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기 어려워졌다고 작년 내내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다. 막연하게 이유를 알고 있었던 듯하지만 명료하지는 않았다. 어쩌다 소설을 읽으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가 튀어나왔다. 해법을 제시하는 게 소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싫었나 보다. 소설뿐 아니라 시도 그렇고 영상매체물도 그렇다. 모든 시각매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 재현되는 것, 보여지는 것, 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부정적인 면을 먼저 찾고자 했다. 먼저 눈에 띄는 것도 당연했다. 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실을 그대로 혹은 비슷하게 재현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나를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떻게 현실을 알 수 있나도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여성을, 약자를, 소수자를, 말하지 않으면 어떡하냔 말이냐고, 그러면서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느냐고, 이랬다 저랬다.

우연히 영화를 한 편 봤다. <불도저에 탄 소녀>. 제목도 맘에 안 들고 가족구성원에 엄마가 죽고 없는 것도 맘에 안 들고 어린 '남'동생이 있는 것도 맘에 안 들고 '소녀'가 주인공인 것도 맘에 안 들... 아 이건 아닌가. 아무튼 고구마 백만 개. 영화를 보는 내내 드는 감정은 분노다. 그와 더불어 분노라는 감정으로 우리가(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분노는 힘이라 했고 분노는 용기라 했으며 분노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감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자의 분노는 승인/정당화/우쭈쭈되지만 여자의 분노는 히스테리/미친/이상한,으로 취급된다. 영화 속 주인공, 이제 스물인 여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냥 가만히 입 처닫고 쭈그려 살라는 말인가? 그 아이는 도망갈 수도 없다. 어린 동생(왜 남자냐고!)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끝까지 어린 동생을, 아픈 엄마를, 별볼일 없는 아빠를, 껴안고 살아야 하는가? 왜? 여자는 돌봄의 동물이라서? (코웃음) 아무래도 의심을 거두기 힘들다. 시나리오 누가 썼는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성감수성이나 의식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현실의 재현은 쉬운 것이 아니다. 재현 속에 적어도 생각의 방향은 실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민한 흔적은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무슨 대상을 받았다는 청소년 소설을 읽었다. <훌훌>. 제목은 훌훌인데 내용은 '훌훌'하지 않다. 이 소설도 역시 (나는) 고구마 백만 개다. 주인공이 '소녀'이며 어리고 '배다른' '남'동생이 등장하는 것이 불도저 영화와 똑같다. 엄마가 없는 것도 비슷하다. 심지어 얘는 입양아야. 나는 입양이라는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고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당사자가 아니니 그런 말을 하지, 뭐 그런 말 들을 수도 있지만, 으레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관습일 뿐이다. 편협한 생각을 버리자. 어째서 주인공이 남자이고 그 남자가 어린 동생을 돌보겠다고 마음먹으면 안 되는가? (아무도 안 된다고는 안 했지. 다만 그렇게 안 쓸 뿐이지.) 입양된 남자가 한 명 더 나오기는 한다. 주인공의 처지를 이해하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관계로. 어째서 '또' 어린 여자가 어린 남자아이를 돌보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사회적 지탄은 여성에게만 씌우는 굴레가 아닌가? 이 소설의 주인공 주변에는 그래도 친구들이 있다. 그 아이는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고 소년원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아픈 할아버지이지만 그에게는 손녀에게 물려줄 재산도 있다. 불도저 소녀에게는 아무도 없다. 친구도 다정한 어른도 아무도. 사회적 '매장'을 당하기 일보직전에 죽은 아빠의 보험금이 지급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어쨌거나 큰 돈이 생겼으니 이제 이 소녀의 앞날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돈이 많으니 어린 남동생이 있어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이 되나요? 이게 현실인가요? 바람직한 결말인가요? 돈 때문에 그 사단이 났는데, 그래도 나쁜 놈은 승승장구하는 세상인데, 그냥 돈만 손에 쥐어주면 그만인가 말이다. 그렇게 관객을 일단 안심시키면 그만인가 말이다. 다행이야, 그래도 돈이 생겼네, 정말 다행이야. 그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집도 돈도 사람도 없는 사람들은?

