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빈손과 위험한 기생충 연구소 노빈손이 알려 주는 전문가의 세계 1
서민 지음, 이우일 그림 / 뜨인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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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를 바닥에 펼쳤다. 나무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저녁도 잔뜩 먹었으니 모든 준비는 완벽하다. 힘을 모은다. 1차 시기, 실패다. ! 좀 더 집중해서 다시! 역시 실패다. 식은땀이 흐른다. 중력 방향으로 배를 문지르며 간절히 주문을 왼다. ‘성공하게 해주세요! 그나마 저밖에 없단 말이예요. 나무아미타불!’순간 뱃속을 내려가는 묵직한 느낌. 올레~ 미션 클리어! 콧등에 송송 맺힌 땀을 손등으로 쓰윽 닦고, 섬세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마무리 작업에 들어간다. 왼손으로는 비닐봉투의 입구를 조심스럽게 벌리고, 오른손으로는 정교하게 한 점 찍어 주변에 묻지 않도록 집어넣는 기술이다. 마침 배탈이 나 고체 상태의 그것을 확보할 수 없었던 언니, 변비 때문에 도무지 작은 덩어리로의 해체가 어려웠던 동생 것까지 무사히 성공했다. 그렇게 변까지 나눈 우애는 끈끈하게 지속되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 부르는 사람은 나와서 약 먹으세요.’얼마 후 학교에서 구충제를 먹게 된 나는 집에 돌아와서 언니와 동생의 원망을 들어야 했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지!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조금만 나눠달랄 때는 언제고!’변 한 번 나눴다가 변변한 소리도 못 들었다. 이 책의 에필로그 뒤에 나온 채변봉투 사진(p189)을 보니 예전 생각이 스물 스물 났다. 당시 기생충 이름이라고는 회충밖에 몰랐던 나는 괜히 회충을 원망했는데, 가끔 항문이 가려워서 긁었던 기억으로 유추해 보건데, 서민 박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그건 요충이었다.

 

진한 쌍꺼풀에 눈 화장을 한 여자를 보면 나는 회충을 떠올리곤 했다. 그 생각은 순전히 중학교 때 들었던 괴담 비슷한 이야기에서 기인한 건데, 미술 재료로 신문지를 가져왔을 때였다. 전면 광고로 나온 여자 사진을 보고 어떤 친구가 그러는 거다.

“얘들아! 어떤 사람이 눈이 계속 꺼끌거리고 쌍꺼풀이 짙어졌는데,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눈꺼풀 사이로 뭔가 희미한 실 같은 것이 나와 있더래. 그래서 그걸 잡아당겼더니 30cm 정도의 회충이 쭈욱 나왔단다!”꺄악! 주변에 있던 우리는 징그러움에 몸서리를 쳤고, 한동안 등하교 길에서 눈 화장한 여자를 마주칠 때면 나도 모르게 움찔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온 설명으로 판단한다면 회충이 아니라 눈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동양안충(p164)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두통-치통-생리통세트처럼 흔히기생충하면 회충-편충-십이지장충세트로 불리는 바람에 선두에 선 회충이 억울한 오해의 화살을 맞았던 거다.

 

영화 <쥐라기 공원>이 연상되었다. 보통 재미있는 책은 내용이 헐렁하고, 지식이 많은 책은 설명문처럼 지루하기 마련이건만, 치밀한 구성은 영화처럼 이미지화되어 박진감 넘치게 그려졌다. 무심코 읽다 빵 터지는 유머는 덤이었다. 길이로 보았을 때 기생충도 결코 공룡의 스케일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파라지 파크>로 영화화되어도 재미있겠다 싶다.

깨알같이 소개된 박사님의 멘트는 어린이 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기생충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알려주고 있었다. 처음에 광절열두조충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에는 지어낸 이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박사님의 멘트를 읽고 실존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몇 번에 걸친 인터넷 검색 끝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정말 많구나, 기생충이! 연가시, 편충, 십이지장충, 디스토마 등 어렴풋이 들어본 기생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게 되었고, 몰랐던 기생충까지 알고 나니 상식의 세계가 넓어진 듯 뿌듯함이 일었다. 책 내용이 너무 사실적인 나머지 공간적 배경인 홍합도까지 검색해 보았다는 건, ! 비밀이다.

 

한 땀 한 땀 이태리 장인이 떴다는 현빈의 츄리닝을 보는 것처럼, 기생충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의 애정이 느껴졌다. 멧돼지의 기생충을 연구하기 위해 120여 마리의 근육을 일일이 현미경으로 검사했다는 일화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열정을 느끼게 했다. 나도 무언가에 저런 열정을 쏟을 수 있을까. 애정을 가지고 공부하면 저토록 쉽게 설명도 할 수 있을까. 부럽기도 하고 나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생충에 대한 편견이 깨져 버렸다. 생존을 위해 제각각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아남아 온 그들의 삶은 놀라움을 넘어 찡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기생충 때문에 감동받는 순간이 올 줄이야! 가장 바뀌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생각이라지만, 바뀌기 쉬운 것도 생각이었다. 다만 그 계기가 99를 넘어가는 강렬함이라면, 발화점에 도달한 듯 순간적으로 바뀌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책을 좀 더 일찍 읽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번 추석에 친정 식구들 모였을 때, ‘그 때 걔가 회충이 아니었어~’라며 듬뿍 얻게 된 나의 지식을 뽐낼 수 있었을 것을. 더불어 채변봉투에 대한 추억도 나누었을 텐데. 밥상머리에서 얘기하기에는 좀 거시기한가? , 기생충에 대한 애정이 좀 더 필요하다. <서민의 기생충열전>으로 충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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