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를 그려라, 크리스 반 알스버그 (1)
크리스 반 알스버그
정지 화면. 담쟁이 덩굴로 덮인 벽. 좁다란 정원 입구. 안을 가리키는 남녀 어린이의 조각상. 당장 뛰어갈 듯한 자세의 소년. 그림은 물론 흑백. 마우스를 소년에게 댑니다. 문득 흑백의 소년이 연한 색조로 바뀝니다. 살짝 누르니, 다다다다 정원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소년. 다른 세상,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사이트 (http://www.chrisvanallsburg.com)는 이렇게 열립니다.

『압둘 가사지의 정원』(The Garden of Abdul Gasazi)도 그렇게 열립니다. 헤스터 아줌마가 뭐든지 물어뜯기 좋아하는 개, 프리츠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자 앨런은 온 신경이 쭈삣할 정도로 긴장하며 개를 돌보다가, 개가 가장 물어뜯기 좋아하는 모자를 숨긴 채 깜빡 잠이 들죠. 그런데 개가 산책 나가자고 코를 무는 바람에 깨어나 산책을 나갑니다. 은퇴한 마법사 압둘 가사지의 정원으로 들어가 버린 개. 불행히도 그 정원 앞에는 절대 개를 데리고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판이 붙어 있었고. 프리츠가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하면서 앨런은 압둘 가사지의 정원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압둘 가사지의 정원』 표지와 본문

정원 안을 보면 매우 신기합니다. 잘 다듬어진 나무들, 떼 지어 모여 있는 오리들, 마법사 압둘 가사지 등은 분명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뭔가 석상처럼 위압적이면서도 기묘하게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거든요. 마법사가 프리츠를 오리로 바꿔 놓는 바람에 앨런은 너무나 슬퍼하면서 그 오리를 안고 나오다가 모자가 날아가고, 오리도 그걸 잡겠다고 날아가 버립니다. 앨런은 풀이 죽어 아줌마에게 돌아와 프리츠가 마법에 걸려 오리로 바뀌고 모자를 잡으러 날아가 버렸다고 보고하지만, 부엌에서 달려 나온 건 바로 개로 돌아온 프리츠! 앨런은 어리둥절해집니다. 내가 지금 꿈을 꾼 건가? 그런데 프리츠는 바로 앨런의 모자를 갖고 놀고 있었죠!

나비 꿈을 꾸고 일어난 장자가 자기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자기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지요?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가다가 슬쩍 꼬여 있는 부분을 만나면 거기가 바로 압둘 가사지의 정원 입구랍니다.

이 책은 시각도 독특하고 은근히 몽롱한 흑백 그림의 맛이 그만입니다. 또한 모든 인물들은 마치 석상처럼 보이는데, 이런 느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크리스 반 알스버그, 그대는 뭐하는 사람이었소? 아, 조각장이였구랴.

크리스는 1949년에 미국 미시건 주의 조용한 시골 마을인 그랜드래피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또래들의 무언의 압력으로 인하야 (흑, 무서운 발언!) 크레용 대신 럭비공을 잡곤 했다네요. 하지만, 모형 차나 배 만드는 건 손에서 뗀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중·고등학교 때 수학, 과학을 매우 좋아했다니 남들이 보기엔 이공대로 가면 딱 맞았을 인물인데, 미술 수업 한번 들어 본 적이 없던 그는 (미국은 고등학교 때 우리나라 대학처럼 자기가 과목을 선택해서 수업을 듣습니다.) 느닷없이 미시건 대학에 입학 원서 내던 날, ‘College of A & D’라는 항목에 체크를 하지요. 당시엔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워낙 미시건 대학에 진학을 많이 해서, 입학 담당자가 아예 그 학교에 파견 나와 원서를 받았다는군요. 그런데 크리스는 어느 학부에 지원할 건지 체크하지 않은 상태에서 원서를 내러 갔다가 이 ‘College of A & D’라고 쓰인 항목이 뭔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건축 디자인 학부(College of Architecture and Design) 인데, 그 안에 미술대학도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어? 갑자기 그림 공부를 하고 싶어지는 걸? 고등학교 때 안 들었으니 대학 가서 듣는 것도 괜찮겠지~ 우연히도 그 해는 미시건 대학이 포트폴리오를 내지 않아도 입학을 허가했던 마지막 해. 입학 담당 직원을 꾀로 이겨 보고 싶었던 열일곱 살짜리 십대 아해는 자기 미술 실력을 한껏 부풀리고, 학교 수업은 안 들었지만, 따로 토요일마다 몇 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면접 통과. 입학 허가.

대학에 들어가서 그는 잘하는 학생들이 주변에 너무 많고, 수업량이 엄청 나 너무 놀랐답니다. 내가 여기 왜 왔던고, 싶었겠죠. 하지만 어려서 모형 차와 보트를 만들던 실력으로 조각에 뛰어들고, 무사히 졸업.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그 동네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스튜디오를 마련한 그는 조각을 하면서도 저녁 나절에는 집에 와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마다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본 아내가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인 친구를 소개해 줘서 출판사와 연이 닿게 됩니다. 그리하여 1979년에 나온 첫 책인 『압둘 가사지의 정원』은 다음 해에 칼데콧 아너 상과 보스톤 글로브 혼북 상을 받게 되지요. 독자들은 이 책의 무채색 그림의 기막힌 효과를 보며 찬탄했지만, 크리스 본인의 얘긴 듣는 사람 민망할 정도로 썰렁하군요.

