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멜 것입니다.
(김재혁 옮김, 형상시집,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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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은 경험했던 여름 중에서 가장 무더웠던 것 같다. 비교적 더위를 잘 견디는 편이고 집에서는 에어컨 없이도 큰 불편 없이 생활해 왔는데, 이번 여름은 정말 집에 에어콘을 설치하고 싶은 유혹을 여러번 느꼈다. 참 위대한 여름이었던 것 같다. 릴케의 가을날이 더 생동감있게 다가온다. 절기상으로는 입춘을 지났기에 이미 가을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여름과 가을의 경계는 모호한 감이 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진정 가을이란 10월이 아닐까 싶다. 9월은 여름도 가을도 아닌 애매한 완충지대. 11월도 가을과 겨울의 애매한 중간이다.
릴케의 시의 제목은 가을날이지만 사실 여름의 끝 무렵에 가을을 기다리는 상황을 노래하고 있다. 무더위를 이겨낸 끝무렵의 안도감과 새로 다가올 가을의 고독을 예비하는 그러한 복합적 마음이 담겨져 있다. 여름의 무더위를 보내며 여름이 남겨줄 풍요함으로 가을의 고독을 견딜 힘을 얻는 것이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위대했던 여름의 여운인 듯 요란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며... 이제 곧 9월. 출장을 다녀오면 9월 중순. 그 다음 추석. 그리고 10월이 오겠지. 10월이 오면 이미 마음은 1년을 정리하고 있을 테고 10월이 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11월을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