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부군과 백수건달
신봉승 지음 / 월간에세이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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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상당히 즐거운 일이지만 그 책 한 권에 대한 즐거움 이상의 즐거움을 때론 얻기도 한다. 그것은 그 책 자체의 내용과 문체를 즐기는 즐거움을 초월한, 그 책이 아닌 다른 책에서 읽는 것들이 현재 읽고 있는 책에 영향을 주어 일종의 그 책들의 교집합을 찾가 된다거나 숨은그림찾기를 하게 될 수도 있으며, 내가 가진 어떠한 큰 지식의 일부분에 그 책이 추가될 수도 있다. 물론 어떠한 책이 내가 처음 알게 되는 분야의 지식이거나 처음 읽게 되는 작가라는 그 책은 그 책 한 권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 할 것이다. 반편 전에 읽은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을 읽기 전에 나는 이미 과거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은 적이 있었고 그 때문에 헤세는 베르테르처럼 운명적 하나의 사랑만을 말하는 작가가 아닌 골트문트와 같은 보편적인 여러 개의 사랑 또한 말하는 작가란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바로 지와 사랑이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각각의 책만 읽어서 알게 된 것이 아닌 두 책의 화학작용 덕분에 알게 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그런 의미에서 전에 읽은 책들 몇몇과 겹쳐졌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책(광기와 우연의 역사)이 역사 소설에 가까운 수필이라면, 이 책은 같은 수필이긴 하지만 거의 칼럼에 가깝다. 전자의 책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위주인데 후자는 역사적 사실은 단지 하나의 사건 혹은 사실에 지나지 않고 그것을 지금 어찌 해석하거나 혹은 현실과 어떤 대조를 해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역사에세이가 그렇듯 이 책 또한 우리가 잘못된 상식처럼 알고 있는 '오해의 역사'를 바로잡아 준다. 이 책에 의하면 우리의 역사인식은 일제의 식민치하 시절의 식민지사관에 너무도 큰 난도질을 당했다는데, 우리도 이에 경각심을 갖고 역사 주관을 다시금 뚜렸이 세워야 한단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고정적인 판단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하기도하며, 잘 모르던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기도 하고, 잘못된 과거인식에 일침을 가하기도 하며, 왜란 저술로 인한 문학적 깊이 또한 놓치지 않는 신봉승작가의 이 책은 정말 추천 할만한 좋은 작품이었다. 작가가 책 속에서 주창하는 역사는 반드시 공부를 해야만하는 중요한 학문이라는 사실에 완벽히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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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 사랑 하서명작선 56
헤르만 헤세 지음, 박석일 옮김 / 하서출판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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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제는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지(나르치스)와 사랑(골트문트)이란 두 명의 주인공으로 대표되는 개념의 대립을 전면에 내세운다. 지(이성)의 상징(보편성)인 나르치스가 견습수도사 생활을 하고 있는 수도원에, 사랑(감성)을 상징하는 골트문트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도사가 되기 위해 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성의 상징인 나르치스는 그답게 이미 등장시기부터 하나의 완성된 존재로써 이성 그 자체인 반면, 골트문트는 사랑(혹은 감성)의 상징다운 미성숙함으로 나르치스에 의해 자신이 가진 궁극점은 나르치스의 그것과는 다름을 깨닫고 자신의 경이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독자는 나르치스/골트문트의 대립이 아닌 하나의 또 다른 대립을 만나는데, 동등한 나르치스/골트문트에서 골트문트 중심으로 이야기의 초점이 변하면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르치스와 / 골트문트의 여성들이 라는 대립이 그것인데, 제목의 대립은 일종의 궁극적 화합 혹은 작품의 지향점 도달을 위한, 음양과 같은 하나의 대조를 통한 조화라고 한다면, 골트문트 스스로가 자신의 시작인 일종의 자궁이라 느끼는 여성들과 궁극적 지향성인 관과 같은 나르치스의 대립의 경우는 하나의 조화라기 보다는 대립에 가깝다. 물론 궁극적으로 작품속에서 이들은 지와 사랑과 같이 조화된 어떤 것,으로 표현되기는 하나 지속적인 서사는 이들을 일종의 대립으로 보고 그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과정을 골트문트의 여정에 슬적 비유한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나르치스와 여성들은 조화라는 궁극으로 귀결되나 전자의 경우 이미 등장시기부터 상반된 것이지만 조화를 이루고 있는다면 후자는 그와 반대로 타협점을 찾기 위한 거래와 같이 끊임없이 서로의 영역을 밀고 당긴다. 나르치스가 골트문트를 수도원에서 만나 골트문트의 잠재된 속성을 깨우는 것이 5장, 그리고 골드문트가 그 지와 사랑의 조화율을 찾기 위한 여행 과정이 10장을 통해 서술되는 과정은 독자들을 훈계 혹은 교육시키기 위한 시간이 아닌 함께 정도를 찾아가는 길을 통해 간단치 않게 서술된다. 이 과정속의 문체적인 것을 잠시 살펴보면 사건의 진행을 담당하는 서사보다 현재 골트문트의 상태나 처지를 설명하는 묘사가 더 많은 편인데, 이렇게 이야기를 느리고 점진적으로 진행시킴으로써 마찬가지로 골트문트의 여정에 대한 독자의 몰입과 이해의 정도를 높인다. 그리고 나머지 5장은 다시 조우하게 된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를 통해 작가는 골트문트의 여정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묻는다. 결국 책은 온통 이성과 감성의 조화 혹은 대립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작가는 끝까지 정답을 말해주지 않고 오로지 묻기만 한다. 그러나 이성과 감성이란 것에 대해 묻는다 해서 이 작품이 추상적일 거란 생각을 하는 것은 이르다. 