“대학에서 나는 회화나 드로잉을 배우지 않고 조각 공부를 했다. 나는 만들고 싶은 조각을 먼저 그림으로 그렸다. 그리고 필수 과목 드로잉 클래스를 몇 개 들었다. 스물 아홉 살 때, 내 첫 책을 난 목탄으로 그렸다. 그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환상을 다루고 있는 그림책들은 그림조차 심히 ‘환상적’이지요. 배가 하늘을 난다거나 아이가 하늘을 날아오르거나 등등. 하지만 그의 그림은 대부분 의외로 실제적입니다. 그 이유를 직접 들어 보지요.

“내가 쓰는 이야기들은 대개 판타지다. 이상하고 믿을 수 없는 사건들에 관해 얘기한 경우, 독자가 지금 기술되는 사건이 진짜로 일어날 수도 있다고 그림을 보면서 믿게 되는 게 중요하다고 난 생각한다. 그래서 난 내 그림을 실제처럼 보이게 그린다. 그러기 위해 진짜 사람을 모델로 쓰고, 그림에 나오는 장소들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원근법과 빛의 법칙을 이용한다.”

흠. 지금 저 밖에 서 있는 나무나 건물이,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것들이 불쑥 엉뚱한 성질을 드러낸다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슬쩍 꼬인다면? 갑자기 제 주변에 존재하는 익숙한 것들이 모조리 비밀스럽게 느껴지는군요.

작가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왜 책마다 하얀 개가 나와요?’라는 거라는데, 이유가 있더군요. 정원 책에 나오는 개, 프리츠는 매제의 개인 불테리어 종을 모델로 했는데, 작가는 그 개를 조카처럼 여겼다네요. 그런데 뜻밖에도 그 조카 분께서 사고가 나 어린 나이에 ‘저 세상의 큰 개집’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그 개가 자기의 책에 기여한 것을 기리기 위해 웬만하면 앞으로 만드는 책마다 등장시키기로 (아주 작은 한 부분이라도)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얀 개는 『북극으로 가는 급행열차』(The Polar Express)에는 침대에 끼워져 있는 헝겊 인형으로 나오고, Just a Dream(꿈이야)에서는 차 위에 앉아 있지요 『벤의 꿈』(Ben’s Dream)에는 액자 속에 들어 있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The Sweetest Fig)에서는 은근히 익살맞은 중요한 조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북극으로 가는 급행열차』 표지
이 작가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후에 나온 책들의 플롯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는 점. 한, 두 권 보면 재미있는데, 비슷한 걸 연달아 몇 권 보면 지루하지요. 칼데콧 메달을 받은 『북극으로 가는 급행열차』(이하, 기차 책으로 부름.)는 영화로도 나왔는데, 플롯은 『압둘 가사지의 정원』과 똑같고, 채색 그림은 너무 칙칙하고, 글 내용은 심심해서 전 그저 그렇다는 느낌 밖에 안 들었거든요. 작가 자신도 나중에 그랬다네요. “더 잘 그릴 수 있었는데…….” (쩝~ 안타깝군!)

작가 인터뷰 내용을 읽다 보면 가장 자주 나오는 질문 중의 하나가, ‘그림책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나요?’입니다. 좀 식상한 질문이죠. 크리스 역시 같은 질문을 받았는데, 매우 다양하게 대답했군요. 옆집 아이에게서 훔쳤어요, 우편 주문했어요, 외계에서 갑자기 내게 빛처럼 들어왔어요 등등. 그러다가 그는 칼데콧 메달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난 내가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는지 모르겠다. 내가 썼던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를 모호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어 갑자기 완벽한 개념으로 구체화되었다. 그건 거의 ‘발견’이나 다름없었다.”

숲에 홀로 서 있는 기차라는 아이디어에서 기차 책은 비롯됩니다. 크리스는 계속 질문을 던졌지요. 만약 아이 하나가 기차에 올라탄다면? 그 애는 무얼 할까? 어디로 갈까? 아이가 올라탄 다음에 기차는 어디로 갈까? 북쪽은 어떨까? 북쪽엔 누가 살지? 작가는 그제야 크리스마스와 산타클로스와 믿음이라는 아이디어들이 모양을 구체적으로 잡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북쪽 나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탄 아이를 그린 거죠.

『북극으로 가는 급행열차』 본문 중에서

믿음. 작년 크리스마스에 제 아이에게 어느 낯선 이가 그랬습니다. ‘넌 산타클로스를 믿니?’ 이제는 ‘고딩’이 되어 버린 딸아이는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그 사람, 책상 앞에 쌓인 선물 더미를 가리키며 그러더군요. ‘난 믿는단다. 봐라, 믿으니까 이렇게 선물을 받았잖니?’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아이가 북쪽 나라에서 가져온 그 작은 은빛 딸랑이 소리, 어른 되어서도 들을 수 있는 자 누구일까요?
글쓴이
서남희 / 미국 유치원 교육에서 활용하고 있는 ‘꼬마 책(Mini―Books)’을 아이와 함께 직접 만들어 볼 수 있게 구성한 『아이와 함께 만드는 꼬마 영어그림책』을 만들었고, 뉴베리 상을 받은 작품 『별을 헤아리며』와 그림책 『꿀벌 나무』 『그 숲에는 거북이가 없다』 등을 번역했습니다. 그림책과 시, 바위산, 걷는 것과 잠자는 것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 웹진 열린 어린이에서 가져왔습니다.
www.openkidzine.co.kr/webzine_sub.asp?no=757&acode=01&page%5Fno=1&isl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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