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
안병수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워낙 순식간에 유명해진 책이라 서평을 쓰기가 꺼려진다. 하지만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기에 서평을 적어두고자 한다.

광고 선전을 보고 구입한 책인데, 선전보다 더 충격적이다.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이 이어져,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더구나 과자를 주의력 결핍․과잉행동장애(ADHD)의 한 원인으로 본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이 갔다. 

가공식품이 나쁘다고 하는데, 어떤 근거로 나쁘다고 하는지 나도 모른다. 그냥 막연히 나쁠 것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정신이 번쩍 든다. 이 책을 읽은 이후로 나는 과자를 입에 대는 것 자체가 싫고,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는 주변 사람들이 괜히 미웠다. 정말 큰 변화였다. 이후로 내 주변 사람들의 식생활에 큰 변화가 왔다. 요즘 나는 집정리를 하다가 사탕이 나오면 아무 거리낌엇이 휴지통에 그냥 넣는다. 버려야할 쓰레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은이도 특이한 사람이다. 서울대 농화학과를 나왔는데, 무려 16년간 국내 유명 과자회사에서 신제품 개발을 한 사람이다. 일종의 내부 고발자인 셈이다. 자연 과학을 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내가 이해하기에 딱 좋은 글이다. 게다가 번역한 책이 있을 정도로 글솜씨가 있다. 이 책은 정말 잘 팔릴 것이고,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옳다면 잘 팔려야만 한다. 모든 사람에게 꼭 읽을 것을 권한다.

덮어놓고 회사를 욕하지 않는다. 현명한 소비자가 생기면, 회사가 바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반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하여 논박을 하고 싶다면,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책을 내주기 바란다. 아니면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을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정치인들은 뭐하나?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일단 과학적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로비나 기업 협찬을 피해서), 관련자들을 극형에 처하는 법률도 필요할 것이다. 제발 죽지 못해 사는 세상보다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자.

 

책 자체에만 집중하여 보면, 나도 이런 책을 하나 쓰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논리적이고, 대중적이면서, 과학적으로 근거를 가진 책 말이다. 학술서적 수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주장에 그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스페셜 6 - 전술과 전략 그리고 전쟁 베일을 벗다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 지음 / 효형출판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권이다. 나중에 7권이 추가로 나왔기에 실질적으로는 마지막권이라고 생각하였던 책이다. 6권은 싸움에 관한 것이다. 전쟁은 가장 이야기거리가 많은 사건이고 흥미롭지만, 실제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한 일이다. 하지만 늘 전쟁에 피해를 있었던 우리 나라이기에 은근히 이기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항상 조금은 흥분되는 상태로 이야기를 들었다. 잔혹한 이중성이라고나 할까?

 

특히 이 책에서는 우리가 이긴 싸움에 대한 내용이 많다. 안시성 싸움, 바보 온달, 진주성, 이순신 등.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정말 아는 것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기는 싸움에 대한 내용을 읽어서 좋았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스페셜 5 - 미스터리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 지음 / 효형출판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를 사건 중심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인물 중심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사건보다 인물로 풀어보는 방법이 오히려 사실적이고, 흥미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찌보면 더욱 인간적이다. 5권은 그런 방식이다. 특히 정여립, 원효, 마의 태자가 기억에 남는다.

역모인가, 조작인가? 조선 최대의 정치 미스터리 정여립의 난

p. 70 천하는 공물 - 나라를 사적 소유물처럼 여겼기에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

16세기 후반 조선 사회에는 정여립과 같이 화합과 평등이 실현되는 대동세상을 위해 개혁을 주장한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높아 가고 있었다

개혁 세력의 거세로 조선은 스스로 자기 모순을 치유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3년 뒤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적인 위기를 겪게 됨

그후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매몰돼 새로운 시대의 조류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된다. 정여립 사건은 명분과 신분 질서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성리학의 흐름이 경직화돼 가는 시점에서 이에 맞서고자 했던 신진 사림들의 고민과 다양한 이론적, 실천적 모색, 현실적 패배를 보여주는 일대 사건


원효는 왜 파계승이 되었나

p. 127 원효는 많은 책을 지은 대학자이자 저술가 - 100 여 종 240 여 권

손오공의 삼장 법사로 알려진 현장 조차 지은 책이 50 여권에 불과함

십문화쟁론은 범어로 번역돼 인도에까지 전해졌을 정도. 당시 동아시아권에서는 원효의 책을 읽지 않았거나 그의 사상을 모르면 부끄럽게 여겼을 정도 - 원효는 질과 양, 모든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 저술가이자 동아시아 사상계의 최고봉

p. 136 현장이 제시한 이론에 대하여 답을 제시한 사람이 원효

원효가 제시한 것은 화쟁(和諍)사상 -서로 다른 종파간의 대립과 갈등도 부처의 가르침인 한마음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융화가 가능하다는 것, 경전의 해석에 대한 논쟁들은 상황에 따라 설정된 방편에 불과 -> “십문화쟁론”을 썼다 ->원효의 핵심사상이고, 곧 불교의 핵심


신라 최후의 미스터리, 마의 태자

p. 210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 부족 형태일 때 그 추장이 신라인이었다 (송막기문)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로부터 왔다(금사(金史))

시조 함보는 금나라를 건설한 아골타의 7대조. 역으로 계산하면 함보가 만주 대륙으로 넘어간 것은 900년대 초로,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하는 격변기.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고 했다” (만주원류고)

