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와 친구들 플랩 사운드북 토마스와 친구들 15
월버트 오드리 지음, 아동문학 편집부 옮김 / 아동문학사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책 들고 나가! 이모의 목소리가 지붕을 들었다 놓고서야 주호와 나는 마당으로 후다닥 도망을 나오고야 말았다. 나오는 길에서도 주호는 토마스씨를 누른다. "칙칙칙칙칙~~" 우렁찬 토마스씨의 소리가 마당을 가르고 모래 장난하던 이웃집 꼬마 공주님이 달려오고 우리는 모래밭에 털썩 앉아 토마스씨와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너무나 유명한 토마스씨를 주호에게 소개 시키는 순간 나는 이미 엄마보다 더 고마운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 시간은 매우 짧다, 아쉬워라;;;;) 책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고맙습니다" (물론, 발음은 정확하지 못하다. 고마~스니다 <-이정도;;;;) 를 여러 번 말하며 책 옆에 붙어있는 버튼을 누르기 시작하는 주호는 꺄르르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웃음소리를 내어준다. 이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내가 갖으려 했던 책에 대한 아쉬움은 하늘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신나는 여행을 떠나볼까?

 

#토마스 아저씨 어딨어요? 깍꿍! -플랩북

 이 책은 플랩북으로 곳곳에 주인공들이 숨어있어서 들춰(?) 보는 재미가 있다. 문을 열면 토마스씨가 나오고, 목장의 지붕 위를 열거나, 목장을  풍차를 열면 헤롤드와 버티가 나온다. 깍꿍하면서! 물론, 차가 운전 중이니 신호등도 필수로 숨어있다. 주호가 이미 여러 번 열어 보아서 이미 어디에 숨어있는지 금방 알 수 있지만 주호는 처음 찾을 때처럼 신이 나서 꺄르르르~ 웃으면서 아직도 찾는다. (아이들의 반복 기쁨의 끝은 어디일까? ^^;;)

 

아이들을 볼 때면 참 신기한 것이 깍꿍 놀이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어디 숨었는지 다 알면서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며 마냥 내 기분도 좋아진다. 아직 손놀임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은 플랩을 열기 위해 손을 많이 사용하게 되니 두뇌개발에도 좋을 거란 생각이 든다.

 

#소리를 들려주세요! 칙칙칙칙-사운드북

 첵 옆에는 캐릭터들의 스티커가 붙여 있고 그것을 누르면 소리가 나오게 된다. 총 5가지의 소리가 생동감 있게 들려서 이모는 시끄럽다고 싫어하지만 주호와 나는 신이 난다. 역시 상상만으로 책은 충분히 재밌지만 소리가 나오니 더욱 재밌다. 캐릭터를 찾을 때마다 사운드 버튼을 누르며 신이 나는 아이의 모습은 천진난만 그 자체다.

 

 또한 아이에게 소리를 들려주고 캐릭터를 찾으라는 놀이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이 나서 응한다. 5개인 소리 버튼이 얼마나 아쉬운지 우리는 다 책을 잠시 내려두고 동물 소리를 내가 내면 주호가 동물 이름을 맞추는 놀이도 했다. (누나가 잘 못 내서 미안해, 주호야)

 

 

토마스씨와의 여행은 생각보다 아주 짧다. 하루만의 휴가라서 그런가. 5장이 전부라서 주호는 책이 끝나자 자꾸만 뒤를 넘겨보고는 했다. 바다에서의 휴가도 보여주었으면 좋았을텐데란 아쉬움이 남는다.

 

신나고 즐겁게 놀면서 보느라 주호와 이 책을 본 날  밤에 푹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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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다 - 나를 서재 밖으로 꺼내주시오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진원 옮김 / 지니북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경우에 함께 밥을 먹고 싶은 사람이라는 건 굉장히 편하다는 말이 된다. 오쿠다 히데오, 그와 같이 밥을 먹고 싶어졌다. 이 사람 이렇게 다 보여줘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이야기는 적나라하다. 숨김없이 내뱉는 말들은 웃음을 연발하고 가끔은 난감한 표정을 짓게도만든다.

