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책읽는나무 > [퍼온글] 세밀화를 그리는 화가 이태수
세밀화가 이태수씨를 만나기 위해 그가 미술고문으로 있는 <도토리> 출판기획을 찾았다.
조용한 주택가 2층에 위치한 사무실. 그의 방은 의외로 평범했다. 대단한 그림 도구가 흩어져 있거나 아직 완성하지 못한 스케치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작업실을 예상했던 기자의 추측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스탠드 돋보기와 동식물의 사진으로 가득 찬 10권 이상의 사진첩은 역시 세밀화가의 방답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기자와 인사를 나눈 이태수씨는 할 말이 별로 없다며 검게 그을린 인상 좋은 얼굴에 겸손의 웃음을 가득 담아냈다.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에서 태어난 이태수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상경했다. 어린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리고 붓글씨를 잘 썼던 그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미대에 진학할 꿈을 가진다. 화실에서 지도해주시던 선생님은 가난하지만 완벽한 작품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예술가의 모습을 그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이태수씨는 한동안 스스로 '전시장 미술'이라 부르는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이런 작업은 그를 붙들어 두지 못했고, 10년 넘게 매달린 미술교육 과정을 통해 심각한 회의를 느끼고 '전시장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버렸다고 한다.
이런 그가 세밀화, 그것도 아이들의 그림책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게 된 계기는 현재 9살인 첫 아이 '휘조'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골라 주기 위해 여러 책방을 다녔는데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더군요. 단순화시킨 그림도 너무 엉망이었고, 그나마 좀 나은 것들이 외국 그림책이었는데 가만 들여다보니 모두 우리 것이 아닌 외국의 것들이었어요."
우리 실정에 맞는 그림책이 없다는 것이 그에게는 적잖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리라.
"아이가 처음 보는 그림인데, 아무것이나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제대로 된 우리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바로 세밀화라는 독특한 장르의 그림이다.
세밀화는 기존 그림의 양식으로 분류한다면 '자연 다큐멘터리 일러스트레이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태수씨의 세밀화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선 기존의 그림 작업들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진행되어 왔고, 전례가 없는 미개척의 영역에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작업한 그림만을 세밀화로 부르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우 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많은 자료들을 축적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말이 달리는 모습을 하나하나의 세분된 컷으로 나누어서 세세하게 관찰한 사진이나 그림들이 두꺼운 책 여러권 분량이 될 정도입니다. 얼핏 보면 같은 동작으로 보이지만 발의 위치나 모양들이 조금씩은 다르거든요.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그런 자료가 없어요. 제가 하고 있는 작업은 이런 기초적인 자료들을 축적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아이들에게 좋은 그림, 정확한 그림을 보여주겠다는 목적 뿐만이 아니라 기본이 되는 정밀한 자료를 축적하는 것. 이 말을 들으니 그의 단단한 어깨위에 짊어진 사명이 무척 중요해 보인다.
이태수씨는 개인적으로 디즈니 에니메이션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단순한 그림이면서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기술적인 노력의 면에서는 칭찬하고 본받을 만하다고 말한다.
「색깔을 갖고 싶어」라는 CD-ROM 제작 과정에서 간단한 에니메이션 작업을 맡았던 이태수씨는 이런 기술적인 면의 부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고 한다.
"몇 개의 컷으로 나누어진 그림을 받아 그 그림들을 다시 그리는 작업에 참여 했는데 그림이 잘 되었는가 못되었는가를 떠나서 각 컷들이 전혀 사실적이지 않았던 겁니다. 하는 수 없이 기본 움직임만 참고를 하고 대부분 다시 그리는 작업을 하기도 했어요."
실제로 이태수씨의 세밀화는 사진보다도 더 정밀하고 정감이 간다. 사진이란 속에 갇힌 식물이나 동물들 보다 훨씬 생생하게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보인다. 이런 세밀화를 하나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무려 열흘에서 보름정도.
