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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삼월 연작부터 한달의 절반을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으며 보내는 지금도 그녀의 소설은 끝이 없이 나오고 있다. 온다 리쿠에게는 분명 이야기 책이 열리는 나무가 있을거라고, 미스터리 이야기 책이 열리면 후다닥 따서 출간을 하고 그 책이 출간하는 순간 다른 책이 여물고, 여러 빛깔의 책이 여물어가는 책을 분명 그녀는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그녀의 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나 하나의 책마다 알알이 꽉 들어찬 맛난 책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만날 때마다 같은 작가의 책을 손에 든 내게 "지겹지 않냐?" 라는 핀잔을 "너도 읽어봐!" 라는 말로만 넘기는 내게 이야기 책이 열리는 나무는 분명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성능 좋은 나무로. 다작을 하는 작가에게 편견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어내려 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설마, 이번 책도 괜찮을까?' 그래, 난 실망을 바랬는지도 모른다. 파도처럼 치는 그녀의 신작들이 무서워서 너무 반가운 파도임에도 괜히 그 두근거림이 버거워서 그녀의 소설이 나를 실망시키를, 파도타기를 그만 즐길 수 있게 되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두려웠던 건 파도타기가 아니라 밤마다 생각나는 책 속의 몽환적인 세계였다. 가고 싶다, 주인공들의 대사 속의 그곳, 작가의 묘사로 태어나는 그곳에 가고 싶음이 간절해질수록 온다 리쿠의 세계는 내게 점점 이어도가 되어간다.
이어도를 한 번 경험한 사람은 다시 전과 같을 수 없다고, 살아 있는 내내 이어도를 그린다고. 그 처절함은 아니라도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고 나면 왜이리 제어가 안 되는 것인지. 하루종일 마음은 슁숭생숭하고 내 주위를 둘러싼 바람들만 스산하게 느껴진다. 진한 커피를 몸으로 부어놓고도 모자란 듯한 깨어있음을 요구하는 작가, 온다 리쿠. 아직 그녀에게 실망할 때는 아닌 것 같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쥐고 흔들었다. 나를 배려하는 듯하면서도 매몰찼고 뒤돌아 서려하면 끈하나 내게 휙 던지고 실마리를 제공하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실마리를 잡고 갈 마음이 생겨 따라가면 누군가가 나와 가위로 그 끈을 가차없이 잘라버린다. 비명이 입까지 치밀어 올랐을 때 다른 누군가가 나와 내게 방문을 열어준다. 모든 비밀이 풀릴 것 같은 환한 무대 조명처럼 반짝이는 방, 그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또 속고 만다. 그 방은 다른 연극이 시작되는 무대 였을 뿐, 마지막에 가서는 온 몸의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느낀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시작과 끝이 어딘지 몰라 헤매는 나는 꼭 뫼비우스 띠를 붙잡고 우는 어린아이 같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는 뫼비우스 띠의 비밀이 풀렸다고 하는 기사를 봤다. 뫼비우스 띠 의 비밀도 풀렸는데 책 속의 비밀이야 곧 풀리겠지 쉽은데도 책을 접었음에도 왜 갈피가 잡히지 않을까? 나 어디서 부터? 언제부터? 잘못 읽은거야? 아니면 놓친건가?
이해 못함, 그 도장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의 뒷 표지에 찍어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온다 리쿠가 이해 못한 독자라는 도장을 찍어줄지도. 다시 읽기 전에 이렇게 주저리 이해 못했다고 투덜 거리는 것은 내가 이해한 것을 정리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 <디 아더스 (The Others, 2001)> 를 처음 보고 혼란에 빠졌을 때처럼 이 책도 내게는 혼란 그 자체이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을 발산하는 이 책을 손에 놓을 수 없음을 어떡해야 할까.
두 번째 손에 든 책은 분명 무언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올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세계로 발을 들여놓기가 망설여짐은 온다 리쿠의 치밀함에 또 혀를 내두를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까?
줄거리를 적을 수가 없음은 제가 아직 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혹여나 먼저 소화해 내신 분이 계시다면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감미로울만큼 치밀한 살인 그리고 연극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