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엔 고전이라 부를 만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들이 없다. 한글이 보편화 된 것이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크겠지만, 그것 이전에 우리의 오래된 것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 고전이라고 부를 만한 작품은 없다. 고전이라 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대를 초월한 재미나 감동 혹은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재미나 감동 혹은 가르침 이전에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야 한다. 춘향전 등등의 -전 따위나 구운몽 등등의 교과서 고전 부분에서나 볼 수 있는 고전 소설들은 많은 사람들이 들어 알고 있는 유명작이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은 무척 드물다. 앞서 말했듯 같은 한글이라 보기엔 지금과 글이 너무도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고전에 대한 이미지는 고전=어렵다, 이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고전이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내 얉은 지식으론 얼른 대답하기 힘들지만 고전을 대체할만한 작품은 있다고 곧장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서두를 길게 늘인 독후감상문의 대상인 이 작품이 그렇다고 말하겠다. 책에 나와 있는 대로 두드려 보자면, 초판이 39쇄, 재판이 47쇄, 3판 4판이 각각 25쇄 23쇄로 총 134쇄이며, 2000년에 개정본으로 새로 나온 판본만 83쇄를 찍어 모두 합쳐 217쇄이다. 217쇄는 정말로 굉장한 숫자다. 요즘 잘 나간다는 하성란의 책은 3쇄를 못 넘기고, 김영하는 고작해야 10쇄를 넘기면 잘 팔린 것이고, 가장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은희경의 새의 선물은 그나마 12년만에 60쇄정도를 팔았다. 일단 널리 읽힌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합격이다. 또한 이 작품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우수하다.(교과서에 실려야 우수한 작품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시대상을 너무도 잘 반영했으며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에 대한 성찰은, 소설에 있어서는 이상적 모델로 삼아도 좋을 정도로 그 구조나 소재, 주제의 활용이 훌륭하다. 고전이란 검증이 된 훌륭한 문학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70년대를 떠올렸을 때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것들 중 하나인 난쏘공은 60년대의 김승옥과 함께 내 자신이 발견한 한국의 고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30년 밖에 되지 않은 작품을 고전이라 말하기 힘들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겠으나, 흔히 세계문학전집이라 불리는 외국의 고전들도 어지간해선 채 50년을 넘지 못했다는, 길어야 100년 조금 넘는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난쏘공의 고전으로써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진다. 분명히 널리 읽히기 위해서는 보다 보편적인 언어로, 보다 현대와 흡사한 언어로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
사실 난쏘공을 읽는 것은 처음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인가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집에 있었고,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난쏘공만 읽고 싶어져서 봤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마지막 구절의 처절함을 잊지 않고 있었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 교과서나 참고서나 모의고사에서 의례 발견했고 왠지 그런 작품들은 자연스레 잘 읽지 않게 된다. 반쪽이나 한 쪽 정도로 짧게 인용되곤 하는 구절을 읽을 때 마다 잘 쓴 글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찾아서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서 읽게 되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작가 조세희가 1975년부터 1978년 사이에 발표한 연작 12개를 하나로 묶은 책인데, 단편집이라기 보다는 연작 소설이라는 말이, 옴니버스 장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구조를 지닌 책이다. 주인공이 같은 작품도 있고 다른 작품도 있지만, 그 모두는 난장이 혹은 난장이 가족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단연 백미는 표제작인데, 어째서인지 문체가 가장 뛰어나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를 제외하고는 딱히 견줄 작품이 없을 정도로 문장 문장이 압권이다. 특유의 설명이 적은 짧은 문장의 연속된 나열과, 회상과 현재가 줄바꿈없이 이어지는 서술 형태는 조금은 읽기 힘든 면이 없잖아 있지만, 문체 자체의 뛰어남덕에 그것은 오히려 장점으로 보인다. 다만 줄바꿈 하나만으로 독자의 이해를 배는 더할 수 있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는 조금의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내가 겪지 않았지만 익히 들어 알고 있는 70년대에 대한 너무도 처절할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는 이 작품의 존재 이유이다.(실제로 70년대에 이 소설을 읽은 노동자들은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표제작을 읽었을 때 단지 아버지 난장이의 비극만으로 마무리 되었던 소설의 끝은 끝이 아니었고, 뒤로 이어지는 영수의 이야기는 너무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단지 노동자들만의 시선이 아닌 자본가들의 시선(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이나 제 3자의 시선(칼날, 육교 위에서 등)을 교대로 서술하는 것은 보다 작품의 질을 높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표제작 마지막 영희의 말을 통해 독자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서술이 작가가 이 작품을 쓴 진정한 의도가 아닌지 생각해본다.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큰 오빠는 화도 안 나?"
"그치라니까."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그래. 죽여버릴게."
"꼭 죽여."
"그래. 꼭."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