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이 기적이다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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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읽는데 꼬박 이 주가 걸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모두 다 내 게으름의 탓이다. 이 책은 비망록~자서전~에세이들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독특한 느낌의 책이다. 책 자체는 작가 이사벨 아옌데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곧, 자신보다 먼저 떠난 딸에게 들려주는 그녀 사후의 이야기들인 것이다. 딸에게 들려주는 얘기라는 점, 그리고 전작들을 통해 무척 진솔한 자신의 이야기를 한 작가답게 글들은 매우 투명하다. 자신과 가족들의 이야기들을 그토록 가감 없이 하긴 무척 힘들 텐데(물론 작가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이야기가 실리길 반대하는 지인들의 이야기들은 뺐다고 한다.) 그 진솔성에 한 번 놀랐다.  

 

자신의 며느리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남편과 이혼한 이야기를 이토록 대중적인 ‘책’에 하기란 누구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며느리와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는 아들과 며느리가 이혼한 후에도 상관없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가치관을 한국인의 정서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는데, 이 에피소드는 이 책에 있어서 극히 일부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렇게 진솔하게 얘기해도 되나 싶은 이야기를 무척 덤덤히 밝히는 작가의 글들을 읽노라면 마음이 일면 경건해지는 동시에, 인생이란 이토록 무겁고 진중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즐거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녀가 쓴 책들에 대한 코멘트였다. 

  

내가 궁금해 하던 <영혼의 집 3부작>은 알고 보니 처음부터 짜놓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영혼의 집>을 쓰고 나서, <운명의 딸> 이야기가 생각나 쓰고, 그 후에 <세피아 빛 초상>의 이야기가 생각나 또 글을 썼을 뿐이라는 작가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쓰고 보니 <세피아 빛 초상>과 <영혼의 집>을 이을 충분한 연관성을 발견했기에 그들을 3부작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집>과 다른 두 작품 사이의 설정이 조금 차이나는 면도 존재한다고 한다.  

 

<야수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는데, 그녀의 손자, 손녀를 위한 책도 역시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3명의 손자, 손녀를 위해 각각 한 권씩 썼고(아주 재밌던 점은 그 각각의 책의 소재를 각각의 손자, 손녀가 지정해 주었다고 한다. 손자, 손녀들이 정해 준 소재를 가지고 이사벨 아옌데가 소설을 쓴다는 법칙이 있었던 것이다.) <야수의 도시>는 손자 알렉한드로를 위해 쓴 책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책을 찾아보니 나머지 두 권의 책도 비룡소에서 사이좋게 번역해서 내놓았다. 찾아서 읽어보아야겠다. 

 

하지만 두께 자체가 만만치 않고, 각가의 이야기들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어 흐름이 쉽게 끊겨 책을 읽기는 쉽지 않았다.(물론 그녀의 소설에 비해 상대적이란 얘기지만. 사실 충분히 재밌는 책이다.) 무엇보다 작가에 대해 알고 있지 않고서는-그녀의 소설들을 읽기 전에는-큰 흥미를 느끼기 힘든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사벨 아옌데를 좋아하고, 그녀의 책을 읽어온 독자라면 이 책 또한 무척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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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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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시 마찬가지로 한동안 읽으면 괴로워지는 책들을 읽다보니, 읽기 편해 보이는 책을 빌렸다. 이 책도 500페이지가 넘는 적지 않은 분량이긴 했지만 읽는 내내 즐거워서 분량 같은 건 잊었다.  

 

요시다 슈이치 책에는 늘 같은 감상을 적는데, 그것은 바로 <퍼레이드>와 비교하는 이야기. 내 안의 요시다 슈이치는 언제나 <퍼레이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유일무이하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단 하나’를 의미한다. 내가 살면서 느낀 것들 중 하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버리지 않을 가치 같은 거창한 것에서부터, 가장 좋아하는 음식점에까지. 인생은 금물이기 때문에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은 대부분 급박한 경우가 많다. 순간에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 왔을 때, 이미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놓았다면 행동은 빠르다. 그리고 어영부영 하다보면 그 기회 자체도 놓쳐버릴 수 있다. 요즘은 그런 것들을 더욱 많이 느낀다.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동일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윤대녕의 작품은 <낯선  이와 거리에서 서로 고함>이고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은 <퍼레이드>이다. 그런 작품들은 실로 영혼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들이 다른 어떤 작품들을 쓴다 해도 쉽게 그 전에 새겨진 것들을 쉽게 바꿀 수 없다. 반면 김영하나 장정일의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윤대녕보다 김영하를 덜 좋아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건 실로 유일무이에 대한 이야기인 거다. 

