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벤트 일공일삼 62
유은실 지음, 강경수 그림 / 비룡소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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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까지만 해도 장례식장은 매우 어색한 공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검은 옷을 입고 가서는 뻣뻣한 표정으로 동료들과 밥을 먹었다. ! 밥 맛있다 생각이 들어도 드러내지 못하고, 웃긴 순간이 있어도 근엄한 그 곳에서는 애써 무표정을 고수해야만 했다.

장례식장에서 먹는 밥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고인이 마지막으로 대접하는 만찬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색함이 줄어든 건 그 때부터였을까. 출근했다 갑자기 문상 갈 일이 생겨도, 입던 옷 그대로 입고 가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사진 속 주인공의 삶과 죽음을 생각했고 편안한 마음으로 육개장에 밥을 말아 먹었다. 번개처럼 찾아오는 갑작스런 죽음은 먹먹한 애통함이겠지만, 대다수의 유족들은 준비된 죽음 앞에서 담담했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장의 풍경을 손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동화이다. 장례식을 인생 졸업식장에서 벌이는 이벤트로 여기는 할아버지는 곳곳에 유머를 담아 마지막을 준비해놓는다. 그 장면 안으로 들어간 손자는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아이처럼 이벤트의 과정을 직설적으로 묘사한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적나라한 서술은 종종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지난 6월 과학 뉴스를 통해 보았던, 포항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족류가 떠오른다. 해파리처럼 속이 훤하게 비쳐 막 잡아먹어 배 안에 들어있는 물고기까지 보이던. 투명하고 편견 없는 시선으로 바라본 죽음은 삶의 나이테에 마지막으로 생기는 굵은 테두리인양 자연스럽다. 애써 포장하려하지만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은 아이 앞에서 여지없이 속살을 드러낸다.

 

죽은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장례식장이야 수도 없이 갔지만 조의금 내고 동료들과 밥을 먹고 오면 그만이었다.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이지만, 고인의 모습을 직접 볼 정도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없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늙음으로부터 자연스레 찾아오는 쇠약함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양가 부모님은 비교적 정정하시니. 형제자매나 절친들도 별 탈 없이 지낸다. 몇몇 돌아가신 친척도 멀리 해외에 계셨거나 그리 가까운 촌수는 아니었다.

허무가 하루의 대부분을 안개처럼 감싸던 시기가 있었다. 길을 걷다가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안고 다녔다. 갑작스런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잡고 싶은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어제처럼 이어지던 시간들을 그저 견뎌야할 때, 삶에 대한 미련은 사라진다. 내게 죽음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마침표일 뿐이었다.

막연한 두려움은 있었다. 어릴 때에는 시체라는 말이 그렇게 무서웠다. 단 두 글자가 뿜어내는 음습함은 매번 나를 압도하며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어른이 되면서 언어로부터 벗어나기는 했지만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주춤거림은 한구석에 항상 있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순간이라니! 늘 보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무게감일까.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가 조금의 가능성조차 없이 이어지지 못한다는 건. 낭떠러지 앞에 갑자기 서게 된 듯 철렁한 느낌일까.

 

몇 번을 읽어도 눈이 따갑다. 같은 영화를 다시 본다면 두 번째는 감동이 살짝 사그라지기 마련인데, 매번 목 메이게 하는 미스터리한 동화다. 할아버지가 오줌을 싸 게 되는 장면, 손자와의 마지막 밤에 펼쳐지던 대화 장면 앞에서 나는 과속방지턱에 걸린다. 다음에 펼쳐질 전개를 훤히 알면서도 그 부분을 읽을 때마다 물마시다 사례 들린 사람처럼 되고 만다.

할아버지의 검버섯에서 토끼와 은하수를 발견하는 시선이 따뜻하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 난다던데, 코끝 찡하게 눈물이 고이다가도 큭큭 대며 웃게 되는 이야기이다. 죽음을 다루는 동화가 이토록 유머러스하고 따뜻할 수 있을까. 보들보들하고 은은한 온기가 느껴지는 밀가루 반죽 한 덩이를 어루만지는 기분이다. 맑고 화창한 날, 바깥에 널어 바싹 마른 빨래를 만지는 느낌이다. ‘죽음하면 연상되는 질척함은 없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죽음의 이미지가 이랬으면 좋겠다.

 

당신의 죽음을 위해 유쾌한 이벤트를 준비하신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죽음의 순간을 새롭게 상상한다. 어쩌면 생각만큼 두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까운 사람들 혹은 나의 죽음이 이벤트와 같았으면 좋겠다. 갑자기 찾아오지 말고, 삶과 관계에 대한 미련도 남지 않기를, 그런 행운을 간절히 바란다. 마지막 이벤트의 장소가 남아있는 이들에게 고인을 편안히 추억할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면, 그 삶은 완벽한 해피엔딩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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