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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이 지금 네가 읽고 싶은 책이냐?
처음 김연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이라는 책을 받고 떠오른 것은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라는 시였다.
이 시는 읽기 시작하면 구부정한 등이 펴지고, 졸린 눈에
힘을 주게 되고, 배도 안 고파지는 그런 시다. ‘칭찬도
듣지 않고 걱정도 끼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진다.
산문집은 한 자리에 앉아 작정하고 읽지는 않는다. 어디
나가기 전 잠깐, 화장실에 들어가서 잠깐, 잠자기 전 잠깐. 회사 동료인데다가, 동네 친구이기까지 한 친구처럼 짬날때마다 한 편씩 본다. 그래서 책의 자리는 식탁 위, 또는 침대 머리맡. 그 끝을 지금까지 못본 산문집도 많다. 계속 그 위에 새로운 책이
쌓여서 어느 대청소날, 그냥 책꽂이로 들어가버리는 것이다.
김연수 산문집은 어떨까? 한 편, 한 편 울림이 크다. 그래서 한꺼번에 읽지는 못하겠다. 그런데 또 기억에서 묻힐까봐 그냥 침대 머리맡에 둘 수는 없다. 아껴가며
가지고 다니며 한 편, 한 편 읽는다.
김연수의 지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말이다.
‘달리기를 통해서 내가 깨닫게 된 일들은 수없이 많다. 뛰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이 달리기를 하기에는 제일 좋은 때다, 아무리 천천히 뛴다고 해도 빨리
걷는 것보다는 천천히 뛰는 편이 더 빠르다…
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얼마전에 런던올림픽이 끝났다. 초등학교 때를 제외하곤 올림픽
경기를 본 적이 거의 없는데, 이번엔 같이 사는 사람 덕택에 여러 경기를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올림픽은 인간 세상의 도리나 진리에는 어긋나는 것 같다. 몇
년의 노력이 단 두 세번의 경기 로 판단되는 것, 같은 금메달을 따도 어떤 이는 묻히고, 어떤 사람은 크게 주목받는다는 것. (이것 역시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딱 떨어지는 사연이 중요하다.)아무리 봐도 잘 사는 나라, 계속해서
금메달을 많이 딴 나라 선수가 유리한 것 같은데, 자꾸 공정하다고 광고하는 것도 이해가 안간다. 그리고 철들 무렵부터 인생의 대부분을 그 운동에 받쳤는데, 기껏
올림픽 2,3번밖에 기회가 안 돌아간다는 것도.
그런데, 김연수의 말을 듣다보니 이것도 금메달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시작된 생각인 것 같다.
분명 건강에는 좋지 않을 것 같이 그 종목에 최적화된 몸이 순간이나마 중력을 이겨내는 모습, 대다수의 국민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김연수에게
환호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환호를 보여주고 박수를 쳐줄 거라는 것…그리고 금메달을 따지 못해도
사실 본질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는 것. 진정한 올림픽
정신이라면 운동을 하는 그 순간을 즐겨야 한다는 것.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 올림픽은 그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중간에‘한 번 더 읽기를 바라며 쓰는 글’이 있다.
글의 첫 시작은 ‘이제 이 글을 다시 읽어 보면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리라. ' 뭔소린가 싶다. 글을 읽을
때는 뭔가 아리송. 그러다 글 마지막 문장은 ‘이 글은 마지막
문장부터 한 문장씩 다시 거꾸로 읽어야만 뜻이 통한다는 걸 먼저 말해야겠다.’이다. 그렇게 다시 읽어보면 대략 이런 이야기다.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결승점에 들어가서 어떻게 달렸는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늘 고통의 순간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놀란다. 매번
그렇다. 달릴 때는 정말이지 죽을 것 같았는데, 달리고 나면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 달리기의 고통이란 앞면은 거울이고 뒷면은 유리로 된 이중창 같은 것이라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
두 번째로 달린다면 아마도 고통보다는 다른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고 관찰하고 경험 할 것이다.
…
지금 내가 더 많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가능한 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고통은, 고독은, 절망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여기에서 내 자원을 100퍼센트 점유하고 있는데.
그리고 이제 100살의 눈으로 그 고통을, 고독을, 절망을 노려보자. 그렇다면
뭘 생각하고, 뭘 할까?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일이다.’
김연수 산문의 전체 주제는 ‘지금 깨어있으라!’
