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4 - 북한의 문화유산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 지음 / 효형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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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아하는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내용이 주로 들어있다. 왜 고구려를 그리워할까? 이것은 어쩌면 한민족의 안타까움과 한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영토에 대한 한, 약소국의 설움. 그래서일까? 한민족에게 고구려는 과거의 영광이자, 언젠가 다시 올 미래의 약속이다. 고조선의 땅이 넓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고, 발해의 땅도 넓었으나 오랑캐라 일컬으던 말갈족과 함께 세운 나라였다. 그러니 당시 최대 제국이던 당과 당당하게 싸움을 하던 고구려를 그리워할 수 밖에.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어찌보면 지극히 국소주의적으로 보인다. 사실 어쩌면 단일민족이라는 표현을 싫어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런 표현이 주는 인종적 독특성에 나 역시 끌리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생각들을 떠나서, 그냥 좀 힘있는 나라의 백성이고 싶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다. 언제나 주변 나라들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는 것 같기에, 더욱 과거의 영화가 그립다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재미있게 본 부분들을  살짝 기록해둔다.

p. 23 평양성은 한번도 외부에 의해 열린 적이 없다.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성문을 연 사람은 고구려인이었다. 연개소문 사후에.... 고구려의 승려 도선이 성문을 열어준 것이다.

p. 34 평양성의 외성 인구는 약 17만명 - 평양성 주변에 17만명의 두 세 배 되는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성이 지어지기 전에는 왕궁과 산성, 서민 거주지가 따로 나뉘어 있었으나, 평양성이 최로로 성 안에 모든 도시 시설을 포함하였다.

 

천 년 전의 국제도시, 개경

p. 49-50 황성

황제의 문은 다섯 개라는 황제국의 원칙은 고려의 황제가 머물던 황성을 만들면서 비로소 지킬 수 있었다... 조선이 제후국의 체제로 근정문, 흥례문, 광화문까지 세 개의 문을 지났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고려의 주변에 있는 탐라, 여진, 말갈족을 통합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는 자부심이 들어있다.  

p. 55 개경은 최소 50만 인구였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인 13세기 초 유럽의 대도시인 이탈리아 피렌체의 인구가 약 10만명임을 생각한다면 거대한 도시였던 셈이다.

p. 58 벽란도에 들어온 남방의 나라들 : 대식국(사우디아라비아), 마팔국(인도), 섬라곡국(태국), 교지국(베트남),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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