며칠 전 읽은 이서수의 소설 <미조의 시대>도 여기에 약간 겹쳐진다. 고구마 백만 개,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나는 팍팍한 현실에 벗어날 길 없이 몸부림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삶을 보기 힘들다. 일면 나 같아서, 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상황이 무서워서, 이런 현실이 죽을 때까지 반복되는 게 삶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아서, 인물에 너무 깊이 몰입해서, 온갖 상황들이 화나고 짜증나서, 이유를 줄줄이 댈 수 있게 힘들다. 주인공에게는 역시 부양해야 할 어머니가 있고 돈은 없다. 친구 언니는 혼자이지만 일과 윤리적 가치관 사이에서 원형탈모를 겪을 정도로 힘든 삶을 산다. 그래도 이 소설은 단순한 재현에 그치지는 않았다. 역사의 시공간을 현재에 잘 버무렸다. 버무렸다는 표현이 조금 가볍기는 하지만. 흔히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에 가미되는 평면성이 조금 덜한 것도 장점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너는 이게 시 같니? 라고 물으며 컴퓨터에 시를 쓰는 어머니나, 미조가 친구 언니를 생각하는 양가적 감정 같은 것들. 그러나 또다시 여성에게 전가되는 돌봄의 문제. 자본의 문제.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역사.

같이 책을 읽는 분이 추천하셔서 몇년 전 팟캐스트를 들었다. 한강이 초대손님이었다. 그의 작품은 신기하게 하나도 읽은 것이 없다.(이럴 수가) 너무 유명해서 꺼려했나? 아무튼 그러하지만 팟캐를 들으면서 소설가가 말하는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듣고, 생각했다. 모든 글이 그러하듯 전제는 질문이다. 무엇인가, 어떠한가, 왜 그러한가,를 끊임없이 던지고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 이런 내용의 말을 조곤조곤 하는 한강은 멋있었다. 아마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결국 소설은 그런 것이다. 단순한데 단순하게 생각하기를 거부했던 모양이다. <채식주의자>를 검색했더니 전자도서관에 없다. 전자책이라도 사야 할까.

<한국의 탈식민 페미니즘과 지식생산>이라는 어려운 책을 읽다가 아래와 같은 구절을 만났다. 좀은 추상적이긴 해도 대략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그래서 소설이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 '제대로' 쓰기도 읽기도 어려운 거지.


"이러한 픽션화는 소위 사실·실재라는 것과 그것의 재현 사이에 있는 거리를 잠식해 매끈하게 통합된 하나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역사 속의 여성들이 갖는 풍부한 결들과 질들을 풀어헤쳐 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즉 서발턴 여성을 정확하게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게 아니다. 계보 속의 여성들에게 각각 있는 재현할 수 업는/재현되지 않는 부분들을 봉합하거나 총체화하지 않고 아이러니와 신화와 혹은 유령적 형상들로 분명 있지만 적확하게 재현되지 않은 여분의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다. 문학적 형상화란 인간, 세상, 관계들의 다의적이고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인 결들을 봉합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솔기들을 뜯어내면서, 누구도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묘연한 구석과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즉 완전한 재현을 애초에 꾀하지 않으며 적확한 재현을 피해감으로써 텍스트 곳곳에 잉여와 초과 지점을 생성함으로써 새로운 상징적 의미화들이 텍스트를 흘러 넘치도록 한다."

<한국의 탈식민 페미니즘과 지식생산> 333




이 구절 읽으면서 자연스레(?) 김혜순이 떠올랐다. 나는 이 시인의 시 역시 제대로 읽은 것이 없다.(이럴 수가 2) 그럼 다른 책은 읽은 것이 있나? 아니다. 책 두세 권의 앞부분만을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김혜순이 떠올랐다.



