제가 깔려 있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existence'는 '지금'(現)이라는 특수한 시제(時制)가 지닌 기묘한 성격을 생각함으로써 접근할 수 있다. '지금'은 '지금!'이라고 말하면서 지정하려는 순간에 다른 '지금'이 되고 만다. 간단히 말하면, '지금'이라는 말로써 지칭할 수 있는 정확한 시점(時點)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자신을 벗어나거나 넘어서버리는 것이 '지금'이다.

'existence'는 라틴어로 보면, 'ex+sistere'다. 여기에서 'ex-'는 '…밖에' 혹은 '…너머'이고, 'sistere'는 '자리를 잡다'이다. 말하자면, 'existence'는 '자기의 너머에 자리를 잡음' 혹은 '자기의 너머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이를 철학사의 전통에서는 '본질'과 대립하는 '현존'(現存)이라고 한다. 흔히 '실존'이라고 번역하는 바 사르트르가 말하는 'existence'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현존'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르트르가 말하는 '현존'은 '탈자적'(ek-statique)인 것이다. 탈자적이라는 것은 한 순간도 자기 자신으로 동일하게 있을 수 없고, 오히려 근원적인 차이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해 가장 유명한 명제는 아마도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일 것이다. 이는 불어 원어로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이다. 이 문장은 "현존은 본질에 앞선다"로 번역해야 옳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이 문장은 비단 인간 존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본질은 플라톤의 이데아 내지는 형상(eidos)과 직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본질주의'가 나오고, '보편 중심주의'가 나오고, '동일성 중심의 철학'이 나온다. 사르트르가 이 명제를 통해 주창하고자 했던 것은 본질은 지금·여기의 구체적인 현존에 비해 파생적·부차적이고, 보편자는 지금·여기의 개별자에 비해 파생적·부차적이고, (자기)동일성은 지금·여기에서의 차이에 비해 파생적·부차적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현존'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적용될 수 있는 것이고, 그 와중에 인간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데, 다만, 인간의 '현존'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각 '현존'이 성립하는 데 근본적인 바탕이 된다. 그러나 사르트르 철학에서 결코 놓쳐서 안 되는 것은 즉자(즉자, en-soi)다.

즉자는 결코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즉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바탕에서 관통하고 있는 근본이다. 사르트르는 이 즉자를 진정한 존재(être)로 본다. 그리고 대자를 바탕으로 한 일체의 '현존'은 즉자에 비해 또 다시 파생적·부차적이라고 본다. 사르트르의 평전을 쓴 앙리 레비가 사르트르를 일컬어 20세기 최고의 유물론자라고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해 'existentialism'이라고 할 때, 그것은 '실존주의'가 아니라 '현존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현존주의'는 일체의 본질주의를 바탕에서부터 거부하고, '천상'으로 향한 본질적인 영원을 거부하면서 우리 자신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바탕에서부터 떠받치고 있는 '지하'로 향하는 하강의 철학인 것이다.

사르트르의 하강의 철학인 '현존주의 철학'은 지금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현존주의 철학'이야말로 여전히 긴급하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자의 서재, 프레시안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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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번역자로 알려져 있던 신상희 교수가 7월 4일 급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한다. 사인은 심장마비. 하이데거 연구와 번역에 헌신적으로 노력했으나 한국 사회는 그에게 끝내 정규직 교수 자리를 제공하지 않았다. 한달 반이나 지난 후 로쟈님 서재에서 그의 부고 기사를 접했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가 번역한 하이데거의 책들을 꺼내서 읽어본다. 무심히 넘겨 버렸던 옮긴이의 글 한토막이 의미있게 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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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경제 논리만을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추종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철학이 종말에 이르고 인문학이 쇠퇴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인다. 그러나 철학과 인문학이 역사의 뒤안길로 내몰리는 현상은 단지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와 결탁한 첨단 과학 기술 문명의 지배적 쇄도라는 외적 요인에 의해서 초래된 것일까? 철학의 종말과 인문학의 쇠퇴는 오히려 철학과 인문학을 포함하는 학문 자체 안에 그 원인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이미 하이데거는 반세기 전에 이러한 점을 경고한 바 있다. 왜 철학은 종말에 이르고 인문학은 쇠퇴 일로를 거닐 수 밖에 없으리라고 하이데거는 예견하였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유해야 할 것으로서의 존재의 진리를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다면 이러한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유해야 할 것을 제대로 사유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이 사유해야 할 사유의 진정한 사태는 존재의 진리이다. 그런데 존재의 진리는 단순하고 소박하여 눈에 잘 띄지 않는 미미한 것이다. 장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꽃을 피운다. 하늘의 밝은 빛과 대지의 따스한 품에 안겨 화답하는 방식으로 장미는 존재한다. 한송이 장미꽃이 피어남에는 하늘과 대지의 기운이 하나로 어우러져 세계를 열어 보이는 존재의 사건이 찬연히 생기하고 있다. 인간이 이러한 경이로운 사건은 맑은 눈으로 바라보고 향유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인간은 존재의 이웃이 된다. 인간이 존재의 이웃이 될 때, 비로서 인간은 인간 자신의 본질로 귀환할 수 있다. 그 때 인간은 이성적 도덕적 기술적 주체라는 허망한 옷을 벗고, 우주 만물과 회동하면서 조화롭게 펼쳐지는 존재의 진리 안에 머물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번역) 중 옮기고 나서, 신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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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이데거 연구에 일관되게 헌신한 학자였다.   그가 옮기거나 저술한 책들이다.

