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철학자의 시대, 어떤 철학의 부활을 말하기에는 철학이라는 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것은 참으로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을 공부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격렬한 논쟁이 오가는 것 같기는 한데 이러한 논쟁의 중요성과 격렬함을 아는 '시민'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유명환 장관 딸의 특채나 MC몽의 병역 기피 신정환의 도박에 대해 오가는 대화의 보편성과 관심에 비하면 철학 논쟁에 대한 관심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미약한 것이다. 4억 명품녀에 대한 관심에도 비할 바 못된다는 말은 너무 비참해 지니 빼도록 하자.^^ 이러한 분위기에서 어떤 철학의 부활을 논한다는 것이 참 덧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무거운 철학만으로 살수 없듯이 가벼운 가쉽들에 의해서만 그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 생활에서 자각하기는 힘들지만 생활의 근저에 깔린 근본적인 생각들을 반성하는 철학은 그 관심의 강도에 관련없이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필수 요소 중의 하나인 것이다.
아무튼 사르트르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고 있음은 그 정도에 대한 물음을 도외시 한다면 사실인 것 같다. 가장 쉬운 증거로는 그의 책들이 새롭게 번역되고 있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완역되었고, <상상계>가 번역되 나왔으며 두툼한 <사르트르 평전>도 번역되 나왔다. 이는 물론 실존주의의 강한 비판자였던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의 쇠퇴와도 관련있을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각광을 받고 있는 지젝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같다. 지젝은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에서 간과되어 왔던 주체의 문제를 라캉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다시 살려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로간에 강한 비판자였던 사르트르와 알튀세르에 대한 관심이 동시에 살아나고 있으니 역사는 참 아이러니칼 하다고 할만한 것 같다.
최근 사르트르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프레시안에 연재되고 있는 [철학자의 서재]에 사르트르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 저자는 철학아카데미의 조광제 박사. 메를로 퐁티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분인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고 계신 듯 하다. 앞의 사소한 듯 보이는 도입부는 빼고 사르트르의 '실존'을 새로 해석하고 있는 부분부터 옮겨 놓는다. 좀더 생각해 봐야 겠지만 내가 평소 실존에 대해 생각해 오던 바와 상당히 유사한 것 같다.
조광제-'실존주의'에 대한 조반, 사르트르의 '현존주의':사르트르 <존재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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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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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이른바 '실존주의'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글을 통해 독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르트르의 철학 내지는 존재론에 대해서만큼은 '실존주의' 혹은 '실존 철학' 따위에 들어 있는 '실존'(實存)이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실존'이라고 번역되는 원어는 'existence'다. 이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통해 제시한 'Existenz'에 대한 번역어인 양 여겨지기 쉽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하이데거의 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흔히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말하는 'existence'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Existenz'와는 크게 다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Existenz'는 '실존'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실존'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대략의 의미는 '자기 존재를 자신 외의 그 어떤 존재자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제 스스로 결단하여 만들어 감으로써, 스스로에게 고유한 양식 속에서 확보한 자유로운 진정한 나 자신'이라는 것인데, 하이데거의 'Existenz'야말로 바로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의 죽음
한때 "실존 철학은 극복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1970년대 들어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를 위한 노력들이 새로운 사회주의적인 체제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과 맞물려 돌아갈 때, 실존 철학 내지 실존주의는 자신의 세계에 자폐되어 있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한 형태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존주의'라는 말에는 이중적으로 갈래지는 함의가 들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박정희의 독재에 의거한 전일적이고 획일적인 전체주의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개인의 결단과 그에 따른 자유의 획득이라고 하는 비타협적인 저항성을 담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박정희의 전체주의의 정치경제학적인 바탕은 자본주의이고 자본주의는 철저히 개인주의에 입각한 것인데 철저히 개인성에 입각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를 암암리에 방기 내지는 심지어 옹호한다고 하는 순응적인 타협성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실존'이라는 말은 자폐적인 소영웅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거의 결론이 나버렸다. 1987년 이후 일정하게 법적·형식적 차원의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실존 철학 내지 실존주의는 어느새 그야말로 자폐성을 면하지 못하는 것으로 '용도 폐기'된 식물 상태가 되고 만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를 더욱 부추긴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슬그머니 들어와 1990년대 들어 크게 힘을 발휘하게 된 포스트모더니즘과 이를 뒷받침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득세였다. 대체로 일군의 프랑스 철학자들로 구성된 포스트구조주의는 그 바탕에 구조주의를 깔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구조주의는 1950년대 들어 왕성해지는데, 그 출발점은 사르트르의 이른바 '실존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과도하게 개인적 주체에 중심을 두고서 일체의 의미들을 주체 중심으로 재구성해 나가는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체 대신에 구조를 내세워 구조 내에서 주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주체가 전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핵심 주장이었다.