금의 조상이 된 사람은 평주의 중으로, 이름은 금준, 혹은 김극수이며, 여진 여자와 결혼했다(고려사)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신라 세력의 일부가 그곳으로 가서 재건운동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스페셜 4 - 북한의 문화유산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 지음 / 효형출판 / 200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좋아하는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내용이 주로 들어있다. 왜 고구려를 그리워할까? 이것은 어쩌면 한민족의 안타까움과 한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영토에 대한 한, 약소국의 설움. 그래서일까? 한민족에게 고구려는 과거의 영광이자, 언젠가 다시 올 미래의 약속이다. 고조선의 땅이 넓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고, 발해의 땅도 넓었으나 오랑캐라 일컬으던 말갈족과 함께 세운 나라였다. 그러니 당시 최대 제국이던 당과 당당하게 싸움을 하던 고구려를 그리워할 수 밖에.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어찌보면 지극히 국소주의적으로 보인다. 사실 어쩌면 단일민족이라는 표현을 싫어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런 표현이 주는 인종적 독특성에 나 역시 끌리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생각들을 떠나서, 그냥 좀 힘있는 나라의 백성이고 싶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다. 언제나 주변 나라들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는 것 같기에, 더욱 과거의 영화가 그립다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재미있게 본 부분들을  살짝 기록해둔다.

p. 23 평양성은 한번도 외부에 의해 열린 적이 없다.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성문을 연 사람은 고구려인이었다. 연개소문 사후에.... 고구려의 승려 도선이 성문을 열어준 것이다.

p. 34 평양성의 외성 인구는 약 17만명 - 평양성 주변에 17만명의 두 세 배 되는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성이 지어지기 전에는 왕궁과 산성, 서민 거주지가 따로 나뉘어 있었으나, 평양성이 최로로 성 안에 모든 도시 시설을 포함하였다.

 

천 년 전의 국제도시, 개경

p. 49-50 황성

황제의 문은 다섯 개라는 황제국의 원칙은 고려의 황제가 머물던 황성을 만들면서 비로소 지킬 수 있었다... 조선이 제후국의 체제로 근정문, 흥례문, 광화문까지 세 개의 문을 지났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고려의 주변에 있는 탐라, 여진, 말갈족을 통합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들어있다.  

p. 55 개경은 최소 50만 인구였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인 13세기 초 유럽의 대도시인 이탈리아 피렌체의 인구가 약 10만명임을 생각한다면 거대한 도시였던 셈이다.

p. 58 벽란도에 들어온 남방의 나라들 : 대식국(사우디아라비아), 마팔국(인도), 섬라곡국(태국), 교지국(베트남), 이슬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스페셜 3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8월
평점 :
품절


역사스페셜 세 번째 책이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 웬지 속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 정도의 증거면 분명히 설득력이 있는데, 왜 정통 사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틀린 것임을 알면서도 틀린 답을 정답으로 선택해야 하나? 물론 사학계의 판단 기준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학문을 하면서 보면, 가끔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과정을 거쳐 어떤 잠정적 사실(또는 진리)가 만들어지고, 검증 없이 그냥 쭉 진리나 사실로 인정되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나 증거보다는 권위가 우선시되는 학문 분야에서 더욱 이런 경향이 있다. 아쉽다. 이럴때마다 정말 내가 배우는 역사라는 것을 되돌아보게 된다.

특히 이 책에서 관심있었던 부분은 남녀의 권리와 평등에 대한 부분이었다. 흔히 남녀차별이 조선시대의 유산인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여러 문헌과 기록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도 그런 관점에서 조선시대 남여를 다루고 있다.

몇 가지를 요약해 보면,...

조선판 ‘사랑과 영혼’ - 400년 전의 편지

결혼과 동시에 처가살이 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가문의 대를 잇는 장남도 처가살이를 했다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 - 경북 선산이 고향이나 그의 아버지는 결혼과 동시에 밀양에서 처가살이)

 

조선왕조실록에도 “우리나라의 풍속은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사는(장가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임란 직후까지 이어졌다. 결혼 후 처가에서 지내던 사위가 처가에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장대하면 친가로 돌아가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인 가정 풍속이었고, 이는 조건 후기의 ‘처가살이’와는 그 개념이 전혀 달랐다.

또 임진왜란 전까지 부부가 모두 ‘자내(자네)’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대화에서 쓰는 하소체는 서로 대등한 관계로 보아야 한다. 게다가 남녀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재산을 물려 받았는데,  장남이 더 받는 건 문중을 수호하는 데 필요한 위전답 뿐이었다. 또 율곡 이이 가문의 분재기는 이같은 재산분배 원칙이 경국대전에 따른다고 기록되었다. 남녀 차별 상속제는 성리학이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하는 17세기부터 현재까지 250-300년에 이르는 사이에 고착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 중기까지 집안의 제사는 아들, 딸 구별없이 나누어 맡거나 번갈아 지냈으며, 장남이 도맡지 않고 순서대로 돌아가면 담당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일본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심지어 "p. 92 혹자는 백제 문화의 정수를 보려면 일본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란 표현조차 나온다. 고대 대국이었던 백제가 그냥 망하지는 않았을 터... 

언뜻 이해가 가지 않던 일들은 무언가 감춰진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을 알 때 드는 흥분감을 맛보고 싶다면 이런 책들을 읽어보길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