 

이 책에 대해서 말을 할 때도 단연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 이야기들이 얽히고설켜 마지막에 그 많은 매듭들이 풀리던 순간에 실로 깊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평소 나의 취향으로는 너무도 이야기 구조가 단순했기 때문에 불만을 쏟아낼 수도 있었지만, 의외로 이 책은 그런 ‘권선징악’스러운 결말이 너무도 통쾌했다. 작품의 제목 자체가 일본의 현대판 전래동화(?)정도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이름에 꼭 맞는 ‘고전소설’같은 결말이었다. 상쾌하고 느낌이 좋은 청량음료 같은 좋은 소설이지만, 언제나 요시다 슈이치에 대해 생각할 때 처음 떠올릴 소설은 이것은 아닐 거다. 앞서 말한 영혼의 새김이란 그런 것이다. 

 

계속 같은 얘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을 깎아내릴 마음은 하나도 없다. 나는 언제나 요시다 슈이치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작가라고 믿고 살아왔고, 그 믿음에 부합하는 작품들은 (대체로)발표해 왔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 혹은 문제에 대해 상당히 ‘객관적인’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늘 매스컴에 자극적으로 보도되는 일본 우익의 정신 나간 행동이나, 한류 스타를 사랑하는 광신도 같은 일본인들이 아닌 가장 보통의 일본인들을 보여준다.(덧붙여 언젠가부터 그의 책엔 한국 독자를 위한 특별한 메시지가 추가되어 있다. 방한한 적도 있고.) 

 

이 글은 결국 나는 앞으로도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꾸준히 읽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언제나 <퍼레이드>가 그의 최고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만, 한 번쯤 내 이런 생각에 큰 한 방을 먹여 줄 굉장한 작품을 써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본격적으로 책을 꾸준히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늘 책을 읽는다는 일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려고 노력했다. 왜 읽는지, 또 어떤 것들을 읽어야 할지에 대한 의문들 말이다. 아마 이런 생각은 독서가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결론은커녕 대략의 생각도 정리되진 못했다. 너무 어려운 문제인 거다.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다. 당분간은 이것으로 만족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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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온다 리쿠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에게는 단순히 작품의 훌륭함을 넘어서 늘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위키피디아에서 얻은 정보로만 60권이 넘는 작품을 펴냈는데, 이게 1992년부터 낸 거라고 하니 매년 보통 3권 이상씩을 출간한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내는 작품을 모두 어느 정도 이상의 작품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작품은 <밤의 피크닉>인데, 이 작품을 통해 그녀는 훌륭한 스토리텔링과 10대의 미묘한 감수성을 너무도 잘 표현해냈었다.  

 

그리고 읽게 된 여러 작품들은 대체로 재밌긴 했지만, 내 취향과 꼭 맞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작가의 중심 작품 노선이 미스테리 소설이기 때문이다. 추리나 미스테리 소설은 개인적으로 그리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작 읽지 않아, 그녀의 작품을 찾아 읽을 땐 그런 장르는 피해왔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이 작품은 대놓고 미스테리나 추리 소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야기 진행의 태반을 추리소설적 서사구조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굳이 장르 구분을 하자면 그것에 넣어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특히 두 인물이 차례로 서술해나가는 구조가 아주 흥미로웠는데, 장소도 방 안, 시간도 하룻밤으로 정해져 있어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했다. 이런 점은 그녀가 희곡 장르에 가지는 관심과 비례할 것이다. <초콜릿 코스모스>도 연극을 소재로 한 소설이고, 그녀 자신도 희곡을 썼었다고 하니 이 책에 묻어 나오는 희곡적인 요소는 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가 딱 집중하기 좋은 요소들과 흥미로운 이야기가 합쳐져 있는 이 소설이 재미없을 리 없다. 300여 페이지의 적당한 분량이었지만 단숨에 읽었다. 주인공 두 인물의 미묘한 심리 묘사도 무척 좋았기 때문에 단순한 네러티브적 재미 이상을 느꼈다. 

 

매번 이렇게 이야기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일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이야기보따리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정말 궁금해진다. 그녀의 다른 소설들도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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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보다 소중한 것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하연수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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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 무거운 책을 많이 읽어서, 가볍게 책을 읽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빌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볍긴 했지만, 상쾌하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은 아니었다. 

 

그나마 최근 읽은 하루키의 책들은 대체로 좋은 편이어서 이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평이 무척 호감으로 변하고 있었는데, 다시 이렇게 짜증나는 책을 읽으니 그 호감이 슬슬 변한다. 하루키는 과거부터 상당히 보수꼴통스러운 발언으로(보수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다던가 폄하하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보수도 진보도 정의가 있다면 존중한다.)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작품과 인성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예술가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게 맞다는 의견에 동의하긴 한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읽은 뒤 알아본 작가의 인품이 훌륭할 경우 우리는 그 작품들에 더 깊게 감동한다. 

