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 2010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수상작
에릭 파이 지음, 백선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그녀는 굳어버린 짐승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렇다.

그녀에게 남은 건 웅크린 동물의 모습뿐이었다. p.47

 

 

 

 

 소설은 1945년, 두번째로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한다. 2008년 5월, 아사히 신문을 비롯한 여러 매체들이 다루었던 벽장 속에 숨어 산 여자의 이야기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짚어보자면 여자가 숨어 산 그 집 주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는 일에 일찍이 실망하고는 나가사키 변두리에 사는 오십대의 시무라 고보가 집 주인이다. 특별할 거 없는 날들에 시무라 고보의 일상이 뒤틀린 건 아주 미묘하고 아주 사소한 줄자의 눈금과도 같은 것이었다. 요구르트 하나, 음료의 양이 줄어들거나 사라짐으로 인해 독거노인, 시무라 고보의 공간이 벌어진다. 귀신이 아니라면 도둑이다. 기상관측사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는 시무라 고보는 자신의 부엌에 웹캠을 설치한다. 사건의 진상은 시무라 고보의 세 번째 눈인 이 웹캠이 모든것을 알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햇살, 그리고 피사체, 그리고 어떤 여인의 움직임. 누군가가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 밥을 지어 먹고 차를 마시고 햇살을 만끽한다. 제 집인 양 익숙한 동선과 여유로움이 시무라 고보의 시선에 잡히는 순간 수화기를 들고 신고를 한다. 그리고 그 후, 시무라의 감정선에 이상 신호가 반응한다. 그 반응은 여자가 햇살을 만끽하고 있는 자신의 집에 전화를 건다. 여자가 절대로 받지 않을 전화를.

 

 일 년동안 남의 집 벽장 속에 살던 여자는 시무라 고보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았다. '살 곳이 아무곳도 없었어요.' 라고, 진술한 여자는 판결에서 다섯달의 징역을 받는다. 여자의 숨어 살던 삶은 대체로 벽장이 아닌 시무라 고보가 집을 비우는 사이,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이나 부엌에서 이루어진다. 처음 시무라 고보의 집에 들어섰을 때는 잠깐 노곤한 몸을 쉬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 벽장이 여자에게 좋은 은신처로 몸에 익숙해지면서 일년이라는 세월이 흐른것이다. 동안, 여자는 자신이 숨어 사는 곳의 주인의 흔적을 쫓기도 하고 주인이 입는 옷, 먹는 음식, 집에서의 동선을 파악한다. 적어도 그 주인의 여동생이 그에 대해 아는 만큼 알 수 있을 때가 되었을 즈음엔 이미 그녀의 식성이나 습성들이 시무라 고보를 닮아있었으며 조심스러웠던 집에서의 삶이 결국 여자를 위태롭게 할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꼭, 주인인 시무라 고보가 자신이 여기 이 벽장에 숨어 산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적어도 자물쇠를 뜯고 들이닥치던 경찰에게 연행되기 직전까지도. 

 

 그리고 시무라 고보에게 전하는 여자의 편지. 왜 그녀가 그 집 벽장에 살게 되었는지, 하고 많은 집 중에 왜 하필 그 집일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집에 관한 애착은 시무라 고보씨에게 뒤지지 않을거라는 고백 아닌 고백. 여자의 편지가 시무라 고보에게 잘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여자의 편지는 잘 봉해져 중개업자에게 전해졌을 뿐이고 그 후로 시무라 고보가 그 편지를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소설에 나와있지 않다. 납득할 수 없었던 감정선에서 헤메였던 시무라 고보가 법정에서, '더 이상 그 집에서 살 수가 없어요.' 했을 때의 최악의 악몽이라던가-벽장 속에 살던 노인은 연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것 같다는 식의-, 독거 노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망한 고독함들이 엉키면서 소설은 급작스레 끝이 난다. 여자의 편지는 그저, 애틋함 혹은 정당성 혹은 회의성에 국한되어있다. 이 소설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야했던 소재가 단 몇 페이지로 허무맹랑하게 끝난다. 나의 안목을 탓하라면 그러하겠지만, 여자의 애틋함조차 지지부진한 탓에 편지를 두 차례나 읽었음이다. 그리고, 독자가 궁금해하고 읽고싶었던 것은 벽장 속에 살던 여자를 모른체 살던 시무라 고보의 별 볼 일 없는 일상이 아닌, 벽장 속에 웅크려 살던 여자의 삶이다. 

