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어떤 드라마에서는 재벌 회장 내연녀의 숨은 아들이 악역을 맡아서 호평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여주인공에게 호의적이고 신사적으로 접근했지만 알고 보니 속내가 시커먼 인물이고 출생의 비밀까지 있어서 남주인공을 끝까지 악랄하게 괴롭혔다던가.


나귀님 취향은 절대절대 아닌 드라마의 등장인물에 대해서 굳이 알아보게 된 계기는 우연히 어디선가 그 드라마 속 재벌 회장의 내연녀와 재벌 회장의 딸내미가 치고박고 육탄전을 벌이는 장면을 보고 희한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기에 그러나 싶었던 거다.


그런데 막상 드라마 줄거리를 알아보니, 이건 뭐, 개연성 없는 줄거리에 각종 클리셰의 범벅이라 할 만했다. 그런데도 큰 인기를 끌었다니, 요즘 세상에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리는 것은 고사하고, 대중의 취향에 멱살 잡혀 끌려간다고 해야 맞겠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내연녀의 숨은 아들도 나름대로의 슬프고 억울한 사연이 있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역이자 장애물인 역할에는 변함이 없다. 시청자라면 십중팔구 주인공 부부의 극적 화해와 악역의 몰락으로 마무리되는 해피엔딩 겸 사필귀정을 바라지 않을까.


반면 재벌 회장 내연녀의 숨은 아들의 존재로부터 정경 유착, 가부장제, 황금만능주의, 미혼모에 대한 편견, 아동 학대, 암의 위험성, 철부지 고모의 순기능과 역기능 등 현대 한국 사회의 갖가지 문제를 인식하고 되새겨보는 시청자는 설령 있더라도 극히 드물 법하다.


어제 문득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가 이 드라마의 악역을 떠올리게 된 계기도 그래서였다. 진 리스의 고전 뒤집어 읽기로 주목을 받고 동명의 페미니즘 비평서로 불멸이 되기는 했지만, 사실 <제인 에어>에서 그녀의 역할은 단순한 악역/장애물 아니었을까?


물론 그 소설에 대해서 행간 읽기며 뒤집어 읽기를 해 보면 남주는 개새끼고, 여주도 도의적인 차원에서 일말의 도덕성 논란이 없지 않을 법하며,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불운한 희생자이며 억울한 피해자이며 수탈을 당한 식민지의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소설을 읽는 독자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보다 아랫방의 가정교사에게 공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자존심을 놓지 않는 주인공을 향해 "힘내라, 제인!" "다락방 미친년 따위 박살내 버려!" "로체스터를 덮쳐(?) 버려!"라고 응원하지 않을까?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대표 작가인 나이지리아의 치누아 아체베는 조지프 콘라드의 소설에 등장한 아프리카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예리하게 비판해서 공감을 얻었지만, 단순히 그런 왜곡된 인식만이 오늘날 고전으로 손꼽히는 <암흑의 핵심>의 전부인 것까지는 아닐 듯하다.


행간 읽기와 뒤집어 읽기도 작품을 바라보는 신선한 방법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일하게 정확한 방법까지는 아닐 것이다. 책을 들여다보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페이지의 흰 여백보다는 검은 글자에 집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이유도 그래서이다.


다양한 해석은 참신한 시각을 내놓을 수도 있지만, 과도한 행간 읽기와 뒤집어 읽기는 사실상 무의미한 부조리극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행간이 넓다 한들 글자와 글자 사이 공간에 불과하며, 페이지의 일부이며, 책의 일부인 한에는 결국 유한하게 마련이니...



[*] 제아무리 참신하고 전복적인 독서라도 제임스 서버의 "맥베스 살인 미스터리"에 나온 추리소설 광팬의 독해를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진범이 아니다'라는 클리세를 근거로 맥베스나 맥베스 부인은 살인자가 아니라고 추리하는 등, 무려 셰익스피어 비극을 추리소설 클리셰로 독해한다는 내용이니까.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전복에 전복을 거쳐 부조리와 무의미에 도달하는 과도한 비평에 대한 야유라고 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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