"나는 여성시인은 이렇게 세 번의 죽음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시'라는, 여성시인만의 언술을 발명한다고 생각해왔다. 여성시인의 시는 첫번째 죽음 여행의 시, 두번째 죽음 여행의 시, 세번째 죽음 여행의 시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 죽음 여행의 시는 자신이 버려짐, 부재, 쫓겨남에 처해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시다. 이런 유형의 시는 대개 독백적 진술을 주로 하며, 자아를 극적인 무대에 세운다. 자신의 일상을 무대에 오르게 하고, 화자는 시 안에서 징징거린다. 이 유형의 시는 소녀인, 미성숙한 화자를 내세운다. 화자는 끝끝내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팽개치고, 자신의 태생적 한계 주변을 서성거린다. 두번째 죽음 여행의 시는 가정과 체제, 공동체 내에서 잠식당한 자아 정체성을 노래한다. 이 노래들은 한결 일상적이거나, 현실적인 문제들을 시의 배면에 품고 있으며, 시 안에서 성숙된 여인이 화자로 등장한다. 모성을 내세우거나 부과받은 모성성을 비난하며, 자신의 결혼, 관계, 노동을 화제로 삼는다. 세번째 죽음 여행의 시는 분열적이고, 산포되며, 공동체의 주문에 대해 분열된 자아 정체성, 분자화된 언술을 들이미는 발명자들의 시다. 이런 유형의 시의 화자는 어떤 복수성(複數性)을 내포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 유형의 시들은 언어의 운용, 모국어 문법에 대한 파괴에 열중하기도 하고, 남성과 여성으로 환원되는 은유 체계에 대한 전복, 다성악적 파동의 언술을 내보이기도 한다."

<여성, 시하다> 18~19



시인에 대해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나 소설이나 그밖의 다른 창작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 같다. 유독 '징징거린다'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니 나는 지금 징징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미성숙한 화자'이자 독자. ㅋㅋㅋ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또 <딕테>의 차학경이 떠올랐다. <딕테> 역시 아직 안 읽었다.(이럴 수가 3) 운 좋게 구한 책을 휘리릭 한번 넘겨보고 아, 이거 완전 읽기 어렵겠구나 싶어 덮어두었다. 한강 팟캐를 추천하신 그 분이 역시 추천하신(감사!~) 장혜령의 팟캐 차학경 편을 들었다. 간간이 그가 낭독하는 구절들을 들으며 역시 완전 읽기 어렵겠구나를 반복생각했고 이걸 내가 읽어낼 깜냥이나 되나를 생각했다. 아직 책을 읽기 전이지만 '몸으로 글쓰기'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쓰고 싶다,와 그렇지만 괴로운 건 싫은데, 사이를 얌체 같이 왔다갔다 하면서.

소설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해서 차학경의 <딕테>까지 왔는데, 오니까 그만 할 말이 떨어졌다. 틈틈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해야 겠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거기서 나는 어떤 질문을 길어올릴 것인가. 나의 질문은 무엇인가.























<불도저에 탄 소녀> 영화 소개 ↓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20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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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5-28 0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설 잘 못읽어요! (영화도..) 뭐랄까 읽을 수 있는 양이 정해진 듯… 아무래도 ㅠㅡㅠ 만날 수 있는 사람 정해진 것과 비슷 ㅋㅋㅋ 사람 못만나는 거랑 같은 이유이지 않나 싶기도 해요..? 그래서 차라리 남의 독후감을 읽거나 평론을 읽 ㅋㅋ
그렇지만 제대로 읽은 것이 없는 과거의 나가 있으니 또 다르게 해석하기 위해 읽기를 멈추지 않는 나도 있지 않을까요?
진지하고 다정한 난티님! 언제나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을 쓰는 걸 두려워하지 마세여^^ 난티님은 변할겁니다!! 그 변하는 과정을 써두세여 🔥😘

난티나무 2022-05-30 01:57   좋아요 0 | URL
주말에 노느라 ㅎㅎㅎ 답글 이제야 달아요.
영화 ㅠㅠ 드라마도 그렇고 입에 욕을 달고 봐야 해서 ㅎㅎㅎ
읽을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는 말씀 와 닿네요!!
진지 다정에 좀 욕심 부리면 유쾌 하고 싶네요.^^ 쟝쟝님처럼!!! 헤헤
🙏 좋은 말씀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