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트 에바 에거,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프롤로그를 읽는데 눈이 번쩍. 



"나는 고통에는 높낮이가 없다는 사실 또한 짚고 넘어가고 싶다. 어떠한 것도 내 고통을 상대의 고통보다 더 나쁘거나 더 좋게 만들지 않는다. 한 사람의 슬픔을 다른 사람의 슬픔과 비교하여 상대적 중요도를 표시할 수 있는 그래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제 삶의 여러 가지 일들이 지금 매우 힘들어요. 하지만 제겐 불평할 권리가 없어요. '아우슈비츠'가 아니니까요." 이러한 종류의 비교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축소하거나 깎아내리게 만들 수 있다. (중략) 

어느 날 아침 나는 두 명의 내담자를 연이어서 상담했다. 두 사람 모두 40대의 엄마였다. 첫 번째 여성은 혈우병으로 죽어가는 딸을 두었다. 그녀는 상담 시간 내내 울면서 어떻게 신이 자기 아이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 여성의 이야기에 매우 가슴이 아팠다. (중략) 

그 다음 내담자는 병원이 아니라 컨트리클럽에서 막 도착한 참이었다. 그녀 역시 상담 시간 내내 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새 캐딜락이 조금 전에 배달되었는데 자신이 원한 색이 아니어서 화가 나 있었다. 밖에서 보면 그녀의 문제는 사소해 보였다. 특히 죽어가는 아이에 대해 비통함을 토로한 이전 내담자와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 관해 충분히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 색깔에 대한 실망의 눈물이 사실은 그녀 삶의 더 커다란 문제들이 그녀가 바라는 대로 풀리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외로운 결혼 생활, 또다시 학교에서 쫓겨난 아들, 남편과 아이에게 더 도움이 되기 위해 포기했던 커리어에 대한 열망 등의 문제들이었다. 우리 삶의 작은 속상함은 더 커다란 상실의 상징일 경우가 많다. 겉보기에 사소해 보이는 걱정거리들이 더 커다란 고통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날, 매우 달라 보이는 두 내담자가 공통점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았다. 서로와도 그렇고, 여느 곳의 여느 사람들과도 그랬다. 두 여성은 자신의 기대가 무너진 상황, 하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응하고 있었다. (하략) " 


보통은 캐딜락 색 때문에 우는 여성을 비난한다. 나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일차원적이고 일방적인 판단이다.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이런 경우를 봐왔나. 나 또한 얼마나 많이 엉뚱하게 눈물을 흘렸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아이가 이유도 없이 짜증을 내거나 사소한 일에 화를 낸다고 덩달아 화냈던 수많은 경우들을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그 감정들 뒤에 숨어있는 고통의 원인을 짐작하고 그 사람을 껴안는 포용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숨겨진 고통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고통에는 높낮이도 없고 크기의 차이도 없다. 내가 겪는 고통이 가장 힘들 뿐이다. 섣불리 다른 사람의 고통에 판단질을 하지 말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별것 아닌 거라고 말하지 말자. 나의 고통은 '표현'하자. 다른 사람이 '표현'하는 고통을 주시하자. 물론 지금까지 그랬듯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자잘한 속상함이 어떤 상실의 상징인지 이제는 좀 알아차릴 때도 되었다. 방어 기제를 벗어던지면 그 안에 내가 있을까? 





"나는 분노의 힘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전혀 죽이지 못한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는 살아 있다.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쉽지 않다. 과거에 관해 기억하거나 이야기할 때마다 두려움과 상실감에 다시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이 매우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순간 이후로 나는 감정들은, 얼마나 강력할지는 몰라도 결코 죽음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감정들은 일시적이다. 감정을 억압하는 것은 감정을 떠나보내는 것을 더 힘들게 만들 뿐이다. 표현Expression은 우울Depression의 반대말이다." (67%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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