 

특히나 작가와 같은 일종의 ‘지식인’부류에 속하는 예술가의 경우는 작품을 떠나 작가 자신의 행동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멀리는 조선시대부터 가까이는 군부독재 시기까지, 옳은 신념을 굽히지 않는 여러 훌륭한 지식인들의 행동은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인의 중심에는 타당한 정의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하루키에 대해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그의 모든 작품이나 글을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루키가 그의 작품에서 종종 보여주는 ‘권위적’이고 ‘이기적’인 발언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일본 극우 세력을 동조하는 발언들을 하는 사람이 맞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글을 쓰는 하루키는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하라는 의미로 무릎을 쳐대는 일련의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이 책은 하루키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직접 참석하여 현장의 모습을 전달한 르포~에세이~여행기 정도의 작품이다. 유명 작가가 세계 최대의 축제 중 하나인 올림픽을 직접 보고 생생한 전달을 한다는 취지 자체는 무척 좋지만, 이 작품 속에서 하루키는 늘 불만에 차있다. 올림픽은 죄다 지루하고(허나 자신이 좋아하는 마라톤이나, ‘일본팀’이 펼치는 경기는 예외다.) 지루할 뿐이라고 투덜댄다. 개막식에 100만원에 가까운 티켓 값을 치르고 입장해 한다는 소리가 지루하고 지루할 뿐이라는 얘기다. 거기다 그나마 중간에 나온다. 이건 일종의 근무 태만에 해당한다고 본다. 

 

뭐 그거야 개인의 성향이라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간다고 쳐도, 경기를 중계하는 내내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의 선수가 우승하면 시종일관 빈정댄다. 철인 삼종경기 종목에서 스위스가 3위를 하자 너무도 좋아하는 스위스의 기자가 흥분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하자 ‘내가 어떻게 알아?...중략...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는 법.’이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반면 일본 축구팀이 브라질에게 패배하자 ‘바람직한 패배’라고 감싼다. 물론 자신의 나라에 대해 응원하는 것은 당연하고 좋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읽으며 불편했던 것은 다른 나라의 선전을 시기, 질투하고 깎아내리면서 일본의 부진한 성적에는 이런 저런 좋은 핑계를 가져다 댄다. 제목은 저런 식으로 지어 놓고 한다는 소리가 300페이지 내내 이런 식이니, 읽는 일 자체가 고역이 된다. 

 

또한 호주에서 체류하며 겪는 일들을 읽는 것도 짜증이 난다. 작가가 매사에 짜증이 나있고 호주를 욕하기 바쁘니 읽는 사람도 즐거울 수 없다. 어떻게 이토록 편협한 사람이 그렇게 좋은 작품들을 쓸 수 있는지가 의문일 뿐이다. 그나마 야구에서 일본 팀과 여러 번 싸운 한국 팀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조심해 서술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아마 그의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제법 잘 팔리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웃기는 생각이긴 하지만, 작품 내내 호주를 그렇게 욕하던 하루키도 한국에서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아먹고 싶어 한국에 대한 발언은 무척 조심히 하는 듯 느껴졌다. 

 

가볍고 기분 좋게 읽고 싶어 이 책을 빌렸지만, 이렇게 읽는 내내 불쾌했기 때문에 당분간 하루키 책은 끊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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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도시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8
이사벨 아옌데 지음, 우석균 옮김 / 비룡소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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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부터 열심히 읽어온 이사벨 아옌데의 또 다른 소설을 빌려 보았다. 우선 말하자면 이 작품도 무척 재미있다. 하지만 지난번에 읽은 영혼의 집 3부작과 이 작품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동화와 환상 문학 중간 어디쯤 위치한 느낌이 드는 이 작품은, 마치 닐 게이먼의 작품을 읽는 듯 한 착각을 들게 한다.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척 간단한데, 작품의 후기에 잘 나와있다. 이제 나이로 보나 가족 관계로 보나 확연할 ‘할머니’가 된 이사벨 아옌데는 손자들에게 이야기 해주길 좋아한다는데, 그 중 ‘알렉산더’라는 손자가 아마존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청한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손자의 이름에서 따온 ‘알렉산더’는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연을 가진 작품이기에 이 책은 재미가 없을 수 없다. 더군다나 이사벨 아옌데는 남미문학이 갖는 특유의 환상성을 이 작품에서 멋지게 발산한다. 환상 문학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작품이 다루는 ‘환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동시에 현실적인가가 가장 중요하다. 이상한 말이지만 풀어서 쓰자면, 환상 문학은 ‘환상’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것을 상상해 내어야만 한다. 이 점은 간다하다. 하지만 그 상상이 마냥 허무맹랑하다면 사람들은 그 환상에 매혹되지 못한다. 마치 실제로 있을 법한 환상이어야만,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해 무서워하고, 재밌어하고, 신기해한다. 이사벨 아옌데가 다루는 아마존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생생하고 현실감이 있는 동시에 멋진 상상들로 채워져 있어, 이 책을 읽는 내내 큰 즐거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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