"우선 무엇을 그릴 것인지 대상을 정하면 그것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이 가장 먼접니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많은 자료들을 모아야 합니다. 가령 민들레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하면 진짜 우리 민들레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많이 피는지 아는 것이 급선무죠. 그렇게 모아진 정보를 가지고 직접 산과 들을 누비며 찾아내는 거지요. 특히 우리 민들레를 그리기 위해서 2년 정도를 찾아 헤맨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찾아낸 식물들은 뿌리가 상하지 않게 정성껏 채집을 합니다. 그래서 요모조모 꼼꼼하게 관찰하고 밑그림을 그립니다. 여기까지가 가장 어려운 작업입니다. 나머지 채색은 오히려 쉬운 작업이죠."
세밀화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단지 사물과 똑같이 그리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진이 더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 그의 세밀화에는 바로 다양한 과학적 지식이 포함된 연출력이 있기 때문에 사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꽃의 경우 피는 꽃이냐 지는 꽃이냐, 아침의 꽃이냐 저녁의 꽃이냐에 따라 달라지고, 동물의 경우 수시로 변하는 다양한 모습들을 빠짐없이 관찰하고 조합해 내는 것이 바로 생명력을 부여하는 연출력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어려움은 많이 있습니다. 각 사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적당한 모델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창의적이고 과학적인 나름의 연출. 이것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실패를 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모든 작업이 끝나면 최종적으로 전문가들에게 감수를 부탁한다고 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이태수의 세밀화다.
"세밀화가 모든 것의 최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작업은 기초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일종의 예비작업이죠. 중요한 것은 이런 시도를 함께 해나갈 사람들이 많이 생겼으면 하는 겁니다."
작업 초기 일할 것이 없는 어려움 보다 열악한 경제적 사정이 그의 활동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고 이태수씨는 살짝 털어놓는다. 그리고 현재 가장 안타까운 것은 고급화된 세밀화 책들이 처음 예상했던 계층보다 부유한 계층에 더 가까이 가있는 현실을 꼽았다.
"원래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좋은 그림을 접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작업을 시작했어요. 저희 작업에서는 절대로 수입품을 쓰지 않아요. 순수하게 국산만을 추구하죠. 종이도 가장 좋은 국산을 선택하고, 인쇄도 국내에서 가장 좋은 곳에 맡기고. 하다보니 책의 가격이 어쩔 수 없이 비싸져버린 거죠. 의도하지 않았던 고급화로 정작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책들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런 예상치 못한 부분에 대한 대안으로 이태수 씨는 '흑백그림'을 이야기한다.
"조금 거칠고 투박하지만 제대로 그린 그림, 그리고 부담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가설 수 있는 그림을 고민하다가 흑백그림을 찾게 된 겁니다. 앞으로 거친 종이에 힘있게 흑백그림을 많이 그려볼 참입니다. 하지만 내용은 충실한 것으로 꾸며야죠."
그를 보고 있으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장인'이란 말이 스스로 떠오르게 된다. 순탄한 앞날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던 화가의 길을 박차고 나와 아무도 가려하지 않았던 어려운 길을 택한 것에서부터 그는 영락없는 장인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본래의 의미와는 좀 다른 장인으로 불려야 할 것 같다. 보통의 장인들이 자신의 예술적인 완성을 위해 살았다면 그는 자신의 예술세계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예술혼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좋은 어린이 책을 고르기 위한 방법을 일러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정성이죠. 정성을 들여 그린 그림은 그림의 완성도를 떠나서 확실히 차이가 납니다. 그림에 그만큼 정성이 깃들었다면 글은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좋을 겁니다. 얼마나 제대로 알고 그렸는지,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그렸는지 따져보고 고른다면 좋은 책을 고를 수 있을 겁니다."
도시에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인상과 말투로 처음의 '할 말 없다'는 발뺌과는 달리 구수하게 풀어내는 그의 말투는 차라리 정겨웠다. 자연과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자연을 닮아버린 것일까? 그가 앞으로 계획하고 있다는 부모님의 삶을 소재로 한 또 다른 그림의 세계를 기대해 봐도 좋으리라.
- 웹진 부꾸에서 발췌
오늘도 딸과 눈을 마주치며 소리 없이 웃습니다. 다른 부모들도 그렇듯이 내게는 아주
소중하고 스승과 같은 딸입니다. 딸이 태어나면서 내게 할 일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딸이 태어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어떤 아버지로 있어야 할
것인가 였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지내다가 딸에게 보여줄 책을 고르려고 책방에
갔다가 내 할 일을 찾았습니다.
