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서 '2025년 세계 양자과학기술의 해' 기념 이벤트를 하나 싶더니 지금은 또 지나간 모양이다. 양자과학의 기초 중 하나인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발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유네스코에서 그렇게 지정한 모양인데, 정작 알라딘이 이벤트용으로 만든 '돈 주고 사는 사은품'은 무려 '슈뢰딩거의 고양이 티셔츠'라서 뭔가 좀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과가 아닌 나귀님이니 혹시나 잘못 이해한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꽤 오래 전에 하이젠베르크의 여러 에세이며 범양사 과학책 몇 권을 읽었던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하이젠베르크의 입자론과 슈뢰딩거의 파동론은 시작부터 상호 모순이라고 해서 논란이 있었으며, 그걸 억지로 화해시킨 것이 보어의 상보성 원리, 즉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알고 있다.


이에 대해 슈뢰딩거가 반발하며 내놓은 것이 저 유명한 고양이 사고 실험인데, 뚜껑을 열어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삶과 죽음이 중첩된 모순적인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이 비판이 오히려 양자과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며 호의적으로 전용되어, 급기야 알라딘 고양이 티셔츠까지 나온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슈뢰딩거의 실험이 결국 '고양이 죽이기'를 의도한 셈이니, 요즘 기준으로는 동물 학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알라딘 이벤트에서야 '살아 있는 고양이'와 '유령 고양이'라고 에둘러 말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고양이' 아니면 '고양이 시체'가 나온다는 뜻이니, 실제로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반길 만한 내용까지는 아니다.


물론 슈뢰딩거의 제안이야 어디까지나 사고 실험일 뿐이고 실현된 적까지는 없으니, 이걸 가지고 굳이 시비를 거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 있겠다. 다만 '2025년 세계 양자과학기술의 해' 선정 자체부터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같은 주류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하니, 그저 사은품 디자인으로만 흔적을 남긴 비주류 슈뢰딩거의 처지가 새삼 안쓰러워 해 본 말일 뿐이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수많은 창작물에서 형상화된 바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네이버 웹툰 <집사레인저>에서 등장한 버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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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중에 대니얼 데닛의 <다윈의 위험한 생각>을 알라딘 미리보기로 클릭해 보니, 추천사와 역자 서문이 대부분이고 정작 책 본문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컴퓨터에서 보면 해상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평소처럼 예스24로 가서 미리보기를 확인해 보니 여기는 알라딘보다 쪽수가 적다. 다시 교보문고로 가서 미리보기를 눌러보니 여기는 무려 70쪽이나 된다!


그런데 하나 묘한 점은 진화론을 적극 옹호하는 이 책의 서두에서부터 무려 '복음성가'가 등장한다는 거다. 책에서는 "왜 그런지 말해줘"라 직역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이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노래다. 즉 본문에서는 "말해줘 별들이 왜 빛나는지 / 말해줘 담쟁이가 왜 휘감는지"로 옮긴 가사를 "어이해 별들 반짝여 / 어이해 바다 푸르러"로 옮긴 것이다.


데닛은 "단순한 멜로디에 쉬운 화음"이 특징인 "작고 보물 같은 곡"이라고 호평했는데, 실제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귀님도 이제껏 기억하면서 가끔 생각날 때마다 흥얼거리는 노래이기도 하다. 유튜브에서 영어 가사로 검색하면 어느 노부부가 함께 부르는 버전이 있는데, 독창 버전보다 이렇게 이중창 버전으로 들어야만 데닛의 묘사가 더 잘 이해될 만하겠다.


이 대목이 아이러니한 까닭은, 우리나라에서 이 노래가 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한때 교회에 다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이 책은 진화론을 옹호하는 내용이니, 막상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굳이 찾아서 읽지 않을 법한 종류의 책일 수밖에 없다. 다만 미국에서는 복음성가이기 이전에 민요 겸 동요로도 널리 알려진 노래라지만 말이다.