 

  

 

 

 

 

  

 

  

 

 

 

신상희 교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우리말로도 하이데거의 많은 저술들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이 공들인 번역본들 중 <강연과 논문>, <숲길>, <이정표>, <동일성과 차이>를 소장하고 있다.  나같이 독일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사람도 하이데거의 글들의 맛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의 노력은 한국어 사용자들의 철학적 깊이를 한층더 깊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고 신상희 교수가 그토록 간절히 사유하길 원했던 '존재의 진리'를 나도 느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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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한겨레 21에 실렸던 인터뷰 기사의 한 도막을 옮겨 놓는다.

 신상희씨는 요즘 하이데거 후기 사유의 정수를 담고 있는 만년 저작 <이정표>와 <숲길>의 번역에 매달리고 있다. “이 중요한 저작들이 왜 아직까지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는지는 번역에 손을 댄 뒤에야 알았어요. 이렇게 고생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강의가 없던 지난 3개월의 겨울방학 동안 밥 먹는 시간 빼고 하루종일 꼬박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건만 하루 3쪽 번역이 한계 작업량이다. “3쪽 옮기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건강을 생각하면 2쪽조차 벅찰 때가 있어요. 어떤 땐 하루종일 1쪽 가지고 씨름하는 날도 있죠. 그러다보면 나처럼 세상을 비효율적으로 사는 사람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세상의 갈채를 받는 것도, 장도가 유망한 것도 아니지만, 그가 악몽처럼 난해한 사유의 미로를 더듬어가는 삶을 선택한 까닭은 소박하다.
“하이데거를 앞서 번역해 소개했던 은사님들 덕분에 철학적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었고, 하이데거에 접근하는 일도 가능했습니다. 이제 내가 조금이라도 역량을 쌓았다면 다음 사람을 위해 그것을 풀어내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해 충실한 번역서를 내놓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하죠. 어찌보면 내 인생이 굳어 있고 고인 물 같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양식으로 흘러나갈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생활은 남루하지만 사색의 숲을 거니는 정신만은 언제나 풍요로운 인문주의자의 초상을 발견하는 일은 깊은 숲 속에서 찾아낸 샘물 맛처럼 신선하다.  (이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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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10-08-31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한길로로로 시리즈로 나온 발터 비멜이 쓴 <하이데거>를 읽으며 다녔는데 알고보니 신상희 선생님의 첫 번째 번역서더군요. 한국에서 하이데거 읽어본 이들 중 선생의 노고에 빚지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푸른바다 2010-08-31 09:1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하이데거>를 구해봐야 겠습니다. 신상희 교수님은 번역하신 책들 외에는 전혀 모르는 분이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던 분인 것 같습니다...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멜 것입니다. 

(김재혁 옮김, 형상시집,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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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은 경험했던 여름 중에서 가장 무더웠던 것 같다. 비교적 더위를 잘 견디는 편이고 집에서는 에어컨 없이도 큰 불편 없이 생활해 왔는데, 이번 여름은 정말 집에 에어콘을 설치하고 싶은 유혹을 여러번 느꼈다. 참 위대한 여름이었던 것 같다. 릴케의 가을날이 더 생동감있게 다가온다. 절기상으로는 입춘을 지났기에 이미 가을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여름과 가을의 경계는 모호한 감이 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진정 가을이란 10월이 아닐까 싶다. 9월은 여름도 가을도 아닌 애매한 완충지대. 11월도 가을과 겨울의 애매한 중간이다.  

릴케의 시의 제목은 가을날이지만 사실 여름의 끝 무렵에 가을을 기다리는 상황을 노래하고 있다. 무더위를 이겨낸 끝무렵의 안도감과 새로 다가올 가을의 고독을 예비하는 그러한 복합적 마음이 담겨져 있다. 여름의 무더위를 보내며 여름이 남겨줄 풍요함으로 가을의 고독을 견딜 힘을 얻는 것이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위대했던 여름의 여운인 듯 요란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며... 이제 곧 9월. 출장을 다녀오면 9월 중순. 그 다음 추석. 그리고 10월이 오겠지. 10월이 오면 이미 마음은 1년을 정리하고 있을 테고 10월이 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11월을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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