 

 아쉽다. 이런 실화를 이렇게밖에 구현내지 못한 이 소설이말이다. 실화를 소재로 했다한 들, 빈약한 구성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음이다. 저자가 그저 기사를 토대로만 해서 실화 그대로를 옮겨 놓았다면 기름기 젖은 허구성을 쫙 뺀 소설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화제가 된 기사 몇 줄만 가지고 억지스레 끼워맞추거나 스토리를 있는대로 늘어뜨린 소설일뿐이다. 어떠한 에피소드도, 소설을 한층 돋보이게 복선도, 반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옮긴이가 '시작부터 한눈팔 틈 없이 단숨에 읽힌다'는 말에는 신빙성이 없다. 단숨에 읽히기는 한다. 페이지도 적었을뿐더러 벽장 속에 살던 여자의 삶이 언제쯤 발각될지, 그것을 쫓으며 읽었을뿐이니 그럴 수 밖에 없음이 사실이다.  그 때 그 시절, 원폭 투하가 되었던 삭막했던 시절을 곱씹으며 나가사키를 떠올린다해도 소설은, 화제가 되고 많은 사람들의 놀라움에 대한 기대치를 완벽하게 무너트린다. 몇 차례 2008년 5월의 신문기사를 찾았지만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여자가 왜 그 집 벽장에 살게 되었는지, 하고 많은 집 중에 왜 하필 그 집일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적으려다 만다.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도 하지만, 그 이유만이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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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도 그런 생각 해?
  갓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처럼 가슴이 홧홧거리고 봄 날 같은 설렘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어떤 연애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

  
  어제 저녁 퇴근길,
  딱히 먹을 저녁이 없던터라 때마침 TV에서 해물 가득 짬뽕 선전에 침 흘리며 유명하다는
  중국집을 찾아 들어섰다. 가게 안에서는 시청률이 굉장하다는 일일드라마가 방영중이었다.
  그런데 마주앉은 그이가 한참 드라마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입꼬리를 몇 차례 끌어올리는게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화면에서는 좋은 감정을 품은 성인 둘이 뭐가 좋은지 눈만 마주치면
  쑥쓰럽게 그리고 아주 예쁘게 웃고 있었다.
  화면을 한 번, 그리고 그이를 한 번 번갈아보며 내가 던진 질문이었다.
  
  
  - 당연하지.
  누군들 아니겠냐만은 망설임없이 튀어나온 그이의 대답에 발끈, 해서는.
  - 나도 마찬가지!
  하고는, 짬뽕 국물에 혼자 따라 마시던 소주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진심이다. 하고 싶다, 사랑.
  책을 읽기 시작하던 열여섯때부터 끊임없이 쉼없이 하고 싶었으며, 했다. 
  그리고 또 하고 싶다. 

  

 

  ** 

 

    

  1998년도에 출간된 임선영의 「바람꽃」,너무 오래되어 책의 이미지도 
  상실되었나보다. 하긴 내가 읽은 최초의 책이니 그리 놀랍지도 않다.
  5권으로 이루어진 책이고 중학생이 최초의 독서로 읽기에는 그리 좋은 책
  은 아니었다. 연애, 결혼, 불륜, 성, 폭력이 혼합된 책이었는데 꽤나 재미
  있게읽은 모양인지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다 읽은 후에는 임선영의 다른
  책도 찾아 읽은 기억은 있지만 제목은 잊혀졌다.  