물론 데닛의 진짜 의도는 이 멋진 노래의 가사에 함축된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산산조각낸 진화론의 세계관을 설명하고 옹호하려는 것이지만, 자신의 관점과는 불일치하는 노래일망정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만큼은 충분히 호감을 살 만하다. 어쩌면 진화론자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바라보는 일각의 오해를 일축할 만한 행동처럼도 보이고.


얼마 전에 발자크의 "무신론자의 기도"에 대해 쓰면서도 언급했지만, 가끔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심지어 배척하는 사람에게서 기독교인보다 더 기독교인다운, 또는 기독교인을 능가하는 훌륭한 성품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성서 전체에서 때로는 이방인의 믿음이 유대인보다도 더 신실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은 아니려나.


역시나 진화론자이며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도 자서전 <자연주의자>에서 언젠가 마틴 루터 킹의 설교와 기도에 자기도 모르게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 바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곧장 전향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과학과는 또 다른 차원에 속한 종교나 예술 같은 문화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한 셈이 아니었을까.


비록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처럼 '거친' 사례 때문에 종종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무신론자라고 해서 항상 종교나 관습에 대해 호전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까지는 아니다. 오히려 칼 세이건의 사례처럼 과학과 종교 각각의 가치를 인정하는 동시에,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영역에 침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를 표시했을 뿐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처럼 무신론자도 종교의 가치를 존중하며 가끔 눈물까지 흘리는 판에, '하느님 까불면 죽어'라는 망언을 일삼는 극우 선동가의 주장에 동조해서 탄핵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기독교인들도 있다니 참 어이없는 일이다. 이쯤 되면 대니얼 데닛이며 에드워드 윌슨이며 칼 세이건이며 심지어 리처드 도킨스가 그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도 할 말이 없지 않겠나...



[*] 그런데 <다윈의 위험한 생각>의 번역 품질은 뭔가 아쉽다. 공짜 알바를 해줄 의향까지는 없으니 딱 하나만 예를 들자면, "약한 연결고리들을 품었을 수도 있는 --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희망을 바라는 -- 한두 개의 거대한 논증의 사슬이 버텨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45쪽)의 경우,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희망을 바라는"(hope against hope)이라는 부연 구절을 차라리 "물론 근거 없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정도로 의역하는 것이 좋았을 법하다. 반대측에서는 진화론이 '거대한 사슬 같은 논증 한두 개'로 유지되는 구조라고 간주하고, 어쩌면 그 사슬에 '약한 연결고리'가 있어서 끊어질지도 모른다고 기대하지만, 진화론자인 저자가 보기에는 그런 기대가 '근거 없는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첨언이기 때문이다. 반면 지금의 문장은 마치 "약한 연결고리를 품다 = 희망을 바란다"로 오독되기 쉽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말하려는 '다윈의 위험한 생각'이 사실은 '더원의 위헌한 생강'으로 오독될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무려 1천 쪽에 육박하는 분량에, 무려 6만 5천 원이나 하는 정가에, 무려 번역 5년에 교정 2년이라는 시간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아쉬울 수밖에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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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중에 <나는 새들이 왜 노래하는지 아네>라는 것이 있기에, 마야 안젤루의 자서전이 표지를 바꿔 새로 나왔나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엉뚱하게도 탐조 활동에 관한 논픽션이었다. 그렇다면 저 흑인 작가의 책 제목은 뭐였나 싶어 검색해 보니,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라고 나온다. 이쯤 되면 순진한 나귀님이 충분히 착각할 만해 보인다.


탐조 활동에 참여해 본 적은 없는 나귀님이지만, 그 분야의 애호가가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훗날 영화로도 제작된 <빅 이어>라는 또 다른 논픽션을 통해서 그 극단적인 사례를 일별한 기억도 나고 말이다.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난초 도둑>과 <깃털 도둑> 같은 더 극단적인 사례에서처럼 취미에 대한 집착이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예전에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등장해서 뉴욕 센트럴파크의 탐조 활동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유튜브에서 검색해도 못 찾겠더라!) 어쩌면 서울 한복판에서도 여의도 샛강이나 뚝섬 서울숲 같은 곳에서는 비슷한 활동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샛강 풀숲에서 족제비인지 수달인지 여러 마리를 본 기억도 난다.