 

 그를 만나보고 싶었었다. 책 속의 이라부가 아닌 이라부를 탄생시킨 오쿠다 히데오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듣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오고 싶었다. 그와 대화를 하고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스트레스 따위 저 하늘로 멀리 멀리 날아가버릴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 건 <공중그네> <인더풀> <남쪽으로 튀어>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 아닐까? 그 모든 것이 충족되는 <오! 수다> 이 책 속에서 오쿠다 히데오를 만나고 그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 든다.

 

 오쿠다 히데오, 그는 이라부가 아니었다. 알고보니 이라부를 찾아 온 다양한 정신적으로 불안이나 장애를 갖고 있던 환자들의 모습이 오쿠다 히데오의 모습과 더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읽는 동안 이 장면에서는 어떤 환자와 닮았나 기억을 끄집어 내기도 했다.

 

 <오! 수다>는 오쿠다 히데오의 기행에세이라고 한다. 이 책은 내가 그 전에 알고 있던 기행에세이와는 너무 다르다. 대체로 기행에세이 하면 바람이 부는 것이 느껴진다거나 풍경이 눈 앞에 아른 거린다거나 그 곳으로 떠나보고 싶다거나 그런 느낌을 주지만 이 책은 부침개를 부칠 때의 고소한 냄새, 탕을 끓이느라 뿌옇게 올라오는 김의 모습이 책을 덮을 때까지도 떠올랐다. 왜 책 제목을 이렇게 지었을까? 읽는 동안 그 생각을 열 번은 넘게 한 것 같다. 차라리 <오! 먹자>가 더 낫지 않았을까? 아니면 성석제 작가의 <소풍>처럼 멋진 제목을 하나 지어서 군침이 돌게끔 하는 것도 좋았을 듯하다.

 

<오! 수다>는 오쿠다 히데오 한 출판사의 편집부의 사람들과 함께 항구 주위에 있는 맛있는 음식점이나 주위의 휴양지를 소개하는 '항구 도시 순례' 를 시작한다. 총 6 곳의 항구를 들리고 그곳의 특산물이나 유명한 음식점을 돌아보는 것으로 순례는 마무리 되는 것 같다. 이 중 6곳에 우리나라의 부산도 포함되어 있어 신기한 느낌이다. 하지만 왜 나는 그가 말하는 곳이 이미지화 되지 않는 것일까?  

 

 오쿠다 히데오의 기행 에세이라고 해서 어쩌면 기대를 조금 했는지도 모른다. <남쪽으로 튀어>에서 오쿠다가 그려준 섬에서의 풍경을 이 책에서도 기대했었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오쿠다는 이 책을 일기를 쓰듯 술술 써내려가고 있어 그의 중간중간 생각들로 채워진 이야기들은 어딘지 모르게 여행지에서의 깊이있는 사색은 찾아 볼 수 없다. 음식에 관한 이야기 역시 그 순간의 맛을 이야기 하는지라 맛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침이 꼴깍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저자는 독자에게 그런 것을 주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무게감이있고 생각이 깃든 기행에세이 만을 만난 독자들에게 웃음 나고 가벼운 기행에세이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 책을 덮으며 그 생각을 했다. 오쿠다 히데오라는 사람의 성격과 생각을 알게 된 것만으로 만족하자고. 참 독특하고 유쾌한 사람임은 틀림 없지 않은가!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살이 2kg 찌는 귀여운 오쿠다 히데오를 상상하면서 그의 말투를 따라하다보면 어느새 웃음이 나오게 된다. 또한 나는 여행한 적 없는 일본의 기행에세이라서 공감이 적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일본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책 속의 장소와 맛집을 가보고 싶지 않을까?