 

       

  내가 전경린을 알게 된 책이다. 「내 생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 영화로도
  제작되어 영화로도 봤다. 불륜을 다룬 책이었고 이 책도 중학교 시절때에 읽었다.
  그리고 훗날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런 불륜정도 쯤(?)은 
  저지르고 싶게끔 만들던 책이었다.
충분히 위험했으며 매력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어떻게 여자가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남자와 홀로 지내왔던 생보다
  더 많은 생을 보내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리고 내가 좀 더 자라서 이 책을
  떠올렸을때는 '아니, 어떻게 남자마다 관계를 맺는 테크닉이 다른데 한 남자와만
  평생 해야하지?' 라고 생각했더란다.
  불륜, 참으로 치명적인 매력이 아닐까 싶다.     

  

  

   한 편의 드라마를 읽는 듯했던 이도우의「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동경하던 여자의 소개로 읽게 된 책이었다. 사실 전경린과 신경숙을 알고부터는
  진부하고 달달함을 내뿜는 로맨스는 끊은지 오래였는데 추천글이 만만찮았다.
  좋았다, 그저 좋았다. 가슴이 설레었고 입가에는 함박웃음이 난무했다.
  가장 평범한 연애가 가장 애틋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사랑 하나만으로도 연애 아닌 결혼도 가능하다고 믿게 만드는 책이었다.
  사랑이 전부라 믿게 만들었고 몇 년을 나를 사랑하나만 지향하게 만들었다.
  한 때는 정말 사랑이 전부였다. 내게는.
  물론, 사랑만 가지고 한 결혼에서는 결국 돈이 전부였구나 깨우치게 했지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건 사랑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나는 결혼 후에 할게 됐다.
  인생의 최우선이라는 건강도, 돈이 있어야 검진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참으로 처참했다. 

  



당신 말이 맞아.
나, 그렇게 대단한 놈 아니고
내가 한 여자의 쓸쓸함을 모조리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않아
내 옆에 있어도 당신은 외로울 수 있고 우울할 수도 있을거예요
사는데 사랑이 전부는 아닐테니까
그런데
그 날 빈소에서, 나 나쁜놈이었어요
내내 당신만 생각났어
할아버지 앞에서 당신 보고 싶단 생각만했어요
뛰쳐나와서 당신 보러가고 싶었는데
정신차려라, 꾹 참고 있었는데 …
갑자기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中
 

 

   

   서평으로도 썼었지만 검은 활자로 사이로 색(色)이 돋는 작품이다.
  외설적이고 음란하며 도발적이고 온 몸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더블 판타지」
  전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숨은 잠재력(?)이 폭발하는 무라야마 유카의 작품이다.
  솔직히 야하다고 해서 읽었다. 한참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술과
  컴퓨터 게임에만 매여 지내다가 가까스로 이 책을 기반으로 딛고 다시 책을 손에
  들었음이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작품 속 여 주인공이 부러웠다.
  외설적인 농도가 짙다. 10년 동안 책을 읽으면서 일반 소설분야에서 이렇게 야한
  책은 또 처음이다. 전작들을 살펴보면 아주 심플하고 단아하고 평행선을 걸을듯한
  작품들었음이 느껴지는데 작가 개개인에게도 소설 같은 '반전'이 있나보다.
  다음 작품도 이런 작품으로 나왔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다.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여린 속살을 간지럽히는 연애가 하고 싶다.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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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워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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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안에서 아름답게 굶어 죽는 것,  

그것이 내 꿈이었다.