그림책을 고르다 보니 좋은 그림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세밀화 쪽으로는 아예 없다시피
했습니다.
나는 늘 질 좋은 그림을 여러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오던 터라 출판미술은
내 생각을 실천하는 데 좋은 매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출판미술을 하려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면서 더욱 절실하게 느낀 것은 기본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자연스럽게 밖으로 취재를 나가게 됐습니다.
기초 자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세밀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딸이 자라면서 실제로 필요한 우리 자료를 만들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림책을 그릴 때 "정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태수 선생님은 1961년 3월 15일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태어나자마자 경기도 백학마을(경기도
연천군)로 업혀가 그곳서 중학 2학년까지 보냈습니다.
백학 마을은 벼농사를 주로 짓는 전형적인 농촌이었고 그의 부모님도 농사를 지었습니다.
세 명의 누나를 둔 막내아들 이태수 선생님은 어린 시절 비교적 조용한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시골아이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이태수 선생님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농사일을
거들거나 자연에서 놀았습니다. 마을의 형들과 함께 산으로 들로 물가로 돌아다니며 놀았던
추억은 현재의 그림 그리기에 정서적인 받침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시골아이였던 이태수 선생님은 중학교 2학년말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왔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환일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그림을 잘 그리고 붓글씨를 잘 써서
주변에서 "손재주 있다는 소리"를 듣는 아이였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미대에 진학할 마음을 먹은 그는 1978년엔 화실에 다니는 미대 지망생
이었는데 이때 만난 화실의 미술선생님은 그에게 화가로서의 자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는 홍익대에 진학하여 서양화과에 다니게 되었는데 이때엔 세잔이나 모딜리아니를 꿈꾸고,
곰브리치의 미술사를 읽는 평범한 미대생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전시장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고 "책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미대를 졸업한 뒤
얼마간 미술학원에서 미술지도를 하던 끝이었습니다.
대학 때 시작한 아르바이트까지 10년 넘게 미술교육을 한 결과, "거꾸로 가는" 제도권
미술교육에 심각한 회의를 느꼈고, 그와 함께 "전시장 그림" 그리기도 끝을 냈습니다.
"책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 중에는 그의 딸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로서 그가 딸에게 보여줄
그림이 거의 없었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딸이 스승이자 자신에게 할
일을 준 소중한 존재라고 합니다.
최근 그는 계절그림책의 봄편을 그리고 있지만 시간이 나면 흑백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는 흑백그림에 특히 애착이 간다고 합니다.
이태수 선생님의 책 그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도감이나 사물그림책에 들어가는 그림이고 또 하나는 그림책에 들어가는 그림
입니다.
도감에 들어가는 그림을 그릴 때 그는 작가의 감성은 최대한 자제한 채 개념을 중심에
놓고 그림을 그린다고 합니다. 그는 "최대한 보이는 그대로 그린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며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에 그림책에 들어가는 그림엔 비교적 작가의 감성이 들어가는 편이라고 한다.
가령 그는 "우리끼리 가자"에서 동물들을 사실에 충실하게 그리되 동물들의 몸짓이나
자세, 표정을 통해 최대한 의인화시키고 이야기 그림책으로서의 재미를 살리려 애썼다고
합니다.
"세밀화"는 처음부터 어린이를 위해 그린 것은 아니었으나 좋은 그림을 일상적으로 보고
자라야할 어린이들이 보는 책이 우선 중요했기 때문에 "세밀화"는 현재 유아들이나
어린이가 보는 책으로 우선 편집되어 출판되고 있습니다.
이태수 선생님의 작품으로는 [세밀화로 그린 보리 아기그림책 (보리(1994)], [할아버지 요강/
보리(1995)],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식물도감/보리(1997)],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동물도감/보리(1997)], [심심해서 그랬어 /보리(1997)], [우리끼리 가자 /보리(1997)], [우리
순이 어디 가니 /보리(1999)]가 있습니다.
- 애기똥풀의 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