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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이름은 일본인이지만 어려서 영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일본인의 작품이 아닌 영국인의 작품으로 읽어야한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아무래도 언어가 아닐까. 번역을 이야기 할 때 종종 나오는 말이, 한국말의 정확한 표현들을 어떻게 다른 나라의 말로 옮기냐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나라 말을 한국어로 옮겼을 때도 그 나라의 표현들은 정확히 변환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 작가의 인종이나 출생이 어디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작가가 어떤 문화에서 자랐고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물론 이렇게 단순히 판단하기에 애매한 작가들이 있을 것은 분명하지만(성인이 되어서 타국으로 이주한 후 타국의 언어로 작품을 쓰는 경우) 이 작품은 분명한 영국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또한 영국인이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집사다. 20세기 초중반 명망 있는 가문에서 일하며 집사로서 최고의 순간들을 보낸 ‘스티븐스’는, 자신의 주인이 사망하면서 저택이 미국의 부자에게 넘어갈 때 함께 ‘양도’된다. 이제 저택을 꾸려나가는 하인들은 네 명 뿐이다. 새로운 주인은 자신의 휴가에 맞추어 스티븐스에게도 근교를 여행하라는 제안을 하게 되고, 스티븐스는 완벽한 집사로서 살 때는 상상도 못할 그 여행의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 그 여행 속에서 스티븐스는 자신의 과거를 추억한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 작품의 분위기다. 노년의 집사라는 화자의 말투는 늘 일관성 있는 쓸쓸하고 건조한-그러나 슬프지는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스티븐스의 담담한 목소리에 집중하게 되면 그가 일하던 달링턴 홀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알게 되는데, 역시 그 과거 이야기의 백미는 그와 ‘켄턴’ 양 사이에 있던 일들이다. 로맨스라고 부르기엔 스티븐스의 어조가 너무 담담하지만, 그것이 역시 이 작품의 매력이다. 담담한 만큼 조금은 더 안타까운 그 이야기를 읽노라면, 우리 또한 지난 사랑들을 자연스럽게 추억하게 된다.
하지만 지난 이야기들을 추억하는 인생의 황혼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이 작품이 절망적이지는 않다. 우리들은 늘 노인들을 보면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미래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젊음의 치기다. 너무나 젊기 때문에 자신은 노인이 될 거라는 분명한 사실을 외면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늙고 또 죽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노년의 삶에도 내일은 있다. 이 작품 말미에서 스티븐스는 자신의 지난 과거에 후회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후회의 감정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많지는 않지만 그에게도 남아 있는 나날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남아 있는 나날들에 충실하기로 마음먹는다. 은퇴한 또 다른 집사는 스티븐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