예전에 이어령은 동양에서는 새가 "운다"고 표현하지만, 서양에서는 새가 "노래한다"라고 표현하는 문화적 차이를 지적하며 동서양의 사고방식 특징을 설명했었다. 지금이야 미국의 대중 문화를 중심으로 전세계 문화가 몰개성 동질화되는 추세이고, 이른바 '케이' 문화도 거기 편승해서 문화적 '소중화'를 자처하고 있으니, 그 차이도 많이 희석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최근 화제가 된 '스웨덴의 손님 접대'처럼 국가별 문화 차이는 여전히 남아 있고, 특히 유튜버들이야말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열심인 듯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공공 장소에서 핸드폰을 놓아두어도 훔쳐가지 않더라'를 비롯한 각종 실험 영상에서 간과한 점이 있다면, 그런 양심적인 모습이 우리 일상에 정착된 지가 그리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곳곳에 깔린 '씨씨티비'일 것이다. 어차피 훔쳐가도 오래 못 가서 걸리고 말 터이니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는 셈이고, 혹시나 주인을 찾아주고 싶어도 공연히 오해를 받을까봐 굳이 손대지 않는 것이 아닐까. 반면 지난번에 말했듯 쓰레기 무단 투기를 비롯해서 비양심적인 행동도 빈번하니, 제도의 차이를 문화의 차이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반면 위에 언급한 책 두 권 모두 제목을 "새가 왜 우는지"로 의역하지 않고 "새가 왜 노래하는지"로 직역한 것은 문화적 차이의 희석 사례로 지적할 만해 보인다. 일각에서는 외국어 표현을 직역해서 차용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지만, 사실 언어와 문화의 상호 침투는 나라마다 꾸준히 있어 왔던 현상이니 이제 와서 뭐가 옳고그르고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


"새가 운다"라고 표현했던 문화에서는 "새가 노래한다"라는 표현을 신선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리하여 "새가 노래한다"가 옳은 표현인 것마냥 통용되던 어느 날 누군가가 "새가 운다"라는 표현을 재발굴해 유행시킬 수도 있으니까. 예를 들어 어느 교정 전문가의 지적처럼 일본어 관용구가 난무한다던 박경리의 <토지>가 마치 한국어 문장의 모범처럼 추앙되듯이.


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어제 뉴스에서 미국 배우 리처드 체임벌린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의 대표작이 콜린 매컬로 원작의 드라마 <가시나무새>였기 때문인데,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되어서 큰 화제가 된 작품으로 기억한다. 저 제목은 영어 원제 The Thorn Birds의 직역인 듯한데, 우리나라에는 그 새의 정식 명칭이 없는 듯하다.


이 배우는 <가시나무새>와 <쇼군> 같은 드라마로도 유명하지만, 나귀님은 <삼총사> 시리즈에서 아라미스 역할을 맡은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라이더 해거드 원작의 '알란 쿼터메인' 시리즈에서도 무명 시절의 샤론 스톤과 함께 나온 적이 있었다! 물론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아류라는 지적이 대부분이었으니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에서 이 배우의 얼굴을 표지에 등장시킨 책이 있다는 것이다. 로버트 러들럼의 '제이슨 본' 시리즈 첫 권인 <본 아이덴티티>의 1988년 드라마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고려원에서 출간한 시리즈 3부작 여섯 권 모두에 얼굴을 올렸기 때문이다. 나귀님이 '본'이라면 지금도 맷 데이먼보다 리처드 체임벌린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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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막바지로 접어들며 협상이 진행 중이다. 당선되면 전쟁을 곧바로 끝내겠다던 호언장담처럼 양국 모두에 압박을 가한 미국 대통령이지만, 유독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냉랭하다 못해 야멸찬 태도로 일관했고, 급기야 정상 회담 중에 말다툼을 벌이는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희한한 일이다.