이런 구조주의적인 생각이 '철퇴'를 맞은 것이 바로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급격한 시점을 넘어가고 있을 즈음인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른바 '5월 사태'이다. 이때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마오쩌둥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인민의 대대적인 욕망을 보았고, 그 욕망의 주체를 기반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구조주의가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환한 것이다.
다시 되돌아가 말하자면,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한 구조주의적인 독법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뭉뚱그려 말하면, 그래서 틀렸다. 예컨대 사르트르 철학적 인간학에서 기반을 이루는 것은 자유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는 구속이나 예속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사르트르는 "상황 속에서만 자유가 있을 뿐이고, 자유에 의해서만 상황이 있을 뿐이다"(원서 534쪽)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자유를 중지할 자유가 없다"(원서 484쪽)라고 말한다.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이상 이미 늘 근원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고, 이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주체는 이미 늘 자유로운 주체이지,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야 하는 그런 주체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자유로운 주체는 욕망의 근원적인 분출 지점일 뿐이다.
사르트르의 현존주의, 그 건재함
사르트르에서 자유는 인간의 'existence'가 성립하는 이른바 대자(對自, pour-soi)의 근본적인 존재론적인 성격이다. 대자라는 것도 인간인 이상 대자가 아닐 수 없는 그런 의미에서의 대자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독자들을 괴롭히기로 감히 마음을 먹는다. 용서해 주시길!
사르트르는 인간 존재가 성립하는 데에는 그 바탕에 시간문제가 깔려 있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existence'는 '지금'(現)이라는 특수한 시제(時制)가 지닌 기묘한 성격을 생각함으로써 접근할 수 있다. '지금'은 '지금!'이라고 말하면서 지정하려는 순간에 다른 '지금'이 되고 만다. 간단히 말하면, '지금'이라는 말로써 지칭할 수 있는 정확한 시점(時點)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자신을 벗어나거나 넘어서버리는 것이 '지금'이다.
'existence'는 라틴어로 보면, 'ex+sistere'다. 여기에서 'ex-'는 '…밖에' 혹은 '…너머'이고, 'sistere'는 '자리를 잡다'이다. 말하자면, 'existence'는 '자기의 너머에 자리를 잡음' 혹은 '자기의 너머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이를 철학사의 전통에서는 '본질'과 대립하는 '현존'(現存)이라고 한다. 흔히 '실존'이라고 번역하는 바 사르트르가 말하는 'existence'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현존'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르트르가 말하는 '현존'은 '탈자적'(ek-statique)인 것이다. 탈자적이라는 것은 한 순간도 자기 자신으로 동일하게 있을 수 없고, 오히려 근원적인 차이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해 가장 유명한 명제는 아마도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일 것이다. 이는 불어 원어로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이다. 이 문장은 "현존은 본질에 앞선다"로 번역해야 옳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이 문장은 비단 인간 존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본질은 플라톤의 이데아 내지는 형상(eidos)과 직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본질주의'가 나오고, '보편 중심주의'가 나오고, '동일성 중심의 철학'이 나온다. 사르트르가 이 명제를 통해 주창하고자 했던 것은 본질은 지금·여기의 구체적인 현존에 비해 파생적·부차적이고, 보편자는 지금·여기의 개별자에 비해 파생적·부차적이고, (자기)동일성은 지금·여기에서의 차이에 비해 파생적·부차적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현존'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적용될 수 있는 것이고, 그 와중에 인간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데, 다만, 인간의 '현존'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각 '현존'이 성립하는 데 근본적인 바탕이 된다. 그러나 사르트르 철학에서 결코 놓쳐서 안 되는 것은 즉자(즉자, en-soi)다.
즉자는 결코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즉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바탕에서 관통하고 있는 근본이다. 사르트르는 이 즉자를 진정한 존재(être)로 본다. 그리고 대자를 바탕으로 한 일체의 '현존'은 즉자에 비해 또 다시 파생적·부차적이라고 본다. 사르트르의 평전을 쓴 앙리 레비가 사르트르를 일컬어 20세기 최고의 유물론자라고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해 'existentialism'이라고 할 때, 그것은 '실존주의'가 아니라 '현존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현존주의'는 일체의 본질주의를 바탕에서부터 거부하고, '천상'으로 향한 본질적인 영원을 거부하면서 우리 자신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바탕에서부터 떠받치고 있는 '지하'로 향하는 하강의 철학인 것이다.
사르트르의 하강의 철학인 '현존주의 철학'은 지금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현존주의 철학'이야말로 여전히 긴급하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자의 서재, 프레시안 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