 

 하나 더 아쉬운 건 그의 기행에세이는 가방 하나 들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여행이 아니라 두둑한 지갑을 가지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기행에세이인데 사진하나 없는 것이 조금 아쉬웠고,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참 많은데도 사람냄새 보다는 음식 냄새가 더 많이 맡아졌으며 편한 보다는 어색함이 감돌았던 책이라 조금은 저자에게 섭섭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오쿠다 히데오라는 작가는 생각보다 더 귀엽고 생각보다 더 매력 있는 사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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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삼월 연작부터 한달의 절반을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으며 보내는 지금도 그녀의 소설은 끝이 없이 나오고 있다. 온다 리쿠에게는 분명 이야기 책이 열리는 나무가  있을거라고, 미스터리 이야기 책이 열리면 후다닥 따서 출간을 하고 그 책이 출간하는 순간 다른 책이 여물고, 여러 빛깔의 책이 여물어가는 책을 분명 그녀는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그녀의 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나 하나의 책마다 알알이 꽉 들어찬 맛난 책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만날 때마다 같은 작가의 책을 손에 든 내게 "지겹지 않냐?" 라는 핀잔을 "너도 읽어봐!" 라는 말로만 넘기는 내게 이야기 책이 열리는 나무는 분명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성능 좋은 나무로. 다작을 하는 작가에게 편견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어내려 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설마, 이번 책도 괜찮을까?' 그래, 난 실망을 바랬는지도 모른다. 파도처럼 치는 그녀의 신작들이 무서워서 너무 반가운 파도임에도 괜히 그 두근거림이 버거워서 그녀의 소설이 나를 실망시키를, 파도타기를 그만 즐길 수 있게 되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두려웠던 건 파도타기가 아니라 밤마다 생각나는 책 속의 몽환적인 세계였다. 가고 싶다, 주인공들의 대사 속의 그곳, 작가의 묘사로 태어나는 그곳에 가고 싶음이 간절해질수록 온다 리쿠의 세계는 내게 점점 이어도가 되어간다.

 

 이어도를 한 번 경험한 사람은 다시 전과 같을 수 없다고, 살아 있는 내내 이어도를 그린다고. 그 처절함은 아니라도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고 나면 왜이리 제어가 안 되는 것인지. 하루종일 마음은 슁숭생숭하고 내 주위를 둘러싼 바람들만 스산하게 느껴진다. 진한 커피를 몸으로 부어놓고도 모자란 듯한 깨어있음을 요구하는 작가, 온다 리쿠. 아직 그녀에게 실망할 때는 아닌 것 같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쥐고 흔들었다. 나를 배려하는 듯하면서도 매몰찼고 뒤돌아 서려하면 끈하나 내게 휙 던지고 실마리를 제공하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실마리를 잡고 갈 마음이 생겨 따라가면 누군가가 나와 가위로 그 끈을 가차없이 잘라버린다. 비명이 입까지 치밀어 올랐을 때 다른 누군가가 나와 내게 방문을 열어준다. 모든 비밀이 풀릴 것 같은 환한 무대 조명처럼 반짝이는 방, 그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순간 또 속고 만다. 그 방은 다른 연극이 시작되는 무대 였을 뿐, 마지막에 가서는 온 몸의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느낀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시작과 끝이 어딘지 몰라 헤매는 나는 꼭 뫼비우스 띠를 붙잡고 우는 어린아이 같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는 뫼비우스 띠의 비밀이 풀렸다고 하는 기사를 봤다. 뫼비우스 띠 의 비밀도 풀렸는데 책 속의 비밀이야 곧 풀리겠지 쉽은데도 책을 접었음에도 왜 갈피가 잡히지 않을까? 나 어디서 부터? 언제부터? 잘못 읽은거야? 아니면 놓친건가?

 

 이해 못함, 그 도장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의 뒷 표지에 찍어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온다 리쿠가 이해 못한 독자라는 도장을 찍어줄지도. 다시 읽기 전에 이렇게 주저리 이해 못했다고 투덜 거리는 것은 내가 이해한 것을 정리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 <디 아더스 (The Others, 2001)> 를 처음 보고 혼란에 빠졌을 때처럼 이 책도 내게는 혼란 그 자체이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을 발산하는 이 책을 손에 놓을 수 없음을 어떡해야 할까.

두 번째 손에 든 책은 분명 무언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올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세계로 발을 들여놓기가 망설여짐은 온다 리쿠의 치밀함에 또 혀를 내두를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까?