 

 

 

 여자를 보았다. 나와 같은 사고와 병적인 환멸에 사로잡힌 여자를 이 소설에서 보았다. 1984년 생, 나와 동갑내기 소설가가 그려낸 허구의 여자이거나 혹 소설가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를 여자였다. 동갑내기의 작품을 읽는 건 꽤나 열등감을 자극하는 일이었지만, 김영하와 조영일의 논쟁에서 불거져 나왔던 이 소설가의 이름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다. 읽지 못한 책들이 방치된 채 방바닥에 널브러져있기는 했지만 이 책만은, 되도록이면 빨리 구입하여 읽고 싶었다. 별다른 기대도 없었거니와 막연히 김사과의 약력을 노려보다, 페이지를 넘기며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정확히 팔랑팔랑팔랑 세 번째 장을 넘기면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웃었다. 그 곳에 내가 있었다. 어느 소설속에서도 만나 볼 수 없었던 내가, 거기, 있었다. 아니, 그 여자처럼 살고 싶어했던 어느 한 시절의 내가 거기 있었다. 음악과 책 그리고 술과 사랑만있으면 온 세상이 내 것 같았던 그런 시절의 내 모습, 그 낭만적이기만했던 삶이 이 소설에 존재한다. 실로, 감격적이었다.

 

 실패한 소설가인 여자처럼, 걷는 것에 가진 모든 시간을 허비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난 정확히 열여덟 살이었고 보이지않는 꿈을 쫓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여자처럼 책도 읽었으며 책을 읽지않는 사람들을 멍청이 취급을 하기도 했다. 친구 많고 윗사람에게 싹싹한, 나 보다 예쁘고 다부진 언니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나와 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담배를 배웠으며 더불어 술도 배웠다. 여자가 그림 그리는 을 만났을 때, 나도 누군가를 만났었다. 여자가 그림 그리는 의 집으로 짐을 옮겼을 때, 나 또한 그 누군가의 집에서 하루종일 뒹굴고 책을 읽고 티비를 보고 컴퓨터를 하고 음악을 들었다. 여자와 풀 처럼 매일매일 섹스를 하기도 했으며 매일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매일 그 누군가와 함께였다. 실패한 소설가, 여자에게 있어 그림 그리는 이 그런것처럼 그 누군가는 나의 삶이었고 목표였으며 희망이었고 전부였다. 그림 그리는 이 그랬던것처럼 나 또한 돈이 떨어지면 종종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담배를 사고 술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그 누군가의 집에서 시켜먹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먹고 싶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여자와 풀 그리고 나와 누군가는 지나칠정도의 평화로움과 현실과는 동떨어진 생활에 익숙해졌으며 망가져갔고 사랑은 여전했으며 위험수위에 도달해있었다. 여자와 같이, '지금 이 순간'을 잡아두는 방법은 오로지 죽음,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여자는, 돈에 엉켜버린 세상을, 현실을 부정했으며 경멸했고 침을 뱉었다. 허기에 대한 굶주림의 이유가 돈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먹을 것, 그림 그리는 의 집 보다 더 좋은 곳이 여자의 것이 아니고 여자가 있을 곳이 아니어도 여자는 행복했다. 사랑안에서 아름답게 굶어 죽는 일, 그것이 여자의 꿈이었다. 노을빛이 젖어드는 옥상에서도, 길거리의 싸구려 음식들도, 현실을 망각할 수 있는 탈출구가 오로지 술을 마시는 것으로 국한되어질때도 그림 그리는 의 옆이라면 여자는 행복했다. 그림 그리는 풀의 그림을 술에 취해 여자가 망가트렸을 때, 그로인해 절망에 가까운 그림 그리는 과의 끝이 예견되었을때도 여자는 그림 그리는 이 자신의 것이라서, 그리고 그 그림 그리는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여자는 삶의 의미를 사랑안에 옭아맸다.  그리고 공백, 그리고 침묵, 그리고 무의미한 삶. 여자가 그림 그리는 의 집을 떠나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 회색빛의 거리를 다시 걷고 돈과 돈으로 결탁하여 지어진 세상의 건물들 사이로 자신의 삶을 다시금 끼워넣는다. 아무런 의미도, 그림 그리는 풀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새겨지지않는 삶을 견디며 살아 낼 뿐이었다. 사랑안에서 아름답게 죽고 싶었던 여자의 꿈이 사그라들고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고, 오로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 마음 하나만 있다면야 불가능이란 없을거라고 믿었던 때가. 그리고 평생 돈을 벌지 않고 일을 하지 않아도 여유있는 행복에 충만할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적어도 돈의 의미와 돈의 가치를 알지 못했을 때,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었을 때, 그 누군가가 나의 돈이었고 음식이었으며 생명이었고 삶의 이유가 되었을때였다. 사랑, 그게 전부였고 사랑,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여자가 그림 그리는 의 집을 떠나오면서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을 때, 나 또한 그 누군가의 곁을 떠났을때였다. 마음 둘 곳이 마땅히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눈 앞의 현실을 두고 마냥 등을 돌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그 누군가를 만나면 더 풍족하게 사랑하고 싶었다. 더 좋은 담배를 태우고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지하 단칸방이 아닌 더 좋은 곳에서 그 누군가와 살고 싶어 나 또한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와 다시 재회했을 때는 더 이상 사랑 하나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절망감, 그것이었다. 그림 그리는 과의 재회에 손을 잡고 노을빛 젖어드는 옥상에서 춤을 추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음에 여자의 낭만적인 삶을 경멸할만큼 절망했었다. 그 절망에 다만, 그림 그리는 을 따라 추락하고만 싶었다.