비록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미국의 지원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자주 국방을 이루지 못한 한계를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어 보인다. 우크라이나는 본래 소련 시절에 핵무기를 다량 보유했지만, 국내 정세 불안으로 미국과 러시아와 협상 끝에 전량 폐기를 선택했는데, 결국 러시아의 침략에도 속수무책이 되었으니 씁쓸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우크라이나가 항상 선역만 맡은 것까지는 아니라는 점이다. 소련 해체 이후 독립은 했지만 부정부패가 워낙 심해서 불안한 정세가 계속된 것이 한 예이다. 급기야 영국 언론인 올리버 벌로가 우크라이나의 심각한 부정부패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국제적 규모의 돈세탁을 지칭한 '머니랜드'라는 신조어를 고안했을 정도였으니.


이후 민주화 혁명이 일어났지만 정세 불안이 그치지 않다가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수년간의 전쟁으로 큰 피해까지 입었으며, 종전 과정에서도 미국의 압박으로 국토 상실과 자원 조공 등 손해를 억울하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니, 이른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으며 피도 눈물도 없다는 국제 관계의 냉정함과 잔혹함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흠좀무'한 점은 '하늘이 억까하는 나라'인 우크라이나의 이런 억울한 처지가 어제오늘의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요충지이자 곡창 지대라는 특성상 근대까지도 폴란드와 러시아 같은 주변국의 등쌀에 종종 탄압을 받았다기 때문이다. 이런 우크라이나의 비극적인 역사를 응축한 것이 타라스 셰브첸코의 <유랑시인>에 수록된 여러 편의 시들이다.


이 책은 한길사의 대표 시리즈인 그레이트북스 가운데 한 권으로 출간되었는데, 다른 책들이 대부분 역사나 철학 같은 인문학 분야의 고전인 것을 감안하고 보면 문학 작품, 특히 시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외였다. 일단 번역자부터가 역사학자인 것도 특이한데, 문학보다는 역사의 측면에서 우크라이나를 소개한다는 의미에서 번역하게 되었다고 해제에서 설명한다.


셰브첸코는 본래 농노로 태어났지만 미술에 재능을 보인 까닭에 귀족 후원자들의 모금을 통해 해방되었으며, 이후 화가 겸 시인으로 활동하다가 반정부 활동 혐의로 10년간 유배에 처해지기도 했다. <유랑시인>에 수록된 시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내용인데, 때로는 압제자 폴란드인과 그 주구로 (잘못) 간주된 유대인에 대한 노골적 비난도 나온다.


이 당시 우크라이나의 상징이 바로 코사크 기병인데, 고골의 <타라스 불바>에 묘사된 것처럼 난폭하고 다혈질이지만 자유와 조국을 사랑하는 저 남자들의 목소리는 셰브첸코의 여러 시에서도 우렁차게 반복된다. 물론 현실을 돌아보면 목소리가 크고 자존심을 내세우나, 역량은 부족하여 손해를 자초하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한계이자 비극인가 싶기도 하다만.


흥미로운 점은 시를 이해하기 위해 덧붙인 배경 설명이 꽤나 방대하다는 점이다. 서두의 해제에서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한 개관만 무려 40페이지에 달하는데, 구입 당시에 잠깐 훑어볼 때에는 '시 한 편 읽자고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어서 의아했다가, 러시아와의 전쟁 이후 다시 읽어보니 워낙 험난했던 역사인만큼 긴 설명도 필요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유랑시인>을 구입했을 때에만 해도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창작되었다는 폴란드 민족 서사시 <판 타데우시>와 나란히 놓고 읽어보면 어떨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양국은 과거사의 앙금 때문에 한국과 일본 못지않은 앙숙 관계라고 하기에, 뭔가 큰 실수를 할 뻔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살짝 뜨끔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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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선정 '21세기 최고의 책' 광고 중에 희한하게도 노란 과일을 표지에 박아 놓은 것이 있어서 뭔가 궁금해 살펴보니 <망고와 수류탄>이라는 책이었다. 제목이며 표지만 보면 '수류탄 던져야 하지만, 망고는 먹고 싶어' 류의 에세이라든지, '사상 최강의 수류탄, 전생했더니 망고였다' 류의 소설이라야 어울릴 것 같은데, 특이하게도 생활사 연구서라고 한다.