 

 줄거리를 적을 수가 없음은 제가 아직 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혹여나 먼저 소화해 내신 분이 계시다면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감미로울만큼 치밀한 살인 그리고 연극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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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시 2007-07-22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재밌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저도..^^
 
논개 1
김별아 지음 / 문이당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논개, 난 당신을 안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왜장을 끌어안고 절벽에서 떨여저 죽은 기생으로 당신을 안다고 입을 놀렸지요. 김별아, 작가의 손에서 태어난 당신을 알아가며 난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책을 다 읽어버린 지금, 난 당신을 아는 걸까요? 모르는 걸까요? 하긴 당신이 내가 당신을 안다고 하여 좋아할리 만무하죠. 논개여, 그곳은 안녕한가요?

 <나는, 나를 모르면서 하는 사람들의 말 따위는 상관없다.> -논개 2 p.329

 김별아가 논개를 쓰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논개를 모르면서 논개를 말하는 이들을 향한 항변이었을까? 사람을 안 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동시대의 인물이 아닌 과거 속 인물을 아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특히나 역사적 자료가 부족한 인물을 알고자 한다면 얼마나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맞추어야 하는 걸까? 기생 논개로 불리던 논개의 아픔을 김별아가 달래주고 있다.


 <사랑하였다. 온 생애에 단 한 사람을. 또한 사랑하였다. 아프고 아름다운 땅을, 그곳에서 태어난 슬픈 운명을. 그러나 그것들이 어떻게 다른지는 말할 수 없다. 사랑의 경중도 따질 수 없다. 모든 사랑은 진정으로 닿아, 기어이 닮아 있기 마련이므로.> -논개 2 p.342

 여자의 일생은 기구하다라는 것을 <여자의 일생>을 읽어보기 전에 엄마를 보며 혹은 할머니를 보며 알았던 듯하다. 나는 내내 불만이었던 것 같다. 성별에  따라 삶의 경중이 달라짐이 서글펐다. 왜 그네들의 삶은 더 촉박하고 아린데도 가볍게 보며, 쉬이 여기는 걸까?

 논개의 삶의 무게, 그녀가 그것을 논하는 것을 원하지 않음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녀의 삶이 역사적 인물이었던 어떤 남자들 보다 가볍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사랑을 하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삶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가혹한 운명을 안겨 준 나라를 사랑했던 여인, 그녀의 이름은 논개. 논개의 파란만장한 아린 삶이 시작되려 한다.

 사람이 살고자 한 시대를 어찌 택할 수 있을까? 부모를 택해서도 태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인데 어찌 시대를 선택할 수 있겠는가. 태어남이 업이요, 살아감이 아픔이라. 그럼에도 태어남인 축복이고 살아감이 행복이라. 누구나 그러하고 산다고, 누구나 한 번 웃기 위해 열 번 운다고 말씀하시는 누군가에게 묻는다. 그럼 논개는요? 그녀가 한 번 웃기 위해 수 백번, 수 천번을 운 것은 어째요? 라고. 그러자 알려 주신다. 논개의 웃음은 세상을 밝게 했다고, 그녀의 웃음은 누군가의 가슴에 영원히 지지 않을 빛이 되어주었다고. 그럼 그걸로 된 건가요? 라는 물음에 그저 빙긋이 웃으시는 그 분. 당신은 누구인가요?

 논개가 태어난 세상, 그녀가 선택한 사랑을 심어주고 싶었던 세상에 백성들은 죽는 것이 나았다 했고, 조정은 도망을 가고, 왕이 탄 가마는 백성들에게 돌을 맞으면서도 떠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대에 사랑이 대수냐고 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대에도 사랑은 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했으며, 한 백성이 등을 돌린 나라를 사랑했으며, 부모가 제 자식을 사랑하면서도 전쟁터로 보냈으며,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전장에서는 부모를 잊고자 했던 자식도 있었다. 사랑함이 죄였고, 사랑함이 힘이었다. 보답받지 못할 사랑, 보답 받았다 해도 무엇 하나 약속하지 못하는 사랑,  그 사랑 속에 논개의 사랑이 올곳이 피어 오른다. 붉게 그러나 은은하게 그녀를 잔다르크라 부르지 못할 지언정 더이상 기생은 아니 된다.

 #아쉬워라, 논개여

 논개를 다 읽은 후에 주섬주섬 모은다. 무엇을? 감정들을.