‘내가 생각하는 인과관계란, 노력의 결과를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즉석복권과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그 보답이 즉각적으로 내게 찾아온다. 서른
살이 넘으면서 나는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해 봤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면 먼 훗날 큰 보답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부록 같은 것이다. 진짜 최선을 다하면
그 순간 자신이 얻는 즐거움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연수의 인과관계에 대한 글은 나한테 축의금이나 생일 선물에 대한 마음과 같다. 나중에 내가 받을 돈을 생각해서 축의금을 내거나 선물하지 않고, 그냥
그 당시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하고 그 날을 즐기는 것, 잊어버리거나 가고 싶지 않은 결혼식에 굳이
봉투를 부탁해서 보내거나 내가 받았기때문에 비슷한 규모의 선물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지금 꼴리는대로 한다. (뭐 사람 마음이 받은 게 있으면 더 많이 꼴리는 게 사실이긴 하다.)
‘아무리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비디오로 촬영해도 한 번 지나간 뒤의 일들은 더 이상 내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이 삶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지금 이 순간에 경험하는 일을 배워야만 한다.
…
나는 날마다 익혀야만 한다. 그럴 때, 내게 학교가 되는 건 숲이다. 숲에서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
나무와 새 들은 영영 맑은 날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자연적인 사실이 있어서 세찬 바람과 축축한 둥지를
견딜 수 있었으리라. 모든 것은 변화하고, 모든 일은 지나간다는
그 자명한 사실 덕분에. 나무와 새 들은 그 사실로 이뤄진 나날을 그저 겪을 뿐이다. 맑은 날에는 맑은 날을, 흐린 날에는 흐린 날을 겪는다.
…
나는 매 순간 변하는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날마다 그날의 날씨를 최대한 즐기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
그날 그순간을 겪기에 날마다 새롭게 살 수 있다.
그렇게 순간순간 깨어있을 수 있는 건 여행을 할 때이기도 하다. 여행은
매순간을 깨어있게 한다. 그런데 그런만큼 더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내 목숨과 지갑을 위해 마구 현지인들을
의심하는 시간이고, 민족성이 어쩌고 하는 식으로 사람을 개인으로 안 보고 민족으로 분류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연수에게 여행은 그 태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작업.
‘여행자란 어떤 사람인가? 일어난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넘겨짚고, 현지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여기는 사람이다. 우린 애당초 그렇게 생겨 먹었다.
내게 여행이란 나 역시 이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 이 태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
그리고 달리기는, 인생은 언제나 즐거운 일.
‘힘들다고 더 이상 못 쓰겠다고 말하는 건, 타이페이를
갔더니 너무 더워서 호텔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내가 타이페이를 다시 방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만 할까? 더위보다는
경험에 집중하게 되겠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지금 소설을 쓰는 일이다. 그리고 고통이 아니라 지금 소설을 쓰는 일에 몰입한다면 결국에는 소설을 완성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
고통이 아니라 경험에 집중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건 삶을 살아가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우리의 삶 역시 끝이 있는 여행이지만, 그 사실을 매 순간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
매일 달리는 일…
보통 1시간 안팎으로 달리는데, 그 시간이 모두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물론 달리기를
하다 보면 마치 근육이 아니라 의도만으로 몸이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면서 고통 없이 속도감을 만끽할 때가 있다. 그때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인다는, 그러니까 내 육체를 완전히 통제한다는 사실에서 비롯하는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건 전체 달리기 중에서 극히 짧은 순간이다. 많은
시간, 나는 내 생각보다 몸이 무겁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달리고 나면 기쁨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
달리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시작할 때 그렇지 않다면, 끝날 때는 반드시 그렇다. ’
‘이것이 지금 네가 읽고 싶은 책이냐’는 글이 있다.
지금 내가 읽은 <지지 않는다는 말>은 알라딘에서 리뷰를 쓰라고 보내준 책이니, 이 책은 내가 고른, 내가 읽고 싶은 책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읽길 잘한 책이긴 하다. 지금 리뷰를 쓰기 위해 읽지 않았다면 아마 읽더라도 한참 뒤에 읽었을텐데, 그렇다면
좀 아쉬웠을 책.
김연수의 글에, “맞아요,
저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혹은 “너무 개인의
삶의 의지만 강조하는 거 아니에요?” 혹은 “소설가가 넘
긍정적인 거 같아 좀 매력이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위로는 되네요.” 같은 말을 건네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