여러모로 작가의 더 큰 애정과 비율을 가진 골트문트로 묘사되는 헤세가 말하려는 한 인간의, 혹은 보편적 존재로써 인간의 삶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때론 육체적 욕망에 찬 삶을 찬양하는 묘사도 많아 그것을 읽노라면 어떠한 하나의 삶에 대해 비판 혹은 판단하는 것은 너무도 성급한 일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어떤 삶이 이성적이고 감성적인지 판단하는 것도 웃기며 작가나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란 극명한 대조를 통해 그린 두 개의 판이한 삶도 결국은 하나로 꼭 닮은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그저 산다는 것-인생에 대한 찬양(viva la vida)과 삶에 대한 긍정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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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중국견문록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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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각자에게는 나름의 롤모델이 있어 지향하는 삶과 지양하는 삶 따위를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그 생각과 그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실천 사이의 괴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저자인 한비야는 어릴때의 꿈인 세계 여행을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날부터 7년간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을 톪으로서 스스로의 바라는 삶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긴급구호라는 새로운 분야에 다시금 도전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중국어를 배우려 했고 거기서 나온 책이 이것이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사실 글솜씨가 그리 좋은 편에 들지 못하는 이 분의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마찬가지로 진정성에서다. 사실 간혹 너무도 상투적이고 인위적인 묘사와 서술에 있어 뜨악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을 넘어, 생생한 경험의 흔적들과 그 경험속에서 얻은 깨달음 등은 정말 본받을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이 지루하게 보수적인 나라에 사는 꿈팔아먹은 이십대가 좀 읽었으면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 불평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그 불평에 대한 책임과 반성의 짐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 짐을 지지 않은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한비야는 그 치부를 비추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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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 연암 박지원 문학 선집
박지원 지음, 김명호 편역 / 돌베개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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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사망 200주년을 기념해 대표작을 엄선한 문학 선집을 내자는 의도에서 이 책은 발행됐다. 책은 크게 세 부분-소설/산문/(한)시-로 나뉘어져 있는데 소설과 산문은 한글번역본만 시는 한문으로 된 원문과 한글 번역이 함께 나와있다. 수능공부할 시절 몇 번 본 양반전, 호질, 허생전, 일야구도하기 등등 아는 작품도 몇 개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처음 보는 작품들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박지원의 사상들이 잘 드러나 있다. 북학파답게 옛것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버릴 것은 버려야하며 새로운 이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유연해야 한다는 주장을 무척 잘 느낄 수 있었다. 책의 제목인'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또한 연암의 사상이 그대로 들어난 단적인 예인데, 지난 중국의 한시 작문 형식에 집착해 새로운 시를 모 써내고 있는 조선의 처지를 비관해 새로운 방식과 작법으로 새로운 조선의 시를 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가는 이런 사람들에겐 자연스레 시기와 질투가 생길 수밖에 없어 열하일기를 쓴 후 청의 앞잡이, 오랑캐라는 모함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청운의 꿈이 없는 연암이어서 높은 관직에 까지는 올라가지 않아서 큰 위해를 당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연암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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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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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순한 제목의 '책'은 작가에게 있어 책이 가지는 위치와 크기, 의미 따위에 대해 쓴 수필집이다, 라는 건 표면적인 설명이고 실은 운동권이었던 작가의 정신적인 기둥이 되주었던 책들에 대한 독후감이다. 물론 초반부엔 어느 정도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책에 대한 수필도 있지만 그건 일부분일뿐이며 뒤로 갈수록 작가가 하고 싶은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초반부엔 사유 부족, 글솜씨 부족으로 아주 널리고 널린 그저 그런 수필이어서 그냥 그래서 빨리 처리하고 남은 책 봐야지,란 마음이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운동권에 대한(작가의 표현으론) '불온서적'들의 소개가 나오며 나는 약간의 생각을 더 하게 되었다.

운동권 후일담 문학은 몇 권 읽어보긴 했었는데 도무지 그 '운동권'이라는 것에 리얼리티를 느낄 수 없었거니와 이해는 커녕 흥미조차 느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너무도 지난 세대에 대한 이야기 같아서 어떠한 감흥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조국'의 이야기엔 그리도 무심하면서 나는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 폴리스나 알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 혹은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심지어 영화 아무도 모른다까지!)등에는 분노 혹은 동감하며 그들의 나라에서 민중들이 겪었을 여러가지 억압에는 상당부분 이해와 안타까움을 느끼며 인류의 보편적이거나 특수적인 역사에 대해 절망하거나 희망했다. 그러나 그리도 남의 남라 역사의 비극엔 쉬이 공감하면서도 우리의 과거엔 이리도 무관심-아니 오히려 왜 지난 얘길 꺼내냐며 윽박지르는 건가! 문화적 사대주의? 아님 지배 보수정치권의 공작? 모르겠다! 여러가지로 생각해봣찌만 쉬이 답이 나오진 않는다.(그러나 같은 한국의 역사라해도 이런 민주화!엔 딱히 흥미가 안 가지만 6.25의 비극엔 쉽게 눈물 흘린다. 왜일까.) 딱히 관심 없던 후일담 문학에 아주 큰 의문을 갖게 되었는데 그 의문이 '딱히 관심 없음'에서 나온 것이라니 재미있다. 일감으로 떠오르는 건 내가 읽은 후일담 문학의 문학적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지만, 꼭 맞는다는 시원함은 없다. 그렇다면 우선 완성도 높은 후일담 문학을 읽어본 뒤에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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