 

 참으로, 애달픈 소설이다. 사랑 하나만으로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여자와 그림 그리는 이 그려내던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던 퍼포먼스들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음에도 통쾌했으며 유쾌했다. 지나 온 시간과 시절을 되묻는 소설이기는 했지만 웃으며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던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 소설에 별 다섯개를 줄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직 김사과만의 색깔이 없기 때문이다. 문체와 더불어 소설의 분위기가 전부 전경린을 닮아 있다. 전경린 이미테이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쾌하지않을 정도이긴 했지만 안타까웠다. 부디, 그녀가 경멸했던 현재의 세속적인 삶을 쫓는 사회를 바꾸는 작가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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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마 이야기
나카무라 후미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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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모두가 아픔으로 점령된다

정신을 잃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고통에 엎어지고 쓰러지면서

이것이 인간의 길에서 벗어난 자에 대한 벌이라고 절절이 깨닫는 것이다. p.535

 

 

 

 나카무라 후미, 일본인 작가 이름만 봐도 안타까움에 자연스레 긴 숨이 흘러나왔다 . 나카무라 후미의 첫 작품을  손에 쥐었을때는 질서정연했던 일본은 그야말로 처참히 부서진 후였고 현재까지도 최악의 상태는 나아지지않고 생지옥의 현장으로 끝없이 치닫고 있을 뿐이다. 역사의 원수라해도, 속절없이 눈물이 찬다. 아는 이가 일본에 거주하거나 유학생활을 하는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얼마나 유약한 생명체인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만개한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시기일텐데, 절망뿐이다. 할 수 있는 건 손 끝을 모으는 것 뿐 달리 방법이 없다. 다만, 모두가 무사하길 이제 그만 멈춰주기를 바라고 또 바랄뿐이다.

 