울어야 하나요? 가슴을 어루만져야 하나요? 나는 두리번 두리번 거리느라 바쁜 걸요. 논개의 사랑에 아플려고 준비했으면 어느 순간 전쟁상황의 참혹함이 우르르르 쏟아져 나와 한 민족의 아픔이 솟아 오르면 어느 순간 논개의 곧음에 대한 찬양이 시작되어 우러러 볼려 하면 그녀가 사랑한 이의 바름이 찬양되고 아, 감정은 어느덧 분산되고 나는 어쩌지요? 울까요? 말까요? 아니면 역사 한 장면을 봤다고 말할까요?

 논개라는 여인의 삶을 택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많아 힘이 든다.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 함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으나 (물론 의병들 역시 실존했던 인물들의 이름을 썼던 것도 좋았다.) 그 사실을 이야기 함에 장황한 설명을 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초반에는 시대적 배경에는 아무 언급도 없더니 갑작스레 정세의 혼란과 세력 다툼이 뜬금없이 튀어나와 맥을 끊어 놓는다. 임진왜란을 이야기 하려 하면 그런 사항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간략히 할 부분까지 너무 상세하게 이루어지다 보닌 읽던 중에 지치는 감이 있다.

 또한 논개의 삶을 이야기 하고자 했음에도 역사 앞에 논개는 중앙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닌 역사의 밖에 서 있는 사람 같다. 그녀를 주목해야 하는지 임진왜란의 참혹함을 주목해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논개와 최경회의 아픈 사랑 역시 아프다는 것은 알겠는데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다. 무언가 단절된 느낌이 들어 감정들이 분산된다. 아쉬움이 남아 논개를 쓰다듬으려 해도 괜스레 머쩍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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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6
알레산드라 프레골렌트 지음, 임동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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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만큼 보이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듯하다. 그저 그렇던 풍경도 그 속에 들어있던 역사를 듣고 나면 달라 보이고, 잠만 오게 하고 그 음(音)이 그 음 같던 클래식도 작곡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음율에 실린 그 마음을 엿보게 되고 절대 이해 불가라고 여긴 오페라 역시 알고 보면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누군가의 말처럼 무언가를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조금의 준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 준비가 벅찰 것 같아 클래식을 멀리 했고, 그림을 멀리 했으며, 책 역시 멀리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아는 것의 버거움 보다는 알아간다는 즐거움이 더 컸다. 어린이가 한글을 배우면서 혼날 때의 감정보다는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기쁨에 배우는 것과 같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그림 앞에서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와 같은 입장이었다. 어쩌면 더 어려운 입장인지도, 그림 앞에서면 겁 부터 먹는 어른이기에.

 

 그림에 겁 먹은 사실을 살짝 숨기고 혼자서 공부를 해 보는 건 어떨까? 따분한 이론 공부 말고 그림과 함께 겻들인 설명이라면 참 좋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나온 듯한 책 <루브르 박물관 -세계 미술관 기행->이다.

 

 책에는 그림과 화가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함께 담겨 있다. 그림의 한 부분을 자세히 볼 수 있게 '그림 속으로'란 코너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차례대로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내게는 좋았다. 펼치는 순간 펼져지는 그림을 보고 설명을 듣고 그 후에 다시 보는 그림은 무언가 달라 보였다. 

 

 내게는 이 책이 작은 미술관이었던 것 같다. 집에서 보는 것이 안타까워 밖으로 책을 가져나가 보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보면 볼수록 생겨나는 갈증을 어쩌면 좋을까? 실제로 보고 싶다라는 마음. 그 전에는 내게는 없었었다. 분명 책이나 인터넷에 나와 있는데 뭐하러 미술관이나 여행을 가서까지 그림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품었던 내가 이제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실제로 그림들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된다. 실제 크기의 그림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그윽할까? 그 곳에서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 한 권으로 그림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루브르에 간다면 어쩌면 조금은 으쓱한 어깨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조금씩 천천히 그림을 알아가고 싶다.

 

 하나 말할 것은 이 책의 설명의 부족과 딱딱함이다. 짤막한 설명임에도 읽는 이에게 와닿지 않고 물론 이 책이 안내서라고 해도 그림이나 화가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한 듯 하여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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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 2007-07-13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브르 박물관...언제나 가볼 수 있으려는지...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