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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한동안 여러 여행기를 읽었고, 또 그것을 많이도 욕했지만 김영하의 것은 분명히 달랐다. 읽자마자 단숨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보통 여행기의 도입부분에는 ‘일상의 고단함’이 나오기 마련이고, 김영하 또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고단함을 말했는데, 그 부분부터 너무도 재미있었다. 왜 같은 여행기인데 이토록 다르단 말인가. 이유는 어쩌면 너무도 간단하다. 바로 그것은 필력이었던 것 같다.
프로작가가 갖는 글의 힘은 운 좋게 책 한 두 권을 낸 어중이 떠중이들의 글과는 분명히 달랐던 것이다. 사고의 깊이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 그리고 자연스러운 흐름 따위가 김영하의 글 속에는 있었던 것이다. 보통의 여행기 속에는 미묘한 우쭐함(?)이 녹아 있다. 그것은 해외여행이라는 것에 대한 작가들 스스로의 자부심이 녹아 있기 때문인데, 생각해보면 그런 것 따위를 자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모든 경험에 우열은 없으며 그것들은 전부 존중받아 마땅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오히려 여행에서 겪은 것들을 전달하려 했을 때는 그런 오만함 보다는 1. 후진을 위한 정보 전달에 집중한다거나, 2. 개인적인 감상들을 진솔하게 풀어놓거나 해야 한다. 그래서 전자의 것들이 극대화 된 가이드 북들은 나 또한 상당히 재밌게 읽는다. 반면 후자의 것은 보통 감상주의로 흐르기가 쉬워 읽기 힘들다. 가보지 못했던 곳의 지명만을 잔뜩 나열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고취된 글 따위는 남에게 감동을 주기 힘들다.
하지만 김영하의 글엔 적당한 선이 있다. 김영하의 글에서 나오는 감정은 단순히 과잉되어 흘러넘치는 것이라기보다는,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 우리의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삼투압 같은 것이다. 또한 시칠리아라는 낯선 곳에 대해 적당한 설명을 곁들여 가며 말하기 때문에 그곳이 마냥 낯설게만 느껴지지도 않는다.(이것은 내가 로마인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읽은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뭐 냉정하게 말하면 그냥 내가 김영하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책이 재밌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여행기에 대해 아주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되었었는데, 그나마 이 책이 그것들을 꽤나 풀어 준 것 같아서 마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