 나카무라 후미의 「염마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 제 1회 대상 수상 작품으로서 불로불사의 문신을 손바닥에 새긴 채 살아가는 한 염마의 이야기다. 이 소설은 무사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막부시대부터 일본이 지나 온 역사를 더듬으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일본의 문신 역사를 살펴보면 그 최초기록이 17세기 말에 발행된 한 소설 작품이라고 한다. 주로 하급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인것으로 되었다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문신은 연인들의 이름을 일본 발음대로 새기는 문신이나 종교적인 맹세를 새기는 것이였다. 소설 속 염마의 문신은 일종의 주술이 걸린 마물과도 같은 것이다. 손바닥에 자신의 강한 의지와 함께 신귀를 불어넣어 새기는 것으로 염마는 불로불사의 문신을 새기면서 죽을수도 그렇다고 순리에 따라 늙을 수도 없는 생을 살아가게 된다. 칼에 맞아 헐떡거리면서도 살고싶다, 라는 의지 하나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목이 잘리거나 심장에 강한 타격을 입지 않은 이상 그리고 몸에 든 신귀가 수명을 다하거나 신귀가 숙주의 몸을 싫증내지않는 한, 염마의 목숨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다. 불로불사의 몸으로 타인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 문신으로 인해 치유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 할 만큼의 즉사가 아닌 이상은 멈춰버린 시간속에 외로이 살아야하는 것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사무라이가 활발했던 시절, 그러니까 염마가 아직 신귀 문신을 새기기 전, 적의 부대에 밀정으로 들어갔던 염마의 신분이 노출되면서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적의 부대로 부터 도망을 치면서 시작된다. 손바닥에 신귀의 문신을 새겨준 스승 바이코부터 적의 부대에 밀정으로 있을 때 염마를 챙겨주었던 오카자키 그리고 바이코의 마지막 후계자라 믿었던 불로불사의 살인마 야차. 처음, 사무라이 이야기가 불거져나왔을때는 무협인가, 싶을 정도로 뜨근미지근할 뿐 도통 소설의 장르를 정의 할 수 없었다. 무사를 다룬 무협지나 문신으로 주술을 거는 판타지체계의 소설이라면 오랜만에 접하는 장르라고 반가운 마음으로 즐거이 읽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오카자키의 죽음으로 염마에게 남겨진 나쓰라는 소녀의 출현으로 소설은, 진정한 삶과 죽음을 다룬다. 염마의 멈춰버린 시간으로 딸이자 여동생, 누이,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이 되기도하는 나쓰는 불로불사의 능력을 지녔지만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행복인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사랑마저도 한량없음을, 주어진 생의 감사함을, 세상에 영원함을 부여할 수 있는것이 있다 해도 그만큼의 고통이 동반함을 이야기한다. 몇 백년을 홀로 살아가야 할 염마의 곁을 함께 지켜 줄 수 있는 건 염마와 같은 능력을 가진 자뿐일지도 모른다. 문신으로 인한 연으로 염마를 비호해주던 무타 노부마사나 자신과 같은 신귀의 능력을 가졌지만 그 수명이 다해 염마를 떠난 고양이가 그러하듯 생명이 다 하는 것에는 각자의 때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의 손바닥에 불사의 신귀 문신을 새겨 살인을 저지르고 죽은 자의 심장을 태워 먹던 바이코의 후계자 야차, 그와 동행을 해야할지도 모를일이다. 

 

 손목에 붕대를 칭칭 감고 다닌적이 있었다. 대일밴드로는 상처가 가려지지않아 어쩔 수 없이 뜨꺼운 물에 손목에 화상을 입었다는 핑계로 둘러댔다. 죽자고 벌인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살자고 대충 저지른 일도 아니었다. 그 상태로 욕조에 몸만 담그면 끝나는 일이었다. 마른 수건으로 가까스로 지혈하며 터져나오던 피 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모르겠다. '살고'싶어서 그런건지, '살아야'해서 그런건지는. 다만, 죽음이라는 문턱이 그리 쉽지만은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지나 온 시간이 많을수록,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을수록 생에 집착은 더욱 더 강해질뿐이다. 누군가 내게 불로불사의 생을 견디겠느냐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 다. 생각컨데, 이 질문의 답은 자신이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두고 보면 분명 대답은 달라질것이다. 아니오, 란 대답이 현재를 부정하는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서른해는 더 어쩌면 당장 내일을 내다볼 수 없다 할지언정 구태여 운명을 거스리고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염마의 마지막 말 처럼, 나 역시 오직 내일만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각자의 생이 있고, 각자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면 그 생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만이 존재여부를 따질 수 없는 신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얇은 습자지 한 장, 그 차이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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