일본인 사회학자가 오키나와에서 현지 연구를 실시하며 수집한 증언을 토대로 쓴 생활사 이론 논고라는데, 왜 하필 '망고'와 '수류탄'인지는 알라딘 미리보기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책 소개 글을 토대로 짐작하면, 오키나와 전투 때 정부 지시대로 수류탄 자폭을 포함한 결사 항전을 앞두고 자녀들과 망고를 나눠 먹었다는 어느 할머니의 회고와 관련이 있나보다.


특이하게도 최근 10여 년 사이에 오키나와 관련서가 여럿 간행되었는데, 십중팔구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제주 해군 기지 건설 관련 논란의 연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독특한 자연과 문화를 보유하고, 본토와 갈등과 차별의 역사를 경험했으며, 군사 기지 건설까지 공통점이 많다고 본 모양인데, 이후의 상황을 보면 해군 기지도 필요했으니 속단은 금물이겠다.


그나저나 과일과 폭탄의 조합은 뭔가 의외다 싶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일본에는 선례라 할 만한 책도 없지 않다.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요절 작가 가지이 모토지로의 가장 유명한 단편 "레몬"을 보면, 무료한 일상에 지친 화자가 무심코 그 과일을 사서 들고 다니다가 마루젠 서점에 들어가 책 사이에 마치 수류탄처럼 놓아두고 나온다는 묘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레몬과 수류탄의 조합이야 에마뉘엘 카레르의 <리모노프> 표지에도 등장하는데, 그 제목은 레몬과 수류탄을 뜻하는 러시아어 '리몬'과 '리몬카'에서 따온 것이며, 이 실화 소설의 주인공인 반정부 활동가 에두아르드 사벤코의 별명이기도 하다. 평소 거침없는 언변으로 찬반양론을 일으키며 저서도 여럿 간행해서 제법 화제를 모았지만 2020년에 사망했다고 전한다.


딱 여기까지 쓰니까 바깥양반이 들어와서 '또 내 욕을 쓰느냐'며 검열에 들어가는데, 레몬과 수류탄 이야기를 보더니 '왜 <카탈로니아 찬가>에 나오는 애완 수류탄 이야기는 빼먹었느냐' 묻는다. 스페인 내전 당시 의용군으로 참전한 조지 오웰의 말로는 무기와 보급이 워낙 엉망이라 수류탄도 불발이 많아서, 심지어 이쪽이 던지면 저쪽이 주워서 되던지기도 했다나.


그렇게 해서 수류탄 하나가 계속 왔다갔다 하다 보니, 나중에는 정이 들어서 수류탄에 이름까지 지어주었다는 거다. 조지 오웰 책은 워낙 예전에 읽어서 기억도 나지 않지만, 뭐,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하니 일단 적어보기는 해야 되겠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대의명분을 위해 모인 여러 세력이 서로 퉁수쳤던 이야기로도 기억해서 어쩐지 요즘 부쩍 생각이 났었다.


그나저나 가지이 모토지로는 또 다른 단편에서 "벚꽃이 활짝 핀 나무 밑에는 사람 시체가 묻혀 있다"는 사뭇 도시전설스러운 이야기를 내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3월이 되어도 날씨가 쌀쌀해서 과연 봄이 올까 싶었는데, 황사도 가시고 벚꽃도 피어난 듯하니 가까운 공원에 한 번 나가봐야겠다. 물론 산불 뉴스를 며칠째 본 다음이니 